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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과 신앙의 차이

LNCK 2024. 8. 23. 20:3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2023 06 11  / 사도행전 강해 (70) / 주술과 신앙의 차이 - YouTube (녹취, 정리)


주술과 신앙의 차이                행19:8~20            

※사도바울의 3차선교여행은, 1차나 2차보다 복잡해서 '지식'적으로 공부가 필요합니다.
아래 3개 강의녹취록을 읽어보시면,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연결해서, 꿰뚫을 수 있습니다.

제가 하루에 1번씩 TTS (문서 읽어주는 앱)를 통해서 들어보았습니다.
하루에 1번씩, 2~3일에 걸쳐 총 2~3번 들어보니, 3차선교여행의 맥이 잡히는군요/편.

사도바울의 3차전도여행 P1  rfcdrfcd.tistory.com/15981406
에베소에서 고린도전후서를 쓰게 된 배경  rfcdrfcd.tistory.com/15981407
사도바울의 3차전도여행 P2  rfcdrfcd.tistory.com/15981408

..............................................

우리는 지금 바울의 3차선교여행을 함께 따라가고 있습니다. 
3차선교 여행의 중심지는 에베소 입니다. 

이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 그 이야기가 행19장 전체에 길게 나옵니다. 
(20:1절에 바울은, 핍박 때문에 에베소를 떠나서 마게도냐로 가죠.)

이 '에베소의 이야기'는 세 토막으로 나눠집니다. 
19:1~7절 :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던 제자들이,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은 스토리.

19:8~20절 : 오늘 본문인데, 에베소의 마술사들이 복음 앞에 굴복한 스토리.
                  또 바울은 두란노에서 2년 동안 말씀을 가르쳤죠.

19:21~41절 :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 소동입니다. 이 일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납니다.

◑본문 해석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3차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거쳐 에베소로 옵니다. 18:23~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2차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환대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18:19~21
'주의 뜻이면 다시 돌아오리라' 약속하고 떠났는데, 이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세 달은 비교적 긴 기간입니다. 
보통 바울이 한 도시에서 사역한 기간이 평균적으로 석 달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 와서는 회당에서만 석 달을 설교했습니다. (나중에 두란노에서 2년)
석 달을 전했다는 건, 에베소 사람들이 그만큼 바울에게 호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딜 가나 호의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9절에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굳었다'는 동사는 일종의 진행형 입니다.          *미완료 수동태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계속 마음이 더 굳어지는 쪽으로 진행되었다는 거죠.

극기야 바울이 전하는 내용을, 사람들 앞에서 비방하고 다녔습니다. :9

그래서 바울이 가르치는 장소를, 회당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옮깁니다. 
두란노는, 사람의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건물주나 유명한 학자였습니다.
어떤 큰 강당인데,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철학이나 사조를 연설하고, 들었던 장소입니다.

이 두란노서원 강의실을 바울이 타임을 빌려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이때 당시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어요.
그러다가 오전 11시쯤 되면 해가 너무 뜨겁기 때문에, 오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후 일과를 오후 4시쯤에 시작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오전 11시~오후 4시까지는 두란노 서원이 비었던 거죠. *오침

그 비는 시간을, 바울이 강당을 빌려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냐면, 2년을 날마다 내리 가르쳤습니다. 

▲19: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이때 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빌립보에서 썼음
고린도에 보낸 편지는 총 4편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고린도전서, 후서만 남아있죠.
소위 '이전 편지' → 고린도전서 → 소위 '눈물의 편지' → 고린도후서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rfcdrfcd.tistory.com/15981407
 
고린도전서에 관련한 구절을 찾아봅시다.
고전16: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고린도에서 3명이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사정을 전해 주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과 떨어져 있는 바울에게, 세 사람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왔죠.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라고 말한 것은, 
'그들은 여러분을 보고 싶어하던 내 허전한 마음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공동번역
'여러분을 만나지 못해서 생긴 아쉬움을, 이 사람들이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이 세 명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바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났다 등의 문제죠.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그 문제들에 대한 답을 편지로 써 보낸 게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서 에베소에서 이제 고린도후서를 보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위 링크를 읽어보세요.

본문으로 돌아가서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0

자 이렇게 2년 동안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오늘날의 터키를 말합니다. 갈라디아 산악지대를 제외한 아래 지역.
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 일곱교회 말고도, 골로새 교회, 히에라볼리 교회도 있었죠.
물론 성경에 이름이 안 나오는 교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이 언제 세워졌느냐? 
본문의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듣고 돌아간 사람들이 세웠다는 주장이 가장 강력합니다. 
에베소교회와 두란노서원이, 아시아 전도에 허브(중심) 역할을 했다는 거죠.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울에게 표적이 뒤따릅니다. 

▲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굉장히 희한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앞치마'는, 설겆이 할 때 쓰는 앞치마가 아니라,
천막을 만들 때 둘렀던 일종의 작업복 이었을 것입니다. 

'손수건' 역시, 바울이 작업을 할 때 땀을 닦는 천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피부에 닿았던 천 조각 만으로도,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바울이 가지도 않았는데, 원격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굉장히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유의할 사실은,
사실 이런 기적은 일상적으로 매일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12절의 동사들도, 미완료가 아닙니다)

오늘날 어느 집회에서, 만약 이런 기적들이 일상적으로 매일 일어난다고 하면, 
일단은 분별해 봐야 합니다. 이런 일은 극히 특이한 일입니다. 

말씀을 올바로 전하다 보면, 성령이 임하시고, 이런 기적들이 가끔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습관적으로, 매번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도, 표적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말씀사역 위주였지, '능력사역' 위주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도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요.

그래서 11절에 기록된 '놀라운 능력'에서 
'놀라운' 이라는 말을 원문으로 보면, '이례적' 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튁하노 

참고로 같은 단어가 행27: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튁하노
                       
백부장 율리오가, 호송중인 죄수 바울을, 방면에서 시돈의 친구들에게 대접받게 했죠.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지, 늘상 있는 일은 아닙니다. 어쩌다 한 번 그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례적인 능력'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본문엔 '놀라운 능력' 19:11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걸 가지고 '오늘날도 이런 기적이 매번 나타난다'고 하면, 
위험한 사람인 거죠. 
(적어도 이 구절은 이렇습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다른 용례가 있습니다.
즉 신유가 한동안 계속 나타났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말씀사역을 능가한 건 아닙니다)
물론 반대로 20~30년 동안 표적이 한 번도 안 나타나는 것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자 그러면 왜 바울에게 이런 이례적인 기적이 나타났습니까? 
여러분 이 비슷한 기적이, 앞서 행5장에도 나타났던 적이 있죠. 

'베드로가 지나갈 때 병자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히기를 바랬습니다.' 5:15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 나타났던 기적이, 바울에게 똑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적은, 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기적입니다. 
베드로가 사도라면. 바울도 사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바울도 사도라는 사실을, 기적을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라는 사실을, 표적을 통해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바울의 사적인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인치고 확증하는 사도적 표적으로 기적이 동반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도적 표적을 흉내내는 가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어떤 유대인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돌아다니면서 마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마술은, 요즘같은 눈속임의 마술이 아니라, 
정확히는 주술사와 같습니다. 

어떤 주문을 외우거나, 주술적인 행위를 통해서 
질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걸 하면서 돌아다니면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주술사들은, 기본적으로 신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신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뭐 제우스든 누구든, 아무 신이나 불러서라도, 기적이 일어나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주술책이 따로 있었습니다. 
거기 보면 주문들이 쭉 이렇게 적혀 있는데요. 그 주문들을 반복적으로 외웠습니다. 

그러니까 마술사들은, 이방 신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주문들을 반복적으로 외우는 겁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한 번 병고침을 받거나 귀신이 쫓겨나가면, 용하다는 소문이 나게 되죠.
그걸로 돈벌이도 하게 되죠.

그런데 이들이 에베소에 와 보니까, 대단한 능력자가 있는 겁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놀라운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주술사들이, 바울을 흉내내서 따라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바울이 부르는 저 신의 이름을 한번 불러 보자'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3b

그런데 또 다른 가짜가 나타났습니다.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이들은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아들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서, 바울처럼 귀신에게 명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사장이면 유대교의 영적인 지도자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유대교의 지도자 아닙니까? 
그 지도자들이 지금 마치 주술적 퍼포먼스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의 아들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악귀 들린 사람에게 명하였습니다. 자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악귀가 떠나기는 커녕, 악귀가 대답하여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15

이 문장을 원문으로 보면, '너희는 누구냐?' 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제대로 번역하면 '너희는 대체 누구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바로 알아본 게 귀신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어도, 귀신들은 예수님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이 제사장의 아들들에게 묻는 겁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대체 너희는 누구냐?' 

그러니까 귀신이 이들을 지금 굉장히 무시하는 겁니다. 속된 말로 개무시를 하는 거죠. 
귀신이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정확히 아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갑자기 UFC (격투기) 같은 장면이 벌어집니다.
귀신들이 사람이, 제사장의 아들들 위에 뛰어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귀신의 힘으로 눌러서 제압을 하는 거죠. 
제사장의 아들들이 일곱 명인데, 귀신 들린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귀신이 들리면 초자연적인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주1)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귀신이 들린 한 사람이, 일곱 명을 이기는 것입니다.
7명이 오히려 제압을 당해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7 아들들은, 벌거벗은 채로 (옷이 찢어진 모양) 줄행랑을 쳤습니다. 

▲19: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그런데 이 소문이 에베소 도시 내에 짝 퍼졌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래서 일어난 일이 있는데요. 세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1) 모든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진짜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귀신도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인정하는 구나. 
예수님이 진짜 신이시구나' 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2) 신자들이 일어났습니다. 
18절에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자기들이 한 일을 자백하고 공개하였다 : 새번역)

에베소에는 이미 믿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까지 행한 일을 공개적으로 자복했습니다. 

여기서 '행한 일'은 
주술적으로 행한 일을 뜻합니다. 
'행한 일'은 '프락시스'인데, 영어로 practice 죠.
영어로 practice 는, 주술을 행한다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즉 에베소의 많은 그리스도인 새신자들은,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옛 습관을 청산하지 못하고, 은밀한 가운데 미신과 주술을 좇거나 
그 같은 일들을 직접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의 능력을 확실히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자 
자신들의 은밀한 주술적 죄를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능력 대결 power encounter' 에서 승리한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 라는 도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당시 에베소 하면, 사람들 뇌리에 딱 떠오르는 게 '주술의 도시' 였습니다. 

그 증거가 19절에 나오잖아요.
은 5만이나 되는, 수많은 주술책들을, 에베소 사람들이 다 모아서 불태웠던 것을 보면,
이 도시가 평소에 얼마나 주술이 유행했는지 알 수 있죠.

제가 주석을 찾아보니까, 에베소에는 흑마술이 있고, 백마술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마술 white magic 은 주술인데, 병을 치료하듯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마술이고,

흑마술 black magic 은, 저주를 목적으로 사용되는 주술을 말합니다. 
허수아비 인형 등에 바늘을 막 꽂으면서 저주의 주문을 외우는 것도 흑마술에 속하죠. 
마술로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타로 점치는 일은, 에베소 사람들에게는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날에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도시 자체가 주술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자가 되었어도, 이 주술의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신자들이 행한 일을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돌이켜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은밀하게 행하던 주술을 숨김 없이 다 자백하고 돌이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불신자들의 변화가 19절에 나오는데요.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마술을 행했던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기들이 사용했던 주술 책들을 다 가지고 나와서 불태운 겁니다. 

그 책 값이 은 오만 이나 되었습니다. 
여기 은 하나는, 당시에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면 은 오만은, 오만 일의 임금에 해당되는 거죠. 오만 일이면 약 150년인데요. 
한 사람이 150년 동안 일해서 벌 수 있는 임금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 입니다. 
하루 임금을 10만원으로 잡으면, 50억 입니다. 

50억 어치의 어마어마한 책들이 쏟아져 나와서 다 불태워 졌습니다. 
마술과 주술에 찌들었던 사람들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그 일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 다 불태웠겠습니까? 주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태웠던 겁니다. 
누구도 주술을 접하지 못하도록, 
또 다시 에베소 사람들이 주술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책을 아예 불태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회개가 진짜 회개였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자백함에 그치지 않고, 행위로도 보여지는 진짜 회개의 열매가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베소에서 이런 회개의 열매가,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20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러분 결국은, 주의 말씀이 흥황하여 세력을 얻으니까, 
치유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는 역사가 있었고, 
사람들이 마술책을 불태우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말씀사역과 능력전도 사역을 동격으로 두면 안 됩니다.
말씀사역이 기차로 치면, 기관차와 같고, 나머지는 다 객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 가는 것이지, 객차가 기관차를 끌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적용1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끊임없이 이 '말씀 사역'을 강조합니다.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13: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1차, 비시디아 안디옥

18: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2차, 고린도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3차, 에베소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여러분, 목사가 '가운을 입는 이유'를 들어보셨습니까?
개신교 전통인데요, 목사는 '말씀을 연구하는 학자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박사가운 같은 가운을 입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요즘은 설교자가 가운을 안 입는다고, 말씀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연구해서 가르치는 것은, 위에서 보듯이 사도행전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사도들이 '말씀 사역'에 전무했던 것입니다.  6:4

전임사역자가 세상 일을 안 하는 전통이 생긴 것도, 
말씀사역에 전념하라고, 교회에서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력있는 설교자들은, 보통 오전 내내 '말씀 연구'에 힘쓴다고 합니다.
모든 활동이나 미팅은 오후로 미루고요.

본문 에베소에서, 바울이 썼던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져다 덮어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2
그러나 그게 본문의 결론은 아니고, 결론은 20절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이 말씀사역은, 꼭 에베소에서만 흥왕하여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 사역의 중심이요, 핵심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고, 

'사도행전적 교회, 사도행전적 부흥'을 지향하고 꿈꾸는 사역자들은
사도바울처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사역을 해야 할 것입니다.
☞추천글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https://rfcdrfcd.tistory.com/15981810


◑적용2 '주술과 신앙의 차이'    *설교 제목  

본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의 선명한 대조를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한 부류는, 예수의 이름을 주술에 사용하려했던 사람들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
또 한 부류는, 예수의 이름으로 주술로부터 돌이킨 사람입니다. *회개한 자들

먼저 예수의 이름을 주술에 사용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이들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악귀에게 명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아니라,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예수를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예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단지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무엇을 위해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또는 예수님 그분의 생각과 뜻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내가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에, 예수를 이용하고, 동참시키면 되었습니다. 
내가 이루려는 그 일에 효험이나 능력이 있으면 
제우스든, 포세이돈이든, 예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교인들이, 요즘 세상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이들의 특징이 뭡니까? 심심하면 점 보러 다니는 것입니다. 신자인데도 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이루기 원하는 목적을 위하여, 예수라는 이름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또 다른 주술의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13절에서, 스게와의 아들들은 '시험삼아'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관주에 보면 '망령되이' 라고 했습니다. '망령되어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뜻도 되죠. 주2)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란 그런 주술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뭔가를 이루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주술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된 삶에서 돌이켜 것입니다. 
죄된 삶에서 돌이 켜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 구하는 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 보면, 대부분은 좌절과 고통과 절망 때문에 나옵니다. 

그걸 해결하려고 나오는 거죠. 

그런데 결국 그것 때문에 누구를 만납니까?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종착역은 '주님을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문제 해결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을 알아가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주님이시구나' 그걸 믿게 되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 무릎 꿇는 자리로 가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뭘 얻어내는 게, 주 목적이 아닙니다.
사은품으로 뭘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신앙은 헌신, 순종,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의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기가 신앙의 종착점이 되면 안 됩니다. 

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응답을 받는 것은, 처음에 신앙 생활의 동기일 뿐이지 
이것이 목적이나, 종착점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나 종착점이 되면... 주술신앙이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친근한 표현으론 '샤머니즘'이죠.

이런 분들은 반드시, 다른 신들을 잡탕으로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어준다면.. 그게 누구든지 상관없다는 식이니까요! 
내세가 안 보이고, 현세만 자기 눈에 보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술과 신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주술이나 미신은, 내가 신을 조종해서, 내 필요를 얻어내는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절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나를 부인하고, 나를 스스로 조종해서
그 분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술을 믿는 사람은,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 강화를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도 자기 부인이 전혀 없이, 그런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것에 관심 밖인 사람들이,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써 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아니라, 사실은 주술, 샤머니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이토록 힘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신앙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싸움이 아니라, 세상사람들과 추구하는 바가 똑같은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을, 자기는 (영리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그걸 더 쉽고 확실하게 얻겠다고 하는... 희한한 욕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런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을 극혐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우리는 그런 주술을 부추기는 설교를 하거나, 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내가 원하는 세상적인 것들을, 더 많이 잘 확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리고 기도를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세상적으로 더 잘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혹시 세상적으로 잘 되지 못한 성도가 있다면, 
잘못 믿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자기 마음속으로 비방합니다.

그렇게 세상 싸움을 하고, 세상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하나님을 거기에 동원하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겁니다. 
이건 스게와의 일곱 아들과 비슷한 행태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한 능력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 번 해 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 덮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귀신도 나갔습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시죠?
정작 바울은, 자기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는데, 그건 하나님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시면서
절대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하고 충성된 종인데도 말이죠...

자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은 오히려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고후12:9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강함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기뻐했습니다. 
자기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시고 
그를 통해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 응답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통해 역사하시고, 나의 약함을 사용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내 소원은 다 응답되어야 해!'
그런 주술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결국 기도를 포기하게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니까요...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나의 신앙은 주술적 신앙인가, 
참된 믿음인가? ...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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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귀신들린 사람의 초자연적인 힘의 예'
저도 군대에 있었을 때, 이런 일을 곁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 전방에서 해안 GOP 에서 경계근무를 섰습니다. 

전반의 산에서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근무를 섰는데요. 
근무를 설 때는 보통 두 명씩 같이 섭니다. 밤새 근무를 서는 데요. 

어느 날 밤에 하루는 갑자기 보초 서던 군인 한 명이 
'엄마~' 를 부르면서, 산언덕에서 내려와가지고 바닷물로 막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한밤 중에, 엄마가 거기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런데 '엄마~' 부르면서 막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뭔가에 씌인 거죠. 그대로 뛰어 들어가면 이제 그 병사가 물에 빠져 죽는 거죠. 
그래서 옆에 있는 선임병이 그 후임병을 재빠르게 쫓아가서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끌고 올 수가 없더래요. 워낙 힘이 세가지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제압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바다속에 들어가려는 후임은 키가 작았고 몸이 왜소했습니다. 
반면에 그를 제지하고 붙잡았던 선임병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컸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도리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더래요. 

그래서 선임병이 이러다가 자기도 죽겠다 싶어서 
결국 후임을 때려서 기절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나서 내무실로 끌고왔는데요. 
그 후임병은,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그가 깨어나서 물어보니까, 정말 하나도 그 전 날 밤의 일을 기억 못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성경을 보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설교자가 미신자)
'아 귀신에 씌이면 힘이 저렇게 세지는구나...'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귀신이 들린 한 사람이, 일곱 명을 이기는 것입니다.
7명이 오히려 제압을 당해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귀신이 들린 한 사람이, 일곱 명을 이기는 것입니다.
7명이 오히려 제압을 당해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7 아들들은, 벌거벗은 채로 (옷이 찢어진 모양) 줄행랑을 쳤습니다.


주2) 원어에는 '시험삼아'가 안 나옵니다. 그냥 '불렀다'로 나옵니다. *오노마죠 
그래서 공동번역, 새번역에도 이 말 '시험삼아'가 없습니다. 
그래도 관주가 달린 것을 보면, 아마 다른 사본에 나와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