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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6

128 고치려고 하지 말고

LNCK 2006. 2. 18. 22:10

 ◈고치려고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세요!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행5:38

 

 

어떤 분은 30년 가까이 두통을 앓았다.

그래서 하루는 두통에 권위 있는 의사를 소개받아 진찰을 받아 보았다.

그는 두통으로 인해 아스피린을 먹고 자야하는 괴로움을 의사에게 말했다.


의사가 물었다; “아스피린을 먹으면 두통이 낫습니까?”

환자가 대답했다; “네, 먹으면 낫습니다.”

“그럼 별 것 아니네요. 그것 못 고치니 그냥 아스피린 드시면서 사세요!”

환자는 속으로 ‘아니, 뭐 이런 무성의한 의사도 다 있나...?’


의사의 깊은 뜻은 이랬다;

두통에는 약 1만 가지 정도의 많은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정확한 두통의 원인을 찾기란 대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원인을 찾아야 치료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의사는 두통 환자를 진찰할 때

이 환자가 두통으로 죽을까, 안 죽을까를 제일 먼저 판단한다고 한다.

죽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힘들어도 꼼꼼히 원인을 파고들어 찾는다. 


그렇지만 죽을 병이 아닌 두통 환자도 많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원인 찾기도 힘들고 치료도 힘드니, 죽을 정도로 심하지 않으면

고치려고 애쓰다 고생만 하지 말고, 그냥 두통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이다.


당뇨병 역시 치료되는 병이 아니다. 그래서 당뇨병 환자는

평생 당뇨병을 지니고 그 병과 친하게 지내며 살아야 한다.


이 말에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담겨있다고 본다.

양극화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불치병과 같다.

그럴 바에는 억지로 무리하게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주님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이 안식일 규례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지켰다.

그 바람에 그 규례를 위하여 인간은 속박되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원래 목적은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었는데

변질된 현상은 <안식일을 위한 사람>으로 인간이 도구화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변질된 율법주의를 교정시켜 주셨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7)

안식일의 율법과 규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사상’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우선 존중히 여기면서, 사상간 대립을 따져야 한다. ←성경적 사고

우선 사람을 서로 사랑하면서, 빈부 계층간 대립을 고려해야 한다.


사상(규례)을 먼저 앞세우고, 사람을 깔보는 것이 율법주의, 바리새주의다.

양극화 문제를 숭상하므로, 반대편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은

바리새 주의와 같다. 올바른 기독교적 사상이 아닌 것이다.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가 하면, 당신의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이런 복음의 눈으로 나와 다르다는 사람을 보실 수 있기 바란다.

사람을 사랑하는 눈을 가지면, 문화의 차이, 양극화의 차이는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고와 판단의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복음의 정신으로 이 시대의 문제라는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되자!

 

 


▲문화적 차이도 마찬가지

머리에 물들이는 청년들, 찢어진 바지 입는 청년들, 피어싱(뚫기) 등

신구 세대는 문화적 차이로 서로 충돌하기도 하는데


사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문화적 가치관의 차이를 -사람보다- 더 높이 숭상해서

반대편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바리새 주의다.


사람을, 비록 나와 다른 문화적 가치관을 지니더라도, 먼저 존중하고

그 다음에 문화적 가치관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다.

그 이질적 문화가 복음의 본질을 크게 흐리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인터넷 설교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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