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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문화가 되어버린 세상 06.03.26.스크랩, 녹취 *원제목 : 주가 쓰시려면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찌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렘14:7
▲하찮은 것은 얻고, 소중한 것은 잃다
한 십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이 일본에 가면 기가 죽었다.
경제적 격차로 인해, 약간의 콤플렉스를 안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동경에 가면, 어떤 한국인은 ‘촌스럽다’고 말한다.
젊은 애들 말로 ‘후지다’고 한다.
가게의 인테리어,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
이런 면에서는 한국인이 더 낫다고 한다.
나라는 일본보다 못 살지만, 국민 개인은 일본보다 더 잘 사는 것 같다.
주택 규모를 비교해 봐도, 한국 사람은 더 넓은 집에서 사는 것 같고
먹는 것을 봐도, 우리는 풍성하게 먹는 편인데
일본에서는 식당에서 단무지 한 개도 거저 안 준다.
어떻게 우리나라가 이 정도로까지 발전했는지 모르겠지만
물질적인 면에서는, (잘 사는) 한국인은 매우 풍요로운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물질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사는 것은, 한국도 점점 더 힘든 세상이 되었다.
하찮은 것은 얻었는데,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죄가 문화가 된 세상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죄가 문화가 된 세상이다.
그것이 ‘문화’가 되면, 죄의식이 없어지고,
죄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
여름에 바닷가에서 옷을 벗고 수영복을 입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문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정장을 하고 다녔다가는 오히려 정신병자로 취급받을 것이다.
죄가 문화가 되면,
죄를 짓는 것이 마치 수영장에서 수영복 입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등 부끄러울 것이 없게 된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도리어 ‘죄 안 짓고 어떻게 살아?’ 그런다.
죄가 문화가 되어서, 죄 안 짓고는 살 수 없다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요즘 왠만한 죄는 죄 아니다....
▲시대에 따라 ‘죄 문화’가 조금씩 바뀐다.
가난할 때는, 죄 문화가 대개 말 또는 돈과 관련한 것들이다.
거짓말, 욕설 등 말과, 남의 돈 떼먹기, 도적질 등 돈이 문제였다.
가난할 때는 그것들이 이해, 용납되어지는 면도 있었다. 삶이 힘들었으니까...
부하게 되면, 그런 죄들은 자연히 없어진다.
공항에서 짐 찾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가방의 짐표를 확인하지 않는다.
확인하는 직원이 없어도 아무도 가방을 훔쳐 가거나 바꿔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는, 지금도 공항 빠져나올 때 반드시 짐표를 검사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힘들면 자연히 욕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살기가 편해지면, 자연히 거친 욕설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개인과 나라가 점점 부유해지면, 성적 문란은 더 심해진다.
성경은, 성을, 합법적으로 결혼한 부부에게만 허락해 놓으셨는데
세상은, 성을, 충동적 감정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게 열어놓고 있다.
▲자꾸 후퇴하는 성적 도덕성
옛날에는 반드시 결혼 후에,
후퇴해서 결혼을 약속하면...
더 후퇴해서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더 후퇴해서 처음 만나도 서로 충동적인 감정만 느끼면...
언제든지 관계가 가능한 상태로 열려져 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코드를 좇아 행동한다.
그러므로 매우 문란한 삶을 산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최고가 된 것도 그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답답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세상 기준으로 사는 것이다.
“요즘 다 그래~”라고 하면서...
수영장에서 다 수영복 입고 다니는 것처럼
자기도 수영복 입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자신의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귀히 여기고 쓰시기 때문이다.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죄와 싸워야 한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마음과 싸워야만 한다.
주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예민하고 민감했다.
죄를 아파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둘째 아들의 개인기도 제목을 보니,
<죄가 있으면 아프게 해 달라>가 거기에 들어있었다.
그렇다. 죄가 있으면 아파야 하는데...
아픔을 못 느끼다 보면... 결국 죄로 망한다.
성경은 그것을 ‘애통함’ 또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하셨으며(마 5:4),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고 말씀하셨다.
사도바울은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괴로워하였다.
그 괴로움이 지나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노래했다.
그와 같은 마음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는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다’고 했다.
잎새에 부는 바람도 아니고,
잎새에 떠는 바람도 아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그는 괴로웠다.
그만큼 그는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다.
이해인 수녀는 시집 「민들레의 영토」에서 자신을 가리켜
죄는 많으면서도 뉘우침조차 사무쳐 오지 않는 불모의 사막과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가룟 유다는 나와 함께 떡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 사람이라고까지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지만 즉시 돌이키지 않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네가 닭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닭이 울 때 정말 돌이키고 회개했다.
가룟 유다는 죄에 대하여 둔감한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죄에 대하여 예민한 사람이었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닭소리에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 사람이었다.
▲우리 대부분은 죄에 대하여 둔감한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죄 짓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고
별로 불편하지도 않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보편화된 죄의 문화에 익숙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세상을 따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죄와 싸우라.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히 12:4)고 말씀하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윤동주 시인과 같이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예민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
조그만 죄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그래서 시대적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란다.
<인터넷 설교 발췌 요약, 06.03.26. *원제목 : 주가 쓰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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