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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6

사64장 해석

LNCK 2006. 3. 30. 03:55

 

◈주의 강림을 구하는 기도      이사야64:장       10.12.12.설교스크랩,  출처2

 

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에, 사도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계22:20

비슷하게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사야는 '주여 어서 강림하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64:1

 

이사야63장, 64장은 서로 연결된 장으로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기도가, 단순히 이스라엘 멸망을 보고 예언한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63장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63장의 시작이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세상을 심판하시면서

피 묻은 옷을 입고 있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기도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마지막 때에 어떤 신앙의 자세로 어떤 기도를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주여 강림하소서              사64:1~4

 

여기서 '강림'은.. 크게 보면 주의 재림을 뜻하지만,

때로는 우리 각자와 공동체에 '심판의 주'로 강림하실 때도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강림'도 될 수 있습니다. (이중, 삼중의 뜻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강림하여 달라고 3가지로 기도하였습니다.

64장 전체는 ‘기도문’입니다.    *63:7~64:12가 이사야의 기도

 

▲1절,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하나님은 폭풍,  불, 구름 가운데 땅 위에 내려오시는 분으로 묘사되어지곤 하는데

그 목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백성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고, 

-그 대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입니다(시18:9, 144:5).

여기서는 후자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시면 산들이 진동할 것이며,

불이 산을 태우듯이 불이 물을 끓임같이 할 것이며,

열방이 두려워 떨 것이라는 것입니다.

 

▲2절,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여기 사름을 당하고 끓음을 당하는 것은 ‘산들’(1절)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임하실 때

그 단단한 산은 불을 받고 그 강한 열기의 작용으로 인해

액체처럼 밑으로 흘러내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것인데, 특히 화산을 연상케 합니다.

시리아,  팔레스틴 및 사해 주변에서 당시 화산 분출이 빈번했다는 역사적 고증이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임재의 막강한 영향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 옛날 모세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온 산이 진동을 일으켰고,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강림하셨지만,

열방이 두려워 떨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온 세상이 두려워 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강림으로 산천초목이 진동할 것이며,

온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온 세상이 두려워 떨 것입니다.

 

(마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대환난이 온 세상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는

그 날에 비밀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에 일어날 일을 모르는 자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절,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이사야 선지자는 먼 옛날에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일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

이전에 결코 목도하지 못했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을 가리키는데, 

그 일이란 출애굽 사건을 뜻합니다.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이것은 불과 연기 가운데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셨던 것을 가리킵니다. (출19:18)

 

‘진동하였사오니’ 

‘흘러 내렸으니’가 더 원문적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이 역사가, 자신들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되어질 말씀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 때에 되어질 비밀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계시록은 불신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라면

마땅히 계시록의 비밀들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계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이 땅에 교회 역사가 끝나기 까지 모든 교회는, 일곱 교회 중 어느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 노아방주 교회도 이 일곱 교회 중에 한 교회에 속한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마다 마지막에 주어진 예수님의 간절한 부탁은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지막 되어질 말씀을 기억하면서

반드시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오직 택하신 자를 위함입니다.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여기 ‘앙망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인데, 

바울은 이 같은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고전2:9)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본 구절을 바울은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자’로 적고 있습니다(고전2:9).

 

이제 것 들은 적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는 이 세상의 심판은

오직 택하신 자들에게 영원한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자를 위해

악의 세력을 멸하시고 세상을 불바다로 만드실 것입니다.

더 이상은 택한 자들이 사탄에게 미혹되고 괴롭힘 당하는 일이 없도록

예수께서 철장의 권세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강림하심을 원하십니까?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질 때, 성령의 강림하심이 내 영혼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온전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고 싶으십니까?

오직 예수 신앙이 될 때 진실로 성령의 강력한 다스리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 신앙이 아닌 자에게

절대로 성령의 강한 임재하심은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성령 충만 받고자 하는 자는 많은데

‘오직 예수(만)’ 신앙을 가지려고 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명심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이 먼저가 아니라

오직 예수 신앙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능력 행하는 것으로만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은 예수 충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날마다 성령의 임재와 다스리심을 사모하며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주님의 강림때, 나의 부족한 모습(을 긍휼히 여기소서)  사64:5~7

 

우리는 날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 앞에 내 자신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 성령을 떠나게 하신 것은 자신들의 참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세 종류의 모습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까?

 

5절,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

원래 ‘기억하는 자’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구원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길’이란 율법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진노하셨사오며’ 

이것은 탄원자의 깊은 사색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자비가 있으시고 그 언약 백성을 축복하는 분임을 알면서도, 

본절의 ‘우리’는 하나님이 큰 진노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히 그 앞에 나아가시 못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의 죄악과 타락상에 대해

통절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그 마음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입니다(눅18:13, 14).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이스라엘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조차도 할 수 없어 애타하는 심정을

묘사하는 대목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범죄한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곧 오직 예수의 의를 행하며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한 해 동안 내가 얼마나 예수의 의를 행하며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고 살아 왔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올 한해, 내 의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다면

이제라도 마음을 새롭게 먹고

2011년도는 오직 예수의 의를 행하며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며 살겠다고 다짐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6절,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부정한 자’(타메)

레위기적 의미의 오염되거나 더러워진 그 무엇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모세의 율법에 따른 오염되거나 혐오스러운 동물(레11:29, 30), 또는 인간(레15:2~12) 등에

특히 문둥병자에게 주로 적용되었는데(레13:3)

이 같은 자는 성도의 회중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더러운 옷’

문자적인 뜻은 ‘더러운 걸레’입니다.(레15:33, 20:18)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0)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이 죄인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죄인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도 그 죄악의 뿌리가

그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은 자들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자의 첫 외침은 모든 자들이 한결같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성령이 임재한 자들의 첫 외침은 모든 자들이 한결같이

“나는 더럽고 추하고 악한 존재” 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딤전1:15) 라고 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4) 하였고

 

여러분! 날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만이 죄악의 뿌리가 내 영혼 속에 깊게 자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7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스스로 분발하여’

눌려 있던 영적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영적 무기력 상태를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얼굴을 숨기시며’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신 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중단하자 많은 결과가 발생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 빠졌던 영적 무기력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 베풀기를 중단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문자적인 뜻은 ‘녹게 하셨나이다’입니다.

얼음 따위가 녹아내리는 모습 따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이스라엘의 대적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초월적인 현상 앞에서 공포로 떨 때의

심적 상태를 묘사할 경우 사용되고 있는데(출15:15),  

여기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고 주를 붙잡는 자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설혹 깨달았다 할지라도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 얼굴을 숨기시고 그 죄의 대가를 보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롬6:23)

 

예수의 피로 사함 받지 못한 자의 죄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보응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렘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잠11:31)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자신이 죄를 회개하지 아니한 자에게 가장 무서운 보응은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외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아버지여, 과히 분내지 마옵소서          사64:8~12

 

8절,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자신들을 진흙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45:9,  렘18:6)

토기장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흙을 주무릅니다.

진흙이 어떤 모양의 용기가 되거나 혹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에서 본 토기장이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운명, 존재 자체가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는 까닭은, 구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오직 그들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세 번이나 부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구약의 시대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네 사람 뿐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신32:6)

예레미야가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렘3:4)

다윗이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89:26)

그리고 본문의 이사야의 고백입니다.

 

구약의 시대에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한 임재가 아니었다면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서기관들이 하나님 이름을 기록할 때, 목욕을 하고 기록했을 정도로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까지 하였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 라고까지

하셨으니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아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인정하는 것은

곧 나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께, 자녀는, 긍휼을 구할 수 있습니다.

 

9절,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여기 ‘주의 백성’이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읽게 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언약 때문에,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징벌에서 놓이고

다시 언약 백성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로 나가는 출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의 호소입니다.

 

10절,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지금 서술된 장면은 그 성취 시점이 미래입니다.

말하자면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시점은 서술된 내용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미 성취된 듯 완료 시제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법은, 그 내용이 미래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거룩한 성읍들’

예루살렘은 단수인데, 복수로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 본토가 쑥밭이 되어버린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복수형을 사용한 것으로 봅니다.

 

11절,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전’

여기 ‘찬송하던...전’이란 하나님께 예배하던 성전을 가리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소는

전토나 가옥의 파괴 및 손실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예배 처소로 삼아왔던 성전의 파손입니다.

진지한 회개의 일면이 엿보입니다.

 

‘즐거워하던 곳’

원문 직역은 ‘소망의 대상들’입니다.

성전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살던 가옥들 그리고 온 도성을 가리킵니다.

 

범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분노 하실 수밖에 없다고

9절-12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처럼 황폐해 질 것이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분노로 아름다운 거룩한 성전이 불에 탈 것이며,

즐겁게 손뼉 치며 찬양하던 성전이 황무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여호와의 일이라고 12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마지막 때에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지 아니한 교회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당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진실로 교회들이, 주의 종들이, 성도들이

성령의 주관 속에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과 수단과 방법이 온통 교회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수단과 방법에 의해,

교회들이 주의 종들이 성도들이 다스림 받고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 교회는

아무리 화려하고 거대하다 할지라도 광야처럼 황폐한 모습으로 변해 갈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즐거워하고 찬송을 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지 않는 성전은 불로써 심판 당할 것입니다.

 

(벧전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은 교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곧 주의 종들과 성도들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아버지의 자녀들은,

본문의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3:2

 

12절,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일이 이러하거늘’

곧 지금까지 자세히 열거한 재앙들을 가리킵니다. (10, 11절).

참 회개(5절)와 재앙의 진상을 아뢴 후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일이 이러할 것입니다” :12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긍휼이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믿는 다면

12절 말씀처럼 기도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러한 황폐함을 보고도 바라보고만 계실 것입니까?”

“계속해서 침묵만 지키고 계실 것입니까?”

 

“속히 개입하셔서 구원의 능력을 베풀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곧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믿으며,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83:1)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구약의 예언서에는 “여호와의 (심판의) 날”

즉 마지막 심판 때에 대해 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암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여러분! 그 날에 우리 모두 성령의 다스림 속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 손을 놓지 않는 것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되어 질 여호와의 일들이 진실로 두렵다면

오직 예수 신앙 안에서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는 먼 훗날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때에 되어 질 일들을 얼마나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까?

 

세상의 종말을 전하면 많은 자들이 이런 말들을 합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예수만 열심히 믿으면 되지 않느냐?

뭘 그렇게 예민하게 신앙생활을 하느냐?” 라고 합니다.

 

참으로 위험한 소리이고 무지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예수 열심히 믿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은

곧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생활 몇 년 정도 하셨습니까?”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신부된 모습을 준비하고 있으십니까?”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습니까?”

 

만약에 오직 예수 신앙과,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다면

성령께서는 그런 자에게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한

관심과 사모함을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때가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되어 질 일들이 창세 이래로 무서운 날이 될 것인데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은 자들에게 어떻게 성령께서 가르쳐주지 아니하겠습니까?

 

육신의 부모님도 자식들이 어디가면 “조심해라” “밥 잘 챙겨 먹어라”

“돈 잘 간수해라” “길을 모르면 사람들에게 묻고 거라” 여러 말씀을 많이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마지막 때에 되어 질 일들을 가르쳐주지 않고 심판을 내리시겠습니까?

 

여러분!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마지막 때를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