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계기 눅 8:40-56
이 세상에 우리 힘대로 안 되는 불행들을 많이 만난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우리 힘대로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그 불행을,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을 → ‘행복의 씨앗’으로 바꾸어준다.
▲1. 아이를 잃고도 감사한 엄마
호스피스 사역단체에서 발행한 잡지에 실린 글을 읽었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겨우 6살 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병원에서 제공하는 ‘호스피스 케어’를 받게 되었다.
크리스천 호스피스 사역자가 그 아이를 케어 했는데(잘 보살핌),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아이에게 복음을 전했고
만날 때마다 천국에 관한 이야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감사하게도 그 아이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던 중 아이는 천국에 갔고, 호스피스 사역도 자연히 끝났다.
몇 주가 지나서 그 호스피스 사역자 앞으로 장문의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였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어린자식을 먼저 보내게 되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감사하고 정말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왜 감사한가? 어린 애가 죽은 것이 뭐가 감사한가?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는데, 이 아이가 마지막 투병생활을 할 때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엄마, 나 이제 무섭지 않아!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야!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이야...
거기서 나중에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어머니는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그러나 아이의 마지막 투병과정을 지켜보면서
또한 죽음을 담담히 맞이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뭔가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고,
자신도 하나님을 믿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의 장례를 잘 치른 후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 곧장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지금은 남편과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다.
아이를 잘 돌봐줘서 고맙고, 또 예수님을 전해줘서 너무 고맙다...
그런 내용이었다.
저는 이 사연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6살 된 어린 자녀를 잃은 어머니 - 불행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말 감사합니다!” - 그분의 고백에는 감사가 있었다.
그 편지에는, 뭔가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이 엿보였다.
뭐라고 꼭 꼬집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분에게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좋을 만큼,
밝고 긍정적인 삶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불행한 일을 당했지만, 그녀는 결코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알고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 유대 마을에 야이로 라는 회당장이 있었다.
그의 어린 딸이 죽을병에 걸렸다.
부모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야이로는 불행하고 절망적인 자기 인생의 큰 시련을
불행으로 끝맺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행 때문에, 죽었던 딸이 다시 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더 중요한 것은, 불신자였던 그가,
예수를 믿기 가장 어려운 위치(회당장)에 있었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믿었고,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야이로가 자기에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 절망으로 끝맺었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가?’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나갔다면
자기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그는 정말 불행한 결말을 맺었을 것이다.
야이로가 자기 불행을 극복한 비결는 무엇인가?
자신의 불행을 <주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로 삼았다.
그 결과, 불행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았고,
행복으로 결말지었다.
▲3.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인 도 마찬가지였다.
고치지도 못할 병을 고친다고 재산 다 탕진하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그러나 이 여자도 불행으로 시작했지만, 행복과 새 희망으로 끝맺었다.
그 절망적인 상황을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불행 -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피할 수 없다.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역경과 재난 -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내 힘으로 피할 수는 없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불행이 → 새로운 행복을 낳는 씨앗으로 변한다.
▲살다보면 인간관계에서, 불쾌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그것을 처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계기>로 삼자.
열 받는 일을, 더 열 받는 반응을 나타내지 말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일례로, 주님이 나를 시험하신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는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난관을 → 행복의 씨앗으로 바꾸는 삶이다.
그런 신앙인격훈련이 필요하다.
울어도 하나님 앞에서 울고
몸부림해도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 하고
괴로워도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면 → 소망이 있다.
사람에게 원망, 하소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4. 부자 청년
막 10장에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교양과 학식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켜 행했으니까.
게다가 돈도 많았으니 어쩌면 불행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한 명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 그런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행복과 물질 때문에, <주님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세상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자신이 가진 행복의 조건, 평탄한 환경 때문에, 축복 때문에
오히려 그는 영생의 <주님을 포기>하는 불행한 자가 되고 말았다.
야이로와 혈루병 걸린 여인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불행인가?
▲오늘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예수님과 멀어진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불행이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더 가지는 것’이라면, 부자청년처럼 된다.
‘더 가지되’ 그 목적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면>, 비록 못 가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자족하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형통과 평탄함이 주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이유는,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주님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가진 후에, 대부분 주님을 떠난다.
실제로 병 고친 사람 중에 9명이 떠나고 1명만 남지 않았는가. 눅 17:17
그래서 그 형통과 축복이, 도리어 재앙이 되는 삶으로 마쳐진다.
가장 최악의 신앙인은
평탄할 때는 평탄해서, 나태해져서... 주님과 멀어지고
곤고할 때는 곤고해서, 원망하다가... 주님과 멀어진다.
반대로 최선의 신앙인은
평탄할 때는 감사하며 더 겸손하고... 주님께 더 충성하고
곤고할 때는 곤고하므로 더 겸손,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더 가까이 간다.
▲불신의 소리를 주의하라
그럼, 불행을 만난 사람들이 왜 쉽게 좌절과 원망에 빠지는가?
왜 그것을 선용해서 <주님께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불신의 말에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눅 8:49
야이로도 자기 딸이 죽자, 순간 흔들렸던 모양이다.
그 때 예수님은 믿음의 소리를 들려주신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눅 8:50
우리가 위기를 만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합리적인 조언인데... 믿음이 없는 말,
-틀린 얘기는 아닌데... 그 뿌리가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말,
-옳기는 한데... 믿음의 가치관이 아닌 조언.
그런 말들을 좇으면 → 결국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불행해 진다.
야이로가 만약 주변사람들의 합리적 말을 들었다면, 중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야이로의 마음속에 강한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믿음의 확신이 없을 때는, 이성적,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알아주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냐?
그 시간에 차라리 네 앞길이나 준비해라!”
“그렇게 속상한 일을 당하고도 또 그 봉사를 하니? 너는 속도 없니?”
어리석은 사람은 이 때, 주변인의 옳은 말을 듣고 포기하고 만다.
▲성도의 행동 기준은 상식이나 옳고 그름을 초월한다.
그것이 “믿음이냐/아니냐?” 이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옳으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믿음의 행동이냐?” 이다.
옳고 상식적으로 행동하면, 그저 상식적인 사람이 된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동하면,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06.04.05. 인터넷 설교 요약, 불행조차도 은혜로 바꾸는 원리, 눅 8:40-56.
[주제별 분류] 고난의 신학 http://blog.daum.net/bible3/8069077
'분류 없음 > 2006'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8 크리스천 직장 생활 (0) | 2006.04.24 |
---|---|
187 독후감 「영광의 문」 (0) | 2006.04.22 |
먼저 전하면, 은혜는 생기는 법 (0) | 2006.04.20 |
성령세례 받기를 사모합시다! (0) | 2006.04.19 |
183 물고기 너머를 보는 시각 (0) | 2006.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