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남은 자’를 통하여! 롬9:1~33, 사6:13 <07.10.21.
아래 설교문은 로마서 9장의 전체 맥락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또한 나 자신이 혹시 '혈통적 유대인'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바울이 가졌던 딜레마
롬9장에는 중요한 딜레마가 한 가지 나온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소위 ‘택함 받은 선민’이었다.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택함을 받았다면, 구원 받는 것은 당연하다.
<택함 받은 백성이 구원받는다①>는 당연한 명제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 롬9:2
그 이유는, 택함 받은 선민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택함 받은 백성이라도,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②> 롬9:1~5
위의 ①과②는 쉽게 풀 수 없는 딜레마가 된다.
그래서 바울의 큰 딜레마와 질문은,
<유대 백성이 택함 받은 것은 분명한데, 왜 구원 받지 못하는가?>이다.
하나님이 택했다는 약속은 과연 헛된 것인가?
차마 이렇게 까지는 말을 못 꺼내지만, 하나님의 택함은 헛된 것인가?
▲1.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남은 자 remnant 신학’이다.
바울은 이사야서와 호세아서에 나오는 ‘남은 자 신학’에서
그 해답으로 찾았다고 말한다.
그는 로마 서신에 그 구절들을 언급하면서,
택함 받은 유대백성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롬9:6~7
당시 많은 사람들은 ‘육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인줄 알았다.’
바울은 그것이 오해라고 한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롬9:7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아브라함 자손(유대인)을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만 구원한다, 즉 ‘남은 자를 통한 구원’이었다.
▲바울이 든 예증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모두 구원 받는다’고 (잘못) 알고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만 보더라도,
이삭은 구원 받았지만, 이스마엘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롬9:7
이삭의 자녀 중에서도, 다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야곱은 구원 받았지만, 에서는 구원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롬9:10
그러므로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약속은 어긴 바 된 적이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언제나 ‘전체(집단) 구원’이 아니라,
‘남은 자를 통한 구원’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말은, 모든 유대인 단체적 개념이 아니라,
그 중에 ‘남은 자, 일부분’이라는 뜻이다.
▲2. 또한 그것은 혈통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자녀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아브라함의 피를 받았다고..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혈통이 아니라면, 이방인도 남은 자가 될 수 있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이방인)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않은 자’(이방인)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9:25, 호2:23
바울은, 이스라엘 바깥에 있던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선언을 호세아서를 통해 발견했다.
성령님이 주신 지혜요,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혈통상의 유대인들이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큰 오해이다.
그 중에 남은 자만 구원받고,
그 남은 자에는 믿음을 가진 이방인(내 백성 아닌 자)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엔 쉬운 개념이지만, <이방인도 남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선민사상에 젓어있던 혈통적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획기적인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스스로 선민의식(모태신앙, 정통신학, 정통교회)에 빠져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남은 자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3.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언제나 ‘남은 자를 통한 방식’
이사야서에 ‘남은 자’ 신학이 나온다. *the remnant
이스라엘아,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더라도
그들 중에서 오직 소수의 사람들(남은 자)만 돌아올 것이다. 사10:22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 이름이 ‘스알야숩’인데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란 뜻이다. 사7:3
이 땅 백성의 1/10이 남는다고 해도
그 땅은 다시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잘리더라도
그루터기는 ‘남는 것’ 같이
거룩한 자손들이 그루터기(남은 자)가 되어
거기에서 다시 싹이 틀 것이다. 사6:13
‘남은 자 신학’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나무를 잘라도 밑동은 남는다.
거기서 다시 싹이 나고 움이 돋는다.
그와 같이, 모든 세상이 타락하고, 다 멸망의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남은 자는 언제나 명맥을 이어간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결코 소멸되지 않고, 시대를 흘러서 내려간다.
아합 왕 때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와 우상에 절하지 않은 7천인을 남기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망하거나, 소멸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남은 자’들이 남게 되어있다.
◑‘남은 자’ 신학의 적용
▲1. 신앙은 숫자가 아니라, 순수함이다.
‘남은 자만 구원 받는다’는 것은, 소수만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신앙은 ‘다수, 교세, 주류’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절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소아시아 7교회 중에 칭찬 받은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결코 숫자적으로 큰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교회들이었다.
반면에 크게 책망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했으며, 큰 교회였다.
오늘날에도 북한의 지하교회와 남한의 교회들을 비교한다면,
남한의 교회들이 교인 숫자가 많고, 경제적으로도 더 부유하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오늘날 북한의 지하교회를 더 정통으로 보실 수도 있다.
그들이 진짜 오늘날 한국교회의 남은 자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다.
통일이 되고, 우리 다음 세대의 교회사학자들은,
이 시대에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로, 북한지하교회를 남은 자로 평가할 수도 있다.
결코 숫자나 교세로서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2차대전 때도 대다수의 독일교회들은 히틀러를 옹호했다.
그러나 본회퍼를 위시한 소수의 고백교회만 히틀러에 반대했다.
숫자적으로 본다면, 당시 대다수의 교회들이 올바로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짜 남은 자 교회는 당시에 이름도 없는 소수의 ‘고백교회’였다.
오늘날 역사는, 2차대전 당시 독일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고백교회’로 이어간다.
만약 그들마저 없었다면, 참된 독일교회는 역사적으로 그 당시 공백으로
처리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도 한국에 천만에 가까운 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롬9:27
적어도 나만큼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남은 자에 속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모래처럼 많은 사람들 틈에 섞이지 못하더라도...
오늘 이 시대에 내가 남은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2. ‘남은 자’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를 붙든다.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았다.
그런데 이방인은 구원을 받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연고인가?
'의를 추구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믿음에서 나오는 의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했지만 그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왜 얻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믿음에서 나오는 의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 의가 마치 행위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의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롬9:30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았던 이유는 - 행위의 법에 따라 갔기 때문이었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던 이유는 - 믿음을 통한 은혜의 법을 의지한 연고였다.
①원래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스스로 혈통적으로 의롭다고 교만했다.
스스로 자기들을 높이며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며 무시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았다고 스스로 교만했다.
행위를 붙든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자기를 높임이요, 교만한 자세이다.
반대로 은혜를 붙든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를 낮춤이요, 겸손한 자세이다.
오늘도 은혜로 구원 얻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고 철저히 낮아진다.
그래야 은혜로 구원 받는다.
②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인 당사자들이었다.
그런데 자기들이 죽인 그 예수를 믿어야 의롭게 된다고 하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예수를 믿으면, 자기들의 잘못을 자동적으로 시인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를 통한 ‘은혜’를 붙들지 못하고
구약적 전통인 ‘행위의 의, 의식과 할례의 준수를 통한 의’를 고집했다.
그들에게 ‘구원의 반석’은 도리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롬9:30
오늘도 자기 나름대로, 혈통과 행위의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다.
모태신앙인으로 몇 대째 신자 가문이요, 주초를 금하며, 교회 봉사경력 몇 년 등이다.
조상 적부터 정통 기독교를 믿어왔다고 자부한다.
그런 것들이 ‘겸손히 예수를 붙드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런 ‘유대인’들을 버리시고, 오늘날에도 ‘이방인’들을 택하실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지역 교회의 수명을 30년으로 잡는다.
아무리 크게 명성을 떨치며 놀랍게 쓰임 받았던 지역 교회도
평균적으로, 쓰임받기 시작해서 30년이 지나면... 그 영향력이 쇠퇴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춤하는 사이에 새로운 ‘이방인의 교회’(별 볼일 없었던 교회)들이 새로 일어났고,
그 교회가 크게 쓰임받기 시작한 지 또 30년이 지나면...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새롭게 쓰임 받는 교회들이 다시 일어난다. 이 현상을 ‘등대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촛대가 내게서 ‘이방인’으로 옮겨지지 않도록
철저히 겸손히 낮아져서 은혜를 붙들어야 산다.
반대로 자고해져서 남들 무시하고 있다가는... 촛대가 ‘이방인에게로’ 옮겨진다.
더 나아가, 은혜는 광야에서 온다.
원예사들이 꺾꽂이를 할 때, 기름진 땅에다 하지 않는다고 한다.
꼭 척박한 모래땅에 한다고 한다. 만약 기름진 땅에다 꺾꽂이를 하면,
굳이 뿌리를 깊이 내릴 필요가 없어서 뿌리가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꺾꽂이의 목적은, 가지를 꺾어서 나무처럼 뿌리를 만드는 것인데,
모래땅에 꺾꽂이를 하면, 아무 양분이 없으니까,
자꾸 밑으로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뿌리가 자라난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광야(모래밭)에 보내어진다.
그래야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은혜의 생수를 길어 올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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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선순환하며 전진하는 힘
대역사학자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10권의 <역사학> 연구책을 내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이 역사는 다 기울어지고 잘못 되었을 때도,
그것이 바로 잡혀지고 또한 거기에서 새롭게 되어진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극소수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내면적 영감 internal spirituality을 가졌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썼다.
그것을 받은 소수의 사람 creative minority에 의해서
역사는 새롭게 되어지고 전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수자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러한 소수자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또 그리스도가 받은 요단강, 빈 들, 고난의 현장,
그리고 꾸준히 함께 가서 그의 신도로서의 창조적 소수자의 반열에
설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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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에도 문화가 있어야
교회에서 (진리/비진리를 떠나서)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 할 때에
너무 원색적인 젊은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좋은 방식이 아니다.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 대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는데,
그때 데모가 중에 듣기에 섬짓한 것들이 있었다.
‘때려 부수자, 타도하자, 박살내자...’
그 구호와 표현이, 너무 원색적이었다고 본다.
같은 시기에 남미에서도 군사독재 정권이 있었는데,
그들이 부른 ‘데모가’를 보면,
데모를 하는 것도 <문화적 수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뭐든지 좋은 것은 겸허하게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
‘메르세데스 소사’ 여사가 작사한 남미 최고 데모가song 내용이 이렇다.
*제목 : 삶에 대한 감사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눈을 뜨면 흑과 백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는
두 샛별을 내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는 빛나는 별을,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내 사랑하는 이를 주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밤과 낮에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를 들려주고,
망치소리, 터빈소리, 개 짖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녹음해 넣을 수 있는 넓은 귀도 주었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어머니와 친구와 형제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의
영혼의 길을 밝혀주는 빛도 주었고요.
(이하도 계속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로 시작한다.)
군사 정권의 압제 속에서 피눈물 나는 탄압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소사 여사는 <감사의 노래>를 전파하면서, 민심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독재정권은 위기를 느끼며... 결국 와해되었다.
이를 갈게 만들고, 타도하자 등 혐오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 아니라,
<감사합니다>를 노래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감사합니다!>를 불렀다.
이런 인격적 성숙과 도덕성이... 결국 낮은 도덕성을 눌렀던 것이다.
이런 것이 부작용이 없다.
이런 것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 승리하신 방식이다. <08.02.17. 인터넷 설교에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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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빼앗는 5가지 욕심
1. PASSION FOR PRESENTING 자기 과시욕
별 것 아닌 인간이 조금 성취했다고 자기를 우상화, 과시하면 그 순간 끝난 것임.
사업 자랑, 건강 자랑, 사역 결과 과시하면 즉시 넘어짐.
히스기야 왕이 과시하다가 망했음.(왕하 20:13-17)
2. PASSION FOR POSSESSION 소유욕
가진 자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고 욕심내면 지금 누리는 행복마저 빼앗긴다.
3. PASSION FOR PROTECTION 과도한 자기 보호 본능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그들이 사는 강한 성을 파괴하신다
그리고 그 위로 가난하고 학대받던 자들이 밟고 걸어다니게 하신다(사 26:5-6)
하나님은 때로 평등하게 하심, 그것이 하나님의 뜻
과도히 자기 가진 것을 지키는 것, 기득권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의 결과 역시...
4. PASSION FOR PROFIT 이권욕
이익, 이권 다툼을 위해 몸부림치고 자신은 눈꼽만큼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것
손해볼 때는 손해를 봐야 행복을 얻을 것임.
5. PASSION FOR PATRIOTISM 과도한 충성심/애국심/극우파
세상 모든 나라가 각각 과도한 애국심으로 나가면 세계 역사는 피로 물든다.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이팅게일이 전장에서 적군을 치료해 주면서 한 말.
진리, 하나님의 뜻-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것-이 애국심보다 앞서야 함.
어떤 짐단에서 과도한 충성심을 보이면 결국 그 집단에 해악을 끼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