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원한 패자인가? (확산 일로의 이슬람) 시67:3 스크랩
이재환 선교사 칼럼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67:3
“선교는 전쟁이다”라는 말은 귀에 익은 말이다. 선교는 정말 전쟁이다.
전쟁에는 죽이는 자와 죽는 자가 있고,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
가장 큰 전쟁은 헌팅턴이 말한 문명충돌이라는 선교의 전쟁이다.
잘못된 종교전쟁으로 십자군 전쟁도 있었으며,
그런 종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영적 전쟁은 이슬람이 생긴 7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불행하게도 우리 기독교는 눈에 보이는 전쟁에서는 졌으며, 여전히 지고 있다.
많은 기독교 국가들이 이슬람에 의해 정복당했다.
북부 아프리카 나라들이 과거에는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가진 기독교 국가였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한 이슬람 국가로 변했다.
터키 역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있던 나라였고,
이스탄불은 로마의 교황이 머물던 성지(?)였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은 순금 90톤 값을 투자해서 5년 동안 지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아름다웠던 교회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슬렘들의 모스크가 되었다.
얼마나 아름답고 철저하게 지었는지 모슬렘들은 건물 안의 그림이나 치장을
없애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모스크로 변했지만 교회 같은 모스크로 남아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졌다.
유럽의 많은 교회가 모스크로 팔려 나가는 것은 이제 보통의 일이다.
그 귀한 파이프오르간이 아깝기가 그지없다.
우리는 십자군 전쟁의 시작부터 그들에게 졌다. 망신을 당했다.
로마의 교황이 정식으로 이슬람에게 사과하지 않았던가?
옛날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슬람에게 지고 있다.
유럽은 점점 증가하고 있는 모슬렘을 막을 길이 없다.
프랑스에는 500만 명의 모슬렘이 있고, 독일에는 370만 명,
그리고 영국 120만 명, 벨기에 37만 명, 이태리에는 67만 명의 모슬렘이
자리를 굳게 잡았다. (비교, 한국에 기독교 8백만)
유럽에서 힘을 잃은 기독교가 이들을 이길 수 있을까? 죄송하지만 어림도 없다.
프랑스는 영적으로 이미 죽었다.
위그노의 학살이후 한번도 그 땅에는 부흥이 일어난 적이 없다.
(위그노 : 종교개혁 후 구교도에 의해 박해받던 프랑스의 신교도를 일컫는 말)
50여의 프랑크폰 지역(불어를 쓰는 지역)은 함께 죽어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숫자적으로 20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벌써 이슬람은 13-15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 저들은 저토록 부흥(?)을 했을까?
우리가 잠자고 있는 사이에 이슬람은 오뉴월의 물오리 자라듯이 자란 것이다.
가라지가 곡식보다 풍성하게 되었다.
많은 기독교 국가가 이슬람 국가로 변했지만
한 번도 이슬람 국가가 기독교 국가가 된 적은 없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길 길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살기를, 그들은 죽기를 각오!
우리는 한 번도 모스크를 사서 교회로 바꾸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기독교의 나라가 이슬람 국가가 되고, 많은 교회가 모스크로 변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반대로 바꾼 적은 없다. 우리는 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최대 고민도 예루살렘에 있는 황금의 돔을 가진 회교도 사원이다.
유대교의 심장 위에 모스크가 서 있는 것이다.
모슬렘들은 가톨릭의 성지인 로마 베드로 성당 근처에
더 웅장한 모스크를 짓겠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문화의 충돌이 아닌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
매년 모슬렘들은 한 달간의 금식기도기간인 라마단을 철저하게 지킨다.
그러나 이 라마단을 전쟁으로 생각하며 ‘역라마단’기도를 하는 교회는
과연 몇 개나 되는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겨우 깨어있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1992년에야 처음으로
이 라마단 기간 동안에 ‘역라마단’을 시작했다.
13억의 헌신된(?) 모슬렘들은 이 땅을 무서운 테러의 세상으로 바꾸었다.
(그들 중에 강경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모든 사람이 이 테러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다.
몸에 화약을 짊어지고 알라를 위해 죽기를 준비한 헌신자들(?)이 수 없이 많다.
우리에게 이 복음 전쟁을 위해서 죽기를 각오한 헌신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우리는 살기를 바라고 있다.
과연 이 전쟁을 이길 수 있을까?
연약한 선교사들이 몸에 복음의 화약을 짊어지고 격정의 현장으로 갔다.
이들의 수고는 눈물겹다.
현장에서 맞이하는 선교사들의 죽음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기니에서 꽃다운 나이에 말라리아로 죽은 처녀 선교사의 소식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와 함께 사역을 했던 선교사님의 대학 2년생 공주 같은 딸이
강도를 만나서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죽었다.
장래의 이라크 선교사후보생이었던 김선일 씨는 견습생으로 가서 사역하다가
우리나라가 그 곳에 파병을 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과격파들에게 살려달라는 하소연도 소용없이 목을 베이는 참수 당했다.
우리는 지고 있는 전쟁을 눈으로 보고 있다.
그들과 싸우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없어서 참패를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이겨야 한다.
그렇다. 기독교식 승리방식은 지면서 이긴다.
저들은 테러를 감행하며 정복하지만, 우리는 순교를 당하며 정복해 나간다.
앞으로도 이런 순교자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중세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가 진 것도 다행이고 섭리다.
만약 이겼으면, 테러가 그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아고, 선교는 끝났다.
지금 미국이 힘으로 이기려고 하니까, 이슬람에서 반미항쟁이 가속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세계선교의 바통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자연스레 넘어오고 있다.
◑선교전쟁, 다윗이 되면 골리앗을 이긴다.
선교는 전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철저하게 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전쟁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진정 다윗이며, 저들이 골리앗이라면 우리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분명히 골리앗인데, 우리는 다윗이 아니라면 이길 수 없다.
저들이 선교지에 퍼붓는 돈을 보아도 우리의 그것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이슬람은 엄청남 자본을 투자하여 마을마다 우물을 파고, 모스크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도 세워준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골리앗이다.
이슬람 국가는 법으로 종교적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철저하게 선교를 방해하고 있다.
국가가 권력을 행사하여 이슬람을 보호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선교사 비자는 주지 않는다.
선교사들을 마치 스파이처럼 취급하는데,
스파이가 어떻게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알량한 프로젝트로 비자를 연장하고
날마다 이민국의 눈치를 살피며 전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싸워야할 군사들은 후방에 진을 치고 있으며
전쟁터를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교회가 일어나면 된다. 선교의 전쟁을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다윗이 되면 가능하다.
다윗은 골리앗의 힘과 크기에 위축되지 않았다.
다윗은 갑옷도 입지 않았다.
그의 무기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에 대한 신뢰함에 있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바울이 그와 같았다.
허드슨 테일러가 그와 같았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가 그랬다.(한국 최초 순교자)
작은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분을 가졌을 때,
골리앗은 단 한방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 사람의 헌신이 나라를 구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50여개의 이슬람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어나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13억의 모슬렘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원의 대열에
우리의 형제자매로 함께 서게 될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다윗이 선교사라면,
물맷돌은 후방에서 선교를 위하여 꿇은 무릎이다.
다윗은 시편 68편에서 모든 민족으로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라고 말했다.
골리앗을 이긴 그는,
여호와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을 분임을 고백하고 있음 같이,
모든 모슬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기는 전쟁’이란 확신이 게으름의 핑계가 될 수 없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이 선교 전쟁은 결국 우리가 이긴다!”라는
믿음의 확신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우리의 영적 게으름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 주실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현재의 전쟁을 태만히 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게으른 우리에게는 책망이 있을 것이다.
선교전쟁의 승패는 후방에 있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 물맷돌 5개를 가지고 감히 나아 갈 수 가 있었던 것이다.
선교지의 선교사들이 전쟁의 격전지에 있는 전방 용사라면
우리는 병참부대의 후방 지원부대이다.
우리가 뒤에서 중보기도자로서 지원을 게을리 한다면 그들은 패하고 말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해산의 수고 같은 중보기도가 없이는 우리는 결국 지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 군대는 지금도 신병훈련소의 훈련을 마치고
마지막 선서를 한 후에 정예부대의 군인으로 파견이 된다.
이들은 지금도 구약 속의 여호와의 언약을 낭독하며
그 때의 여호와가 지금도 같은 여호와임을 믿고 나아간다.
그들은 이 전쟁의 주인이 여호와라고 믿으면서 생명을 걸고 헌신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 앞에는 아무 적도 없음을 우리는 안다.
신념은 이처럼 무섭고 강하다.
우리는 어떤 신념이나 믿음을 가지고 실제로 이 싸움에 동참하고 있는가?
이슬람의 철옹성, 힌두교의 만리장성 그리고 불교의 견고한 성벽과
모든 종교의 장벽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그 전략을 가르쳐 주셨고 능력도 주셨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모습은 최고의 전략이다.
믿음으로 그들의 성 밖을 돌아야 한다. 이는 철저한 중보기도이다.
모든 교회가 함께 기도로 돌아야 한다. 우리는 무너질 때까지 돌아야 한다.
그리고 다윗과 같은 헌신된 용사들을 전쟁의 선두에 보내야 한다.
이들이 선교사이다. 교회는 후원부대로 최선을 다하여
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지원과 동참을 해야 한다.
사탄의 종말은 선교의 종말에 달려있다.
모든 세계가 복음화 되면 사탄은 무저갱으로 영원히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탄은 마지막을 포효하는 사자처럼
모든 교회와 선교사들을 쓰러뜨리려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승리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지금보다 두 배만 선교의 전쟁에 뛰어 든다면
전쟁의 시간은 열배로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재환 선교사, 컴미션 대표, 1984년부터 15년 동안 아프리카 감비아 만딩고 족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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