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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6

322 지는 것이 이기는 것

LNCK 2006. 9. 3. 09:34
 

◈지는 것이 이기는 것

 

 

홀로 된 자(진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이긴 자)의 자녀보다 많으리라! 사 54:1



▲십자군 전쟁의 딜레마

20대 때,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십자군 전쟁

기독교 측의 무참한 패배였다.

어떻게 십자가의 문장emblem과 예수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군대가,

초승달 모양의 깃발과 알라의 이름으로 맞서는 군대 앞에 패할 수 있는가?

알라가 더 능력 많은 참 하나님이신가? 말도 안 된다!


성지를 되찾겠다는 목적 또한 얼마나 고상한가?

그 선한 목적을 위해 고향을 떠나, 말과 도보로 수만 리 먼 장정에 오르는

십자군들이야 말로 가장 충성된 그리스도인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한 번도 아니고, 수차례에 걸쳐 번번이 패하다니...


요즘 이제 제가 신앙에 철이 좀 들었나 보다...

당시 십자군의 패배가 도리어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십자군 식 무력적 정복과 승리를 절대 허락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철저히 자기를 죽이는 방식의 승리이기 때문에

남을 죽이고 그 위에 군림하는 식은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낫기 때문에

당시 십자군이 지는 것이 섭리였고, 후에 더 큰 참극을 막는 길이었다.


▲요즘 국제 뉴스의 최고 화두가 되고 있는 테러의 기원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PLO가 이스라엘 선수들을 공격한 것이

시발이었다고 히스토리 채널에서 분석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테러라는 활동이 역사에 뚜렷하게 없었다는 것이다.

간헐적은 있었겠지만, 지속적인 활동으로 나타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쓸데없는 염려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중세시대에 십자군 원정이 성공해서 칼과 창으로 중동을 정벌했다면,

테러의 기원이 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 때 벌써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군 전쟁이 실패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뜻이다.


▲또 다른 교회사의 딜레마를 찾으라면,

7세기에 이슬람이 중동에서 발흥했을 때, 왜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기독교가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했느냐는 딜레마이다.


교회사 책에는, 4세기 초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정부와 교회가 연합한 권력이

무거운 세금 징수 등으로 백성들을 심하게 압제한 결과, 민중들은 차라리

상대적으로 짐이 가벼운 이슬람을 환영했다는 것을 첫째 원인으로 꼽는다.  


쉽게 설명하면 기독교 로마제국이 부패했다는 것인데,

칼과 창을 앞세운 힘의 논리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자 기독교인들마저 교회를 등지고

구약의 기독교와 비슷한, 4촌쯤 되어 보이는 알라신으로 개종한 것이다.


▲오늘날 호언장담으로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아직도 빈 라덴을 잡지 못해 힘들어하고,

이라크 전쟁에서 “임무 완수mission completed!”를 선언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수렁’에 빠졌다는 말을 듣는 것은

중세 십자군 전쟁의 패턴이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한마디로, 하나님은 힘의 논리에 의한 세계정복을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면 말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세계 정복은 사랑의 정복, 자기희생의 정복, 십자가의 정복이었다.

다른 말로, 짐으로써 이김이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뿐만 아니라,

생전에 평소에도 ‘져라!’라고 가르치셨다.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까지 동행하라!’

‘겉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

‘한쪽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쪽 뺨까지 내어 주라!’


‘나중 된 자 먼저 되고, 먼저 된 자 나중 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모퉁이 돌)이 되리라!’

‘홀로 된 자(과부, 독신)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으리라!’ 사 54:1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자녀보다 많음이라’ 갈 4:27


처음에는 지는 듯 하게 보이는 사람이, 결국은 이길 것을 가르쳐 주신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골수 좌파로 보이는 듯한 구절들이다.

그게 아니라, 힘으로는 ‘이기지 말고 기꺼이 져 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는 것 같지만... (진짜 진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기게 되리라는... 약간 비상식적인(?) 가르침이다.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면,

바꾸어 ‘이기는 것은 지는 것이다’라는 명제도 성립된다.


힘으로, 경쟁에서 아득바득, 남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기려고

안간 힘을 쓸 때... 결국은 진다는 것이다.


(일부) 서구의 선교사들이 과거에 아프리카에서

그들이 도와주는 기술, 문화, 물질의 도움을 받으라고 거만하게 나갔을 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모라토리엄(쉽게 말해 추방!)을 선언하며

서구기독교를 몰아내고, 자치적 기독교로 나아갔다.


지금도 동남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저들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면서도

선교사들이 돈다발을 보여주며 굴복을 은근히 내비칠 때

기독교인(천주교)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마저도

‘선교사들은 10년 안에 현지인에게 이양하고 필리핀을 떠나라!’고 선언했다.

지금도 많은 나라들의 선교사 비자를 5~10년으로 제한하는 조건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이 선의로 도와주는 것은 기꺼이 받겠다.

그러나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지 말라!’(10년 후에는 떠나라)는 것이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이요, 그들의 저의다.


여기서 제3세계의 선교정책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요,

오늘 우리가 선의로 모든 선교 사업에 참여하면서

그들에게 복음과 열정과 땀과 물질과 모든 것을 다 나눠주지만


그 나눠주는 자세가 섬기는 종의 자세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못 먹어 가난하고, 학교도 못 다닌 무식한 사람이라도,

그런 선교적 도움을 거절한다는 것이다.

힘의 논리로 나갈 때 그렇게 된다.

 

이렇듯 초대교회, 중세교회 , 근대교회 등 시대마다

항상 교회는 힘의 논리로 나가고자하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았다.

 

차라리 힘이 없으면, 그런 유혹이 적지만

힘이 있을수록, 그런 유혹은 더 크게 다가온다.

그 방식이 쉽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다.

대적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들은 이겼다고 성대한 파티를 열었을 것이다.

땅에서는 빌라도와 헤롯이, 공중에서는 사탄의 무리들이

드디어 예수를 처형했다고, 자축하는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개입의 시작이었다.

더 이상 보고만 계시지 않으셨다.


오늘도 이런 일은 계속 반복해서 일어난다.

김선일 님이 그랬고,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복음 때문에 무참하게 투옥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마귀는 오늘도 이기면서... 지고 있다.

반면에 예수의 복음은 오늘도 지면서... 이기고 있다.


오늘도 힘의 논리로 과시하고 남을 눌러서 이기고 있는가?... 지는 것이다.

오늘도 섬김의 논리로 한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기는 것이다.

 

오늘도 당신의 원수에게, 주변인들에게 끊임없이 기꺼이 지시라!

그래서 결국 이기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린다! <김지윤


[주제별 분류] 기독교승리주의 http://blog.daum.net/bible3/9519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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