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딤전3:3 여러 설교에서 인용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3:3
나와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이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금물이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
혹자는 우리 교회의 금요철야 때 설교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낀다.
그는 금요철야에 기도하러 왔는데, 설교가 길다고 불만족이다.
혹자는 반대로 금요 철야에 설교 시간이 너무 짧다고 불만족이다.
그 사람은 설교 들으러 왔는데, 설교가 너무 짧아서 섭섭했다고 한다.
모두 옳은 얘기다. 서로 입장이 틀릴 따름이다.
내 생각이 옳고 네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사람마다 관심 분야가 다르다.
한 목회자가 어떤 교회에 새로 부임했는데,
그 교회는 ‘누가 선한 크리스천인가?’ 하는 신자의 본질 문제를 놓고
신도들이 서로 두 패로 갈라져 오래 동안 서로 싸우고 있었다.
한 (보수적) 그룹은, 전임 목회자가,
교단이 지지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르치기 보다는
사회정의문제를 성도들에게 너무 많이 가르쳤다고 화를 냈다.
그 외에도 이들은, 낙태와 이혼의 죄 등,
이런 보수적 이슈들을 담임 목사가 자주 설교해 주기를 원했다.
이에 반해 다른 (진보적) 그룹은,
역시 전임 목회자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는데,
자기들 생각으로는,
그 목회자가 사회정의문제에 대해 약하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대신에 기도, 큐티 등에 너무 많이 설교했다는 것이다.
한 목회자의 동일한 설교에 대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입장이 달랐다.
▲내 기준의 큐티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기독교 영성의 대가로 유명하다.
그는 동이 트는 이른 아침에, 산책을 하며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공동체를 찾아온 한국의 한 청년이
쉐퍼 박사에게 실망했다며 따졌다고 한다.
이유인즉, 왜 새벽에 큐티는 안 하고 그렇게 밖에 돌아다니느냐는 것이었다.
그 청년이 이해하는 큐티는,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책을 펴고, 본문 하나를 택하여 묵상하고,
노트를 펴서 자기가 깨달은 것을 하나씩 적어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쉐퍼 박사를 관찰해 보니,
아침에 자연 속을 거닐며 산책을 즐기는... 도무지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오늘 이런 우리들의 관점이 얼마나 많은지...
자기 기준에 안 맞으면, 쉐퍼 박사 같은 대가도 박살 내 버린다.
▲내 기준의 기도생활
우리 교회 철야기도를 참관하신 어떤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왔다.
내용인즉, ‘우리 교회 성도들이 기도훈련이 안 된 것 같다’고 표현했다.
제가 그 분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혹시 우리 교회 성도들이 기도훈련이 안 된 것이 아니라,
통성기도훈련이 안 된 것이 아닐까요?”
내 기준으로 사람들을 거기에 타인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은 큰 편견이다.
주로 통성기도 하는 사람이,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문화충격을 받겠지만
그러나 정작 그 기도의 깊이와 내면은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그래서 외국을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좋다.
자기 편협성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기준으로 남을 비판하지 말자
어떤 교수님이 식사 도중에 하시는 말씀이 너무 좋아서
제가 그냥 수첩에 즉시 받아 적어 보았다.
능력은 있지만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서 고쳐주겠다는 생각과
그 생각 때문에 자기 언어의 대부분을 투자하는 사람이다.
즉, 비판 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항상 자기가 옳다는 기준을 전제해서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은연중에 언어로 표현되어
결국 평소에 늘 비판을 잘 하는... 그런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
<인터넷 설교 중 발췌,
◑입장 차이가 서로 다른데,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에 무슨 거장 감독의 영화라고 추천을 받아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 정신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거기에는 대략 3부류가 나왔다.
처음에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꿈꾸는 IRA 민병대와 영국군이 서로 싸웠다.
총을 쏴서 서로를 죽여야 하지만, 서로의 입장이 나름대로 둘 다 정당했다.
나중에 휴전이 된 후에는, IRA 민병대끼리 서로 내전이 있었다.
휴전을 지지하는 온건파와, 굴욕적 조건이라며 휴전을 파기하려는 강경파,
그런데 두 파의 입장이 나름대로 모두 옳았다.
그러니까 영국군대, IRA온건파, IRA강경파의 세 입장이 모두 나름대로 옳았다.
세 부류의 입장이 모두 양보할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결국 서로 친형제 간에도, 입장차이 때문에, 서로 총을 쏴서 죽여야 했다.
(한국의 과거청산, 친일파 공격도 일방적 입장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저는 인터넷에 설교문과 칼럼들을 편집해서 올리면서,
‘나는 항상 옳은 방향으로 글을 올린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글을 읽은 상대방은, 자기 입장에 따라 나와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상대주의’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신학교에서는 단순하게 절대주의(진리, 성경)를 가르치고
상대주의(내 관점은 옳지만, 상대방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를 배격한다.
그래서 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못 말리는 고집불통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상대주의(상대방의 입장)를 무조건 인정하지 않는 문화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관의 차이에 따른 상대주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절대군주 체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아래서 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멀리 떨어져 있던 선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밤새도록 꼬박 서로 논쟁하며 언쟁을 벌일 때가 있다.
신학적 논쟁, 선교 전략적 논쟁, 이것이 발전해서 서로 감정적 대립을 할 때도 있다.
자연히 언성도 점점 높아진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모든 사람의 입장이 나름대로 다 옳다.
그 때 어떤 선교사가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 한 사람 (남을) 비판하지 않고 (말 하고 싶어도) 꾹 참고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로 입장 차이는 분명하므로 그것은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비판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지혜로운 처신이다. <편집자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
-곽경훈 님의 글
프로쿠르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꽤 유명한 악당이다.
낯선 나그네를 친절해 꾀여낸 다음 자신의 침대에 뉘여 놓고
길면 칼로 잘라 버리고,
짧으면 사지를 잡아당겨 처치하는 수법으로 악명을 떨쳤지만
결국 테세우스에 의해 자기도 똑같은 방법으로 처형당했다.
그리스 신화의 다른 얘기와 마찬가지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도
얘기 자체보다는 그 상징과 의미 덕분에
오랜 세월 흐른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즉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는 자신의 기준으로만 모든 걸 판단하고
그에 어긋나면 무엇이든 미워하고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부류를 빗대는 표현으로 여전히 사용된다.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는 어디나 존재한다. '설마'하던 곳도 예외 없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든 목격자 수만큼 진실이 존재한다.
하나의 사건에 목격자가 10명 있다면, 사실 하나와 10가지 진실이 존재한다.
현명하고 공정하다는 사람조차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가 부르는
달콤한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본능인지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처지부터 고려하고,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 처지를 고려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건 그 다음이다.
물론 그것만을 가리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라 비난하진 않는다.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가 되는 건 오직 그것만 옳다고 믿는 순간부터다.
물론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확신과 자부심엔
항상 다른 사람 생각과 판단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옳다'는 건전한 생각이지만, '나만 옳다'는 명백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다.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쉽게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에 빠져든다.
다신론이나 범신론과 달리 '절대자'와 '절대진리'가 존재하는 기독교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복음'의 절대성만 강조한 체 '다양성'을 무시하고
또 '순종'만 강조한 체 '자유'를 무시한다.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생각만 옳다며 주변 사람에게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를
들이대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미숙한 자', '어긋난 신앙을 지닌 자',
'기도와 가르침이 필요한 자', '공동체가 돌봐 줘야할 자'로 규정한다.
그들은 '신실한 자의 침대'에 빠져 스스로 하나님 행세 하는 셈이다.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건 언제나 피곤하다.
틈만 나면 그들은 자신의 '신실한 자의 침대'를 들이댄다.
그 침대에 키가 맞으면 다행이지만
길거나 짧은 사람은 때론 골치 아프고 성가시며
때론 섬뜩하고 고통스런 일을 겪게 된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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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볼테르의 관용 http://blog.daum.net/bible3/6715877 (목차 중 10번 글)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 http://blog.daum.net/bible3/10147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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