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눅13:24
▲좁은 문은 비극의 문이 아니다.
앙드레 지드가 지은「좁은 문」이란 소설이 있다.
어느 날, 여주인공 알리사는 설교를 듣고 좁은 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촌동생 제롬과의 사랑을 세속적인 사랑이라고 거부한다.
그렇지만 제롬이 잘 잊혀지지 않았다.
결국 일상적 사랑과 종교적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그녀는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죽는다.
그녀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합일을 꿈꾸며 이 땅에서의 사랑을 거부한다.
결국 사랑을 희생시키는 자기의 사랑방식에 대해 확신을 품지 못하고 죽는다.
(지드는 이 작품에서 비인간적인 자기희생의 허무함을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길은 너무 좁은 길이어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다.”고 독백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좁은 문의 삶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 소설 ‘좁은 문’은 작가의 삶과 생각이 투영된 소설이었다.
앙드레 지드는 특이한 결혼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친척 누나 마들렌을 사랑해서 결혼했어도
마들렌이 평생 순수하게 성녀처럼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둘은 한번도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금욕주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평생 고난 가운데 지내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물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쉽지 않다.
그 길에는 갈등도 있고, 고통을 감수해야 하고, 인내의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적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끝까지 고난의 길은 아니다.
그 길은 최후 승리의 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소설 ‘좁은 문’처럼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성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적절한 때에 반드시
시온의 대로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의미
▲1. 인기를 추구하지 말라.
요새 성공하려면 대중적이어야 한다.
인기가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더 인정을 받는다.
아무리 정직해도 인기가 없으면 인정받지 못한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인기가 없으면 대학에서도 퇴출된다.
교회도 인기가 있어야 몰려든다. 그러면 더 인기가 높아진다.
인기 없는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인기도 더 없어진다.
그런 세태라서 말 잘하고, 외향적이고, 자기 피알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죄인과 세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어울렸던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지 말고, 소수를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인기 있는 분들을 멸시하는 뜻은 아님. 받은 은사대로 하는 것임.
인기가 없어도 무방하다는 뜻임. 인기가 없어도 무능하지 않다는 뜻임.)
요즘은 성공을 다 숫자로 평가한다.
숫자와 외모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신이 되었다.
숫자가 많고 외적으로 부흥되면 다 축복인 줄 안다.
그런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이 되고, 세미나의 단골 강사가 된다. 그러나
인기(人氣)를 얻으면.. 신기(神氣)를 잃어버릴 가능성은 그만큼 커지고,
다수와 힘을 숭상하면.. 하나님과 진실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뜻)
우리는 인기와 숫자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광야 생활 때에 60만 명 이상의 남자가 다 “안 된다!”고 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된다!”고 했다. 그처럼 다수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선거를 하면 99%가 찬성을 하지만 천국을 만들지 못했다.
우리는 다수를 존중해야 하지만, 다수가 무조건 옳다고 좇아서는 안 된다.
△외로움을 감수하라
주님의 제자는 숫자가 적었다. 숫자가 적으면 외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외로운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한다.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은 지극히 외로우셨다.
그때 몇 명 안 되는 제자들마저 다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주님은 외로운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본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때때로 외로움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언젠가 고독한 순간에 처하게 된다.
이 세상의 어떤 강자도, 언젠가는 미치도록 외로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때
(외로움을 극복하는 훈련이 없으면) 그 때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모시고 외로운 순간도 감수하며 자기 사명을 고수하면
이 세상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해도
그의 삶과 영향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커지게 될 것이고,
반드시 좋은 열매를 얻는 날이 올 것이다.
▲2. 십자가(어려운 길)를 선택하라.
어느 날, 예수님은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고 하셨다. 요12:23
그 말씀을 듣고 혹한 제자들은, 서로 누가 높으냐는 싸움까지 벌였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그 영광을 얻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설명해주셨다.
제자들은 “어떻게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느냐?”며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사람은 ‘인기를 통해서’ 열매를 얻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기몰이로 많은 열매를 맺을 것 같지만, 큰 착각이다.
아마 그런 원리는 성경에는 안 나오는 것 같다.
열매는 ‘십자가를 통해서’ 얻는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다.
십자가는, 도저히 열매가 얻어질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결국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기와 열매는 항상 반비례한다.
제자들은 자기(인기)를 부인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져야 한다.
사람들은 억지로 인기를 추구하지 않아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저절로 인기가 급상승하는데 어쩌랴? 고 말한다.
그러나 5천명을 먹이신 후, 주님이 홀로 산으로 가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의 길에 방해되는 것은, 저절로 생기는 인기라도, 다 부인해야 한다.
▲3. 자신의 정욕을 버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심지어는 부모, 형제, 자녀도 미워하라(less love)고 명하셨다.
그러니까 재산을 권리포기하는 것은 기본이다.
제자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 제자들은 (천주교는 제도적으로 버리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 ‘기본 제자도’를 무시하면서도
주님을 따른다고 당당히 고백하고 있다.
부끄러운 고백이 더 어울릴터인데 말이다.
어떤 처녀가 약혼자보다 반지wealth를 더 사랑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오늘 처녀들이 남자의 돈을 보고 결혼하는 것을, 사람들은 비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요즘 세태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비싼 반지 낀 것이 자랑이고,
도리어 신령한 척도가 되고 있다. 비난은 고사하고 말이다.
내가 신령하고 뛰어나니까, 남달리 비싼 반지 낀다는 논리다.
그런 ‘번영 신학’의 안경을 벗고서, 정직하게 복음서(예수의 가르침)를 읽어보자.
▲제자의 길 : 어느 수녀님의 글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기 위한 조건의 하나로 자기 소유를 버릴 것을 강조하신다.
바로 예수님이 참된 보물이시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은 신자들에게 약혼자보다 반지를 더 좋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재물과 그분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려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한쪽으로 접어두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사시면서 자신의 목숨도 놓아버리셨다.
당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활동적으로 일하시면서도
그분은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림은 곧 모든 것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내어 놓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눌 수 있는 것이 내 안에도 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고 나누어준다면
그곳에서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낮출수록 그만큼 내적인 능력과 영향력이 나온다.
대중적 인기에서 나오는 능력과는... 질이 다르다.
▲마치는 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묵묵히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은사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 땅에 보낼 때, 다 나름대로의 재능을 주어 보내셨다.
그 은사를 극대화하면서, 비록 좁은길이라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소설처럼) 금욕주의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업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문의 삶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좁은 십자가의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결말은 항상 좋다.
반대로 넓은 인기의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결말은 항상 나쁘다.
<이한규 목사님 설교를 토대로 편집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 http://blog.daum.net/bible3/10147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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