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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푸는 교장

LNCK 2007. 1. 18. 15:54

◈똥 푸는 교장                    딛2:7               스크랩글

 

 

'그대는 모든 일에 선한 행실의 모범이 되십시오'  딛2:7

 

 

▲가나안 농군학교식 교육  

방글라데시 찔마리에 가나안 농군학교 분교를 설립했다.

현지 젊은이들을 3개월간 합숙하며 훈련을 시켰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구보로 일과를 시작하여 밤 10시에 취침을 했다.

 

▲교육 과정

처음 올 때는 머리도 텁수룩하고, 수염도 시커멓게 난 것이 꼭 도둑놈들 같다.

가난과 숙명론에 절어 무기력하게 살던 사람들이지만

한 달이 지나면 변화가 보인다.

 

평소에 일도 않고 살다가, 농군학교 훈련을 받으면 다들 몸살부터 앓는다.

그러나 학생들은, 한국도 예전에 가난했다는데

어떻게 지금 잘살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며, 정신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3개월 과정이 끝나면 푸짐한 상을 주었다.

1등한 학생에게는 송아지 한 마리,

2등에게는 염소 두 마리, 그리고 3등에게는 염소 한 마리를 주었다.

 

▲돌발 사태 발생

학생들은 농군학교에 들어와서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 사람들도 밥을 엄청 먹었다.) 

그 결과,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는데,

화장실이 가득 차서 퍼내야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평신도 선교사들은 그 처리를 놓고 회의를 했다.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똥 푸는 천민을 불러와서

돈을 주고 시킬 것인가?

 

그러나 결국 농군학교 내에서 스스로 똥을 푸기로 했다.

'인간은 평등하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평소에 가르쳤는데,

실제 본을 보여 줘야 했다.

우리는 바가지와 통을 만들고, 똥으로 퇴비를 만들기 위해 짚도 준비했다.

 

▲똥 푸는 행사

다음 날 아침 똥 푸는 날, 현지인 교육생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근처에서 일하던 인부들도 다 달아나 버렸다.

 

결국 한국 선교사들만 남았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똥을 펐다.

몇 달 지나서 똥이 차면 다시 푸고, 아마 서너 번을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언제부턴가 도망갔던 회교인 선생님들 가운데 똥 푸는 행사에

한 명씩 동참을 했고,

그 후에는 농군학교 전 직원의 행사가 되었다.

 

한국인, 방글라데시인,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모두가 엄숙하게 그 행사들을 치렀다.

 

▲소문이 돌다

찔마리 군 지역에서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 교장 선생은 똥을 푼다더라.

그래서 한국은 발전하게 되었다더라!’

 

 

◑교회가 회교인에게 배워야할 것 

 

 

▲마을의 구심점 모스크

방글라데시에서는 가는 곳마다 회교 사원인 모스크를 보게 된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거기에 자주 간다.

나마즈(모슬렘식 기도회)하러 가고,

낮에 더울 때는 모스크 그늘에서 낮잠을 자기도 한다.

 

지나가던 나그네도 모스크 베란다에서 묵어 갈 수 있다.

마을에 회의 할 것이 있으면 으레 모스크에 모인다.

 

▲자기들 손으로 짓는다.

이 모스크는 대부분 자기들 손으로 짓는다. 길거리에 책상 하나 놓고

하루 종일 마이크로 헌금 부탁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모스크가 없는 지역이 있었다.

열심 있는 몇 사람이 길가 잔디밭에서 나마즈(기도회)를 했다.

얼마 지나자 그곳에 대나무 울타리가 쳐졌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대나무 기둥에 짚으로 천장을 가린 그늘이 생겼다.

짚으로 된 벽이 생겼고, 일년 정도 뒤에는 몇 장의 함석이 지붕에 올려 졌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초가집 벽 바깥으로 벽돌이 몇 장 쌓였다.

그리고 조금씩 높아졌다.

그리고는 완성된 벽돌 건물 모스크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시골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대조적인 개신교회

현지 교회는 전혀 헌금을 걷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개신교 성도들은, 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이 지어 주는 것으로 응당 생각한다.

 

▲회교도인에게서 배울 점

외국인이 지어준 건물(병원, 학교 등)은,

유리가 깨져도 갈아 끼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다.

분명 자기들을 위해 지었고 자기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남의 것 보듯 한다.

 

방글라데시 교회는 회교인들에게서 이것은 배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자기가 받은 것을 정성스레 드려서 하나님의 교회를 짓는 것 말이다.

 

 

◑감옥에 가더라도 뇌물은 주지 않는다.

 

▲선교사가 오토바이 사고 유발

동료 선교사가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

어느 할아버지와 부딪쳤는데 병원으로 옮기는 동안에 돌아가셨다.

 

초보 운전이라 천천히 몰았는데,

시장거리에서 할아버지가 갑자기 들어왔다고 한다.

 

유족들은, 할아버지가 너무 연세가 많았고 평소에 질병을 앓던 상태라서

이 사고에 대해 전혀 과실을 묻는다거나 요구할 것이 없다고 했다.

장례식을 지원하겠다, 무덤을 잘 만들어주겠다는 제의도 다 거절당했다.

 

▲돈을 요구하는 경찰과 대응책

정작 문제는 경찰에서 제기되었는데, 돈을 요구하고 나왔다.

그들이 요구한 60만원 정도의 돈은 선교부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안에서 두 가지 의견이 엇갈렸다;

남들 다 그렇게 하는데 쉽게 해결하자는 의견이 있었고,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양심의 소리가 일었다;

우리가 청년들에게 거짓말하지 말 것과 뇌물 주지 말 것을 가르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감옥에 가더라도

설령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뇌물을 줘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다. 처음 하는 새벽기도회였다.

 

그 선교사는 타지에 가지도 못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피의자와 함께 법정에 서야했다.

 

1년이 지나고 사건은 무죄로 마무리되었다.

그 동안 본인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며,

옆에 있던 동료들은 얼마나 기도를 했겠는가?

 

▲그 사람들은 우리가 안다

얼마 후에 우리 선교부 직원(현지인)이 공금을 횡령한 사건이 생겨서

조용히 내보내려 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자기가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으므로

부당 해고당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는 적반하장격으로 법원에 우리를 고소하려 했다.

그러나 현지인 변호사들마다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마라, 그 사람(선교사)들은 우리가 안다”하며

아무도 그 고소 사건을 맡지 않았다.

 

사람들은, 같은 동족 회교도의 말보다,

우리에게 더 마음을 열고 무엇인가 듣고자 했다. <권병희 선교사 칼럼 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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