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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LNCK 2007. 4. 24. 11:16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창22:7~8



▲희생은 '생명의 원리'

모든 형태의 종교적 제의 중심엔 '희생' 또는 '희생제물'이 있습니다.

'희생제물(sacrifice)'이란 다른 생명들을 살려내기 위해

(자기를 죽여서) 드리는 제물을 일컫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대들은 하나님께 몸으로 드리는 산 제물이 되시오'라는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은 다른 생명체를 죽여서 바치는 제물대신에

자신의 몸을 그대로 산(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른 예배요,

참 예배라는 것입니다.

 

'희생' 또는 '희생제물'이란 고대종교의 야만적 유산이 아니라

엄존하는 '생명의 원리'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희생제의가 말하려는 본래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이란 생명으로서만 속죄된다는 것,

생명은 생명의 희생 위에서만 자라난다는 것,

파괴된 생명질서의 회복을 위해서는 대속적 희생제물이

생명의 제단에 바쳐져야 복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 보존의 원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곡식과 가금류가 희생으로 죽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동물이 죽어 희생해서 먹이사슬로 큰 동물의 먹이가 됨으로써

오늘도 동물의 왕국에 생명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다른 생명을 살리려면, 누군가 반드시 죽은 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면서 동시에 이삭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 독자 이삭사이에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며 길 위에서 주고 받는 대화는

바로 희생 또는 희생제물의 근본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제물로 바쳐질 이삭은

자기 자신이 번제로 바쳐질 제물 그 당사자인줄도 모르고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는데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픕니다.

제물이 자기자신의 생명의 분신인 아들 이삭이기에

제물이 누구인가를 아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렇게 아팠던 것입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은 우리 생명의 두 가지 의식이라고 봐도 좋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분리되어 있는 대국구조라고 봐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면서 동시에 이삭인 것입니다.

사람은 이삭처럼 번제물로서 자기가 작정된 것임을 모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처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피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

다른 한편으로 보면, 언제나 희생제물의 선택과 제물로 바쳐지는 운명적 과정은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인 매우 역설적 양면성을 지닌 것입니다.

 

100세에 얻는 독자 아들을 다시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말이 안되고, 종교적 성실성으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은 바치지 않을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주저함 없이 결행을 합니다.

 

아무도 아브라함의 모리아산행을 강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당당히 한 부족의 족장입니다.

아브라함은 부당한 하나님의 이삭 제물 바치기를 거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으로 자기분신인 아들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묘한 생명의 내적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희생 또는 희생제물 되기란 항상 피동적 측면과 능동적 측면이라는

양측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것을 명료하게 드러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희생제의 원형적 범례인데,

예수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 그리고 로마제국의 권력의 야합에 의해

처형당한 '십자가에 못 박히심(Cruxcification)'이기 때문에 피동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이 잔이 자기에게서 가능하다면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복음서는 동시에 스스로 그 쓴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고

의연히 골고다로 나아가서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서

단 한번에 희생제의 본질을 완성하신 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희생은 심판임과 동시에 속량(관계회복)

예수님은 말하기를 아무도 내 생명을 빼앗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만 내 스스로 내 생명을 너희를 위하여 내어준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깨뜨림으로 드리는 희생의 제사가

낡아져 버린 모든 생명 관계를 다시 갱신하는 능력과 계기가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희생제란 본시 깨어져 버린 계약, 혼돈으로 뒤죽박죽된 생명질서,

낡아져 버린 병든 생명을 다시 바르고 건강하고 충만하게 다시 세우는 일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정결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고 거룩해야 할 '생명자체'가

'오물과 혼돈적 무질서'로 침범 당했을 때

그 생명실재를 정화시키고 질서에로 바로잡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과정이 '희생' 또는 '희생제물'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하나 든다면, 홍수라는 절대혼돈 상태에서 나온 직후,

노아의 가족은 정결한 짐승 암수 한쌍 씩을 취하여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그리고 나자 생명의 계약이라는 무지개의 새 계약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할 때 희생제물은 선, 진리, 정의를 짓밟는 개인이나 집단공동체에게

가해지는 심판임과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는 속량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희생'의 관점에서 본 한국 민족사의 고난

한편에서 보면 한민족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한국동란에 죽임 당한 300만 생명들,

분단시대의 800만 이산가족의 슬픔,

IMF시대에 시달리고 고통 당하고 실직 당해야 하는 국민들은

어떤 의미에서 '생명의 근본원리' 안에서 희생제물이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한민족의 고난의 역사란

결국 우리 민족이 생명의 왕국에서 준수해야 할 생명세계의 기본법

곧 '진실과 공의'를 배반하고, 침범하고, 유린한 대가요,

심판이었음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동시에 한민족의 과거와 오늘의 고난 역사는

그 생명왕국의 기본법인 '진실과 공의'를 배반 유린한 결과로 초래된

생명공동체의 혼돈 상태를 회복하기 위하여 치러지는

통과제의적 정화과정 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역사, 사람(민중)이 함께 혼합되어 어우러지는 역사

그 엄숙한 생명원리를 깨닫고 우리 민족이 오늘의 고난을 당하면

그 모든 역사적 역경과정은 전화위복이 되지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당하면 한민족의 시련은 더욱 더 미래에도 가중될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동산과 역사왕국의 엄숙성입니다.

절대자는 종교적으로 말할 때는 거룩한 하나님 이시지만,

비종교적 표현으로 일반적으로 알아듣게 말한다면

결국 '생명자체', '역사자체'입니다.

 

'희생제물'을 요청하는 궁극적 실재를 위에서 보면 하나님이고,

과정에서 보면 역사 그 자체이고,

아래 바닥에서 보면 삶의 실질적 담지자 민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실재, 역사 실재, 민중실재가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셋은 한 생명실제를 구성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셋 사이는 구별해야 하지만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분리하는 순간 셋은 살아있는 생명실재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원리들로 변해버리게 되니까요.

▲예수님의 희생제사, 우리는 산 제사

본래 '희생'은 상실해버린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을 되찾고, 깨어져버린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자연이 바른 관계회복을 성취하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 이삭처럼 "번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는 형국입니다.

성경 본문이 말하는 대로 번제물은 다른 어디에도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곧 번제물이고, 희생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고 또 진실인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삼으시고

당신 자신이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 한번 영원한 구원의 제사를 완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생명을 증언하고, 선포하고,

확장하고,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도록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되도록 몸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봉사, 정의의 실현, 진실의 육화를 통한 산 제사인 것입니다.

 

<인터넷 설교 발췌, 편집   2000년도 혹은 그 이전.

 

 

▲화목제물의 실례

성 피터 채널 St. Peter Chanel  (1803 - 1841)은

프랑스 성직자로서 복음을 전하러 피지로 보내졌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그저 잘 되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곳 추장의 아들이 세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피지 섬의 추장은, 용사들을 보내서 피터 사제를 죽이도록 했다.

그래서 사제는 몽둥이로 무수히 맞아 죽었고,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쪼개졌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1년이 못되어,

모든 섬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최근 (07.04.16.)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났는데,

미국이 이것을 조용히 용서했습니다. 

여기에 희생된 많은 분들... 진심으로 추모드리며 

앞으로 한미관계 개선과 세계평화와 인종갈등을 위해

값진 화목제물이 되신 줄 믿습니다.


 

[주제별 분류]  십자가 http://blog.daum.net/bible3/1157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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