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7

내 속에 샘물이 있다

LNCK 2007. 5. 5. 10:36

 

◈샘물에 관한 묵상

 

오늘은 ‘샘물’에 관해 간략한 묵상 글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우물(샘물)이 될 것이요  요4:14, 쉬운성경

 

 

정상적인 성도라면, 자기 안에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perpetual spring

갖고 있다는 말씀이다.

‘아니, 내 속에 샘물이 있다니... 그것도 영원토록 솟아나는..!’

오늘 아침 나는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래서 깜짝 놀란 우물가의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 물을 내게도 주어 다시는 목마르지 말게 하시고,

여기에 물 길러도 오지 말게 하소서  요4:15 

 

 

오늘 나는, 내 속에 샘물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가?

그것도 영원토록 계속 퐁퐁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을!

 

그 샘물이 영원토록 솟아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샘의 근원이 예수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도 성소 안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문지방 밖으로 넘치는 환상을 보았고,

예수님도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다.)

*관련글 : http://blog.daum.net/rfcdrfcd/10996184

 

오늘 나는 내 속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물을 어디로 흘려보낼 것인가?

이 물은 흐르고 흘러서 바다까지 흐를 것이다.

결국은 ‘물이 바다 넘침같이’ 될 것이다.  이사야11:9

 

 

▲아까워하지 맙시다.

어떤 분의 글에, 자기 고향 샘물을 자랑한 것을 읽어보았다.

자기 고향 동네 어귀에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고 한다.

여름 철,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도 그 샘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다.

 

동네 어른들은 논, 밭일을 하다가도, 그 샘에 와서 목을 축였다.

아이들은 하교 길에, 의례히 그 샘에 들러 물 한 사발 마시고 가곤 했다.

동네 아낙들은, 그 샘물을 길어서 밥을 지었다.  

그 샘을 애지중지 하지 않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샘물이 그렇게 맑고 시원하며 마르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자,

이웃 동네 사람들도 와서 그 샘물을 받아갔다.

 

그러자 그 동네 사람들은 은근히 시샘이 났다.

야박하게 이웃 동네 사람들을 말릴 수도 없고,

그래서 아이들은 다섯 모금 마실 물을, 열 모금 마셨다. 아까워서였다.

아낙들은 샘물을 길어서 마당청소, 부엌청소, 빨래까지 했다.

샘물을 허튼 데 쓴 것은, 그 물을 이웃 마을에 주기가 아까워서라고 했다.

그러나 그 샘물은 여전히 퐁퐁 샘솟고 있다고 한다...

 

혹시 우리는, 예수님의 샘물을,

이웃 마을 사람들이 마실까봐 아까워하지는 않는가?

꼭 우리 마을 사람들만 전매특허 내고 마셔야 하겠는가?

 

(좋은 설교나 자료는 모두 공개해야 되겠습니다.)

 

 

▲샘물은 깊이 파야 나온다.

수도가 없는 지역에서 우물(샘물)을 파는 공사를 지켜 본 적이 있다.

단 하루 만에 물이 콸콸 쏟아졌으면 좋겠지만,

하루 종일 쿵광거리며 쇠파이프를 박아 넣는 공사는

지루하게 일주일이나 계속되었다.

 

공사를 하는 분들께 물어보니, 그 지역에서는

보통 1백 미터는 넘어야 하고, 어떤 곳은 지하 2백 미터까지 팔 때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 깊은 곳에서 흐르는 지하수일수록

물은 깨끗하고 맑고 시원할 것이다.

 

어쩌면 성경을 읽어도 생수를 마시지 못한다고 하는데,

너무 얕게 파는 것은 아닌지...?

 

깊이 파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생수가 터지면 많은 사람들이 해갈할 것이니

몇 일 걸리더라도 계속 깊이 포기하지 말고 파야 할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말씀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이렇게 표현했다;

 

성경은 많이 길어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르게 하는 이상한 샘물이다.

 

영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다.

사모하면 할수록

말씀에 갈급함을 가지고 더 읽으면 읽을수록

더 귀한 것을 마시게 된다.

 

반대로

안 읽으면 안 읽을수록

갈증도 더 안 생긴다.

 

 

▲인간은 서로 동생공사(同生共死)한다.

끝도 없는 광활한 사막 한 가운데 작은 오아시스가 있었다.

그 오아시스 곁에는 고독한 노인 한 분이 오두막을 짓고서

맑은 오아시스 샘물과 시원한 야자수 그늘 아래서 살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생수를 한 그릇 퍼서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것이 그 노인의 생활이요, 인생의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물을 퍼 주다 보니까

손님 중에 어떤 분들은 고맙다고 돈을 한 푼씩 사례금으로 주었다.

그렇게 돈을 조금씩 받다보니까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방문객들에게 돈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못 받으면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돈이 착착 쌓이니까, 이게 재미가 솔솔 더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오아시스 물이 자꾸 줄어들었다.

그는 그 원인을 깊이 생각했다.

‘아하, 이 큰 야자수 나무들이 물을 전부 빨아먹어서... 물이 줄어드는 구나!’

그래서 노인은 그 야자수 나무들을 모조리 도끼로 찍어버렸다. 

 

그랬더니 물은 아주 말라버렸다.

노인은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 목말라 죽었다.

 

이 조그만 사건은, 우리 인간의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야자수 나무가 샘물을 빨아먹는 것 같지만, 동시에 샘물을 공급해주고 있었다.

 

세상사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들은 나의 진액을 다 빨아먹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가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쓴물도 있다.

마라의 샘물은 단물(시원한 생수)이 아니라, 쓴물이었다.  

쓴 물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단물로 변화되어야 한다. <편집자

 

 

 

[주제별 분류] 말씀 http://blog.daum.net/bible3/11468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