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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675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LNCK 2007. 5. 7. 09:43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요6:27


아래는, 같은 주제에 관해 많은 분들의 깨달음을 한 곳에 통합해 보았습니다.<편집자



▲썩어 없어지는 음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히 있어서 영생을 주는 음식을 위해 일하여라   요6:27


이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 자신이

‘썩어 없어지는 음식’을 위해 일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당연히 ‘영생을 주는 음식’을 위해 일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썩어 없어지는 음식’에 대해

우선순위를 둘 수 있기 때문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나는 자신에게 솔직히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무슨 양식을 위해 일하는가?’ - 영생하는, 아니면 썩어 없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라가지 말아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포스트모더니즘’(후 현대주의) 사회라고 한다.

그 특징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된다.


즉 현세적 가치를 숭상하고,

물질적 가치를 숭배하고(소득, 재산, 자동차 크기, 외모, 성형, 살빼기)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을 대단하게 친다.(경력, 신분, 업적)

반면에 도덕적, 신앙적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이에 대해

오늘날의 기독교마저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라가고 있으며,

‘성공’을 합리화/정당화하는 신학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풍요의 신 - 바알 우상 숭배’라고 언성을 높인다.


현재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목사와 전도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결정하는,

그에 걸맞은 것들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교회 사역의 성공이 많은 출석 교인, 큰 건물,

그리고 거액의 예산을 의미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역자들이 자신들과 회중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성취하도록 몰아가고 있는 이유입니다. <윌커슨 목사님의 설교에서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사실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약 20년간 한국에서 유행했던 ‘성공, 풍요의 신학’은

따지고 보면 성경에서 금지하는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었다.

(‘육신의 정욕’은 과거부터 죄로 규정해 왔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에 보이는 것,

즉, 물질적인 탐욕을 말하며,


‘이생의 자랑’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출세, 권세, 명예 등을 말한다.


과거 20년 동안 우리는 이것을 ‘정욕의 죄’라고 규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것들을 ‘추구해야 할 축복’으로 목표하고 살아왔다.


예수님은 썩어 없어지는 음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히 있어서 영생을 주는 음식을 위해 일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썩어 없어지는 것들에 애타게 매달려 왔다.


그래서 경제규모는 세계 11위 권 안에 들어갔는데,

자살률은 OECD국가 중에서 1위를 달리고 있고,

저출산률도 거의 1위이며 (돈이 걱정되어서 아이를 안 낳음)

상대적 빈곤감은 과거에 못 살 때보다 더 커졌으며

삶의 만족도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여러 가지 방면에서 설명할 수 있고, (제가 다 설명할 수도 없지만)

앞으로 이런 면에서 더욱 계발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 간략하게 설명하면,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

주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셨는데,

어린아이에게는 ‘부모만 있으면’ 만족, 행복, 천국을 누린다.


부모 손 붙잡고 소풍을 가면 행복하고,

부모 품 안에서 잠들면 평화롭다.

자기 집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따지지 않는다.


아이가 행복을 누리는 것은 - 부모의 사랑 때문이다.

아이가 안정감을 누리는 것은 - 부모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 때문이다.


신앙에서는 이것을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감’으로 설명한다.

장래의 걱정, 이런 것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를 매일 평안함 가운데 살아간다.

(앞으로 이런 ‘기독교의 본질’ 문제를 계속 연구해 가려고 합니다.) 



▲신앙은, 업적주의 또는 성과주의가 아니다

위 본문 요6:27절에 이어 29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일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는 것이다. 요6:29


하나님의 일이란, 무슨 큰 업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믿는 것’이라 했는데,

요한일서에는 아버지를 ‘아는 것’(알아가는 것, 동행)이라 설명한다. 요일2:14등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보면,

포도송이는 ‘나무’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에 달린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포도열매를 맺는데 ‘가지’(우리)가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다만 ‘나무’(하나님)에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업적과 성과도 중요하겠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는 것이요, 요6:29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요, 요15:4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요일2:14

다시 말해서 거창한 큰 업적을 쌓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큰 일을 하고, 큰 건물을 건축하고, 큰 예산을 모으는 일에 ‘우선’한다면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눈에 보이는 성과와 업적을 중요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은연중에 받는다는 설명이 된다.



▲돌들로 떡을 만들라! - 라는 유혹 앞에 서 있는 오늘날의 교회

(아래는 김운용 교수님의 글에서 부분 발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시험 받으실 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자의 목소리는 달콤했고,

어쩌면 그것은 예수님께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경제적이며, 효율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돈도 들지 않는 일이며,

대중의 인기와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아주 괜찮은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굉장하고, 현실적이며,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는 대단한 일에 대해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면서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돌로 떡을 만들라!” - 예수님은 왜 이것을 거절하신 것일까?

유혹자는 지금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굶주림’에,

‘하나님의 즐거움’ 보다는 ‘나의 즐거움’에,

‘하나님의 만족’보다는 ‘나의 만족’을 추구하는 형태의 삶을 살라고 유혹할 때,

예수님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신 것이다.


오늘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생명의 떡, 하나님이 주시는 떡’을 갈망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는가?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구하는가?

아니면 ‘돌로부터의 떡’을 추구하는가?


현대교회는 끊임없이 이러한 유혹자의 외침 앞에 서있다.

‘돌로 떡을 만들라!’ (어떻게 해서든지 잘 살아보자!)


예수님 앞에 서있던 유혹자는 오늘도 예배자들을 유혹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떡 대신에 이 땅의 돌들 ― 명예와 과시, 자기만족과 자랑,

외형주의와 성공주의, 소비주의와 상업주의 등―로부터 오는 떡을 추구할 것

권하고 있다.


이미 교회에 파고든 이러한 흐름들은 ‘신종 우상 숭배’로 작용하고 있고,

많은 경우에 교회의 사역과 예배는 ‘소비주의와 상업주의’의 논리에 빠져있다.


소비주의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만족을 이상화하고

지속적으로 조장할 뿐만 아니라 신격화한다.


캐나다의 예배학자인 마르바 돈은,

이러한 흐름은 고전적 기독교 신학을 삼켜 버렸으며,

교회가 전통적으로 행해왔던 모든 '전통적 관행'(practice)까지 삼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오늘처럼 이러지 않았다는 뜻) 

 

 

[주제별 분류] 물질과 성공 http://blog.daum.net/bible3/1136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