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과 ‘삶’에서 나오는 설교
'바울과 바나바는 안티오키아에서처럼 이고니온에서도 유다인의 회당에 들어가
설교했다. 이 설교를 듣고 수많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신도가 되었다' 행14:1
저(편집자)는, 여기에 설교문을 선택해서 올리는 일을 계속 하다 보니,
나름대로 두 가지 선택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 신학적 지식을 주거나, 전개 내용이 ‘새로운 것’ (이것은 책상에서 나옵니다.)
2. 내용은 새롭지 않더라도, ‘확신과 열정’이 넘치는 설교. (평소 삶에서 나옵니다.)
▲설교자가 확신과 열정이 넘치는 이유
설교는 바로 설교자 자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는 설교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에 담겨진 것이 말로 분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무엇보다도 설교자에 관한 것이다.
설교 자체보다도 설교자가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설교는 바로 지금의 그 설교자인 셈이다.
그리고 그의 오늘의 삶이, 다음 주일의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설교자의 삶에서 나오는 확신과 열정이 넘치는 설교는
성도들이 귀로 듣고 깨달아 그저 즐거워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은혜를 받으면, 설교를 듣는 즐거움을 넘어서, 자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블로그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하나의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다.
복음은 메시지만이 아니다.
물론 거기에는 그리스도교적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복음은 메시지이기 전에 하나의 인격,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이다.
여러분은 ‘복음’이 ‘기쁜 소식’을 뜻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기쁜 소식’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기 이전에
'그분 자체'이다.
그것은 강생의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이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시어
스스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신앙인으로 사는 기쁨 4>중에서
그렇다.
사실 예수님이 공생애를 통해서 많은 말씀을 가르치셨지만,
복음이란,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말씀'(설교) 이전에,
예수님이 친히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신 ‘삶’을 뜻한다.
‘나는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온 것입니다!’ 요12:27
*복음은 설교(말)를 통해서 전달되지만,
그 기초는 '말'이 아니라, '삶'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을 택하라
베트남의 쿠엔 반 투안 대주교님은
공산 치하에서 13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온갖 고초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을 택하라”는 음성을 듣고
그 긴 영어(수감생활)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갇혀 있던 푸칸의 감방은 창문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지독히 더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의식불명이 되고 말았다.
.......
어두움 속에서 나는 벽 밑에 뚫린 구멍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는 코를 그 구멍에 대고 숨을 쉬면서 맨땅 위에서
1백일을 보냈다.
........
‘하나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을 택한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곳에 있기를 원하셨다.
체포된 사람들의 절망과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는 표정을 보면서
내가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 순간
“하나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을 택하여라.”라는 음성이 다시 들렸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며>중에서
절망의 감옥에서 주교님은,
당신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역경 중에서, 거기서는 아무 일도 못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일’(사역)보다
‘하나님(과 교제 관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삶에서 나오는 설교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품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라는 주제의 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있는 고아원에서 3주일간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봉사 첫날, 내가 고아원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달려오더니
자기 한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배고프다는 시늉을 했다.(먹을 것을 달라...)
나는 무작정 돈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뒤 서투른 탄자니아어로 내 소개를 마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때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황급히 뛰어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돈 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의 양손을 꼭 부여잡고 눈을 마주쳤다.
뜻밖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아이는 얼른 손을 빼고 저만치 달아나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다음 날 아이는 또다시 다가와서 "돈 주세요"라고 말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냥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도 내게 달려온 아이는 돈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고
그냥 내 품에 안겼다.
그러자 주위 아이들도 서로 내 몸을 먼저 감싸 안으려고 했다.
그런 경쟁이 재미있었는지 아이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며칠 뒤 새로운 아이가 고아원으로 왔다.
그 소년은 나를 보자마자 "돈 주세요"라고 말했다.
또다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 있는데, 한 소년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너 그러면 안 돼! 이분은 선생님이야. 그런 말 하지 마!"
그렇게 다그치고 새 친구를 꼭 안아 주는 게 아닌가!
가슴이 울컥했다.
그 녀석은 내가 고아원에 도착한 첫날
제일 먼저 달려와 돈 달라고 떼를 썼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을 먼저 안아 주고 있다니...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품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아무 말 없이 아이들을 꼭 안아 주자.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사랑을 느끼고,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안나, '행복한 동행' 중에서
어떤 분은 확신과 열정에 가득찬 음성으로 전할 때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 분의 삶을 가까이서 볼 수는 없지만,
평소에 '자기부인'과 실천적인 경건생활을 하고 계심을 짐작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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