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받은 자의 증거 사6:1~8
이사야가 하나님이 현현(顯現)하신 모습 앞에서 엎드려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는 온전한 실체는 아니지만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분명히 만나 뵈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심지어 비록 화저를 통해서였지만
신체적 접촉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접 뵌 그는 결국 선지자로 헌신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소명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어떤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1. 소명 받은 증거 - ‘거룩함’에 민감하게 된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6:3, 5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이사야가 소명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여 의지적으로 결단한 계획은
비록 의롭고 신령한 것이라도... 비전(Vision) 내지 소명(calling)이 아닙니다.
그럼 자신이 세운 계획과
하나님이 주신 소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은 신비적 초자연적 체험이 하나님과 대면했다는 사실을
‘결코 입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사야가 성경에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들은 것만 기록했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혼자 공상에 빠지거나 신경계에 이상이 생기면
초감각적 현상을 지각할 수 있고
심지어 사단도 인간에게 그런 현상을 겪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만난 사람은 가장 먼저 그분의 거룩함을 너무나 온전하게 맛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분의 거룩과 대비해 이 땅이 얼마나 더러운지 절감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추하고 참혹한 형편을 발견하지 못하고
‘야심 찬 자기 계획만 앞세우면...’
하나님과 대면(소명 받음)이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도,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이는 거룩한 곳이니라며
하나님의 거룩성과 이에 대비되는 인간의 누추함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대면한 자는
반드시 자신부터 얼마나 죄에 찌들어 있는지 깨닫게 마련입니다.
도덕적인 죄 말고도,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적 정욕대로 인생을 꾸려 나가려 했던 죄를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흔히 ‘회개는 은혜로 한다’고 합니다.
소명 받은 사람은, ‘자기 의지적 회개’가 아니라,
‘은혜로 하는 회개’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의 계속되는 삶에서도,
끊임없는 그런 회개의 과정이 계속되면서, 점점 영적으로 성숙해 나갑니다.
▲2.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다는 사실이 확고하며,
주님과 개인적인 교제, 동행, 임재를 수시로 체험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6:6~8
소명이란 하나님이 특정인을 불러서 당신의 일을 맡기려는 절차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사야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셔야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분이 직접 그 죄를 사하여 주어야 합니다.
부름을 받게 된 자도 하나님의 거룩 앞에
자신의 죄성을 철저히 깨달아 회개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또한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기 위해
그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을 때는 단순히 자신이 주님께 택함을 받아
종으로 세움을 받고 있음을 자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자신의 모든 것을 다시 새롭고 충만하게 변화시켜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영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이전까지 말씀 보고 기도 하면서 마음에 깨우침을 얻은 것과는
전혀 다른 체험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 곁에 계셔서
온전한 육성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교제하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말하자면 부름 받은 자의 몸이 속해 있는 곳은
여전히 부정한 이 땅이지만
자신과 자신의 주위가 완전히 거룩한 빛으로 감싸여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꼭 밝은 조명이 비취지는 않아도
최소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즉 거룩한 영역으로 변했고
그 안에서 주님이 나를 일대일로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알게 됩니다.
물론 당시로선 앞으로 맡기실 일의 구체적 내용까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이 나를 쓰실 것이라는 확신은 듭니다.
그래서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함과 또 두렵고도 떨리는 경외함으로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던져 헌신하게 됩니다.
모세처럼 몇 번이나 주저하고 사양한 것은 예외에 해당합니다.
모세로선 자기를 하나님이 80년이나 외면했다고 여겼고
또 자기 신분이 애굽으로 돌아 갈 수 없음을 따진 것입니다.
사무엘의 경우는 너무 어려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주님의 음성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물론 몇 번의 주저와 갈등하는 예비 단계는 있을 수 있지만
선지자로 확실하게 세움을 받을 때는, 본인이 정확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때는 완전한 성령의 교통 안에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와 인간의 자발적 순종이 동시에 이뤄집니다.
이사야도 화저가 자신의 부정한 입술에 닿자
여호와가 자신의 죄를 직접 사해주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도덕적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한 성자로 변모시켰다는 뜻은 아닙니다.
입술을 깨끗케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의심, 불만, 부인하는 죄를 없애준 것입니다.
두 번 다시는 그분의 은혜와 권능에 대해 불신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함에 일말의 주저함 없이 자기 남은 일생을 완전히 바칠 것이라는
확고한 결단을 갖게 해 준 것입니다.
▲3.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대리하고 위임받았다는 권위를 가진다.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사6:8b~9a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세우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아직 그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
대신 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하여 병이 낫고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 받은 은혜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자기 입술을 불태우는 환상을 통해 체험했듯이,
죄 사함을 먼저 받은 자가 죄 사함의 은혜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대신한다는 담대함이 생기게 됩니다.
이 말은,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므로 스스로 권세를 높이거나,
자기 임의로 하나님의 종임을 강조해
말씀이나 행동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맡은 일이 얼마나 막중한지 철저하게 깨달았기에
주님 앞에 항상 정말로 겸비하게 서게 되고
또 그런 자에게는 주님이 성령 안에서
말씀과 행동의 권위를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의 일에 대한 온전한 확신과 열정과 소망으로 충만케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연약한 기질도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게 하고
오히려 그 일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과 권세의 모습으로 바꾸어줍니다.
베드로 같이 학문이 없고 성격이 급해 실수만 했던 자가
오순절 날 담대하게 설교하여 삼천 명을 회개시키듯이 말입니다.
이사야도 처음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는 자기는 죽게 되었다고 낙심에 빠졌으나
마지막에는 주님의 부르심에 담대하게 응했듯이 말입니다.
▲마치는 말
주님이 주시는 비전 내지 소명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발견함과 동시에
인간의 참혹한 형편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
특별히 인간 세상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절대 소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는 반드시 세상 사람과 자신이
얼마나 망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을 바로 발견한 신자라면
그 실현하는 구체적 모습은 각기 다를지라도
반드시 세상에 보냄 받은 자라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비전이란 자기가 하는 일과 인생의 목표를 크게 잡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의 일과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일과 목표로 바뀌는 것이 소명입니다.
단순히 자기 야심으로, 상상의 범위를 넓히거나
행동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로 불쌍한 영혼들에게 관심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소명이자 비전입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윌리암 캐리는
성경과 손으로 그린 세계 지도를 항상 갖고 다녔습니다.
성경 속의 예수님에게 온전히 몰두하였고
그분이 남기신 마지막 지상 명령을 생각하며
지도 속의 끝없는 수평선 너머로 갈 것을 항상 꿈꿨습니다.
결국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세계 선교로 나섰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을 대리하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선포할 자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지금도, 바로 당신을 향해 계속해서 애타게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신자가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계속해서 듣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의롭고 신령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영적인 안목이 그분 쪽으로 향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큰 뜻을 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인간적 현실적 심지어 도덕적 종교적 업적을
크게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 전체를 두고 눈물을 흘리시고 또 인류 전부를 두고 안타까워하시는
그 크신 긍휼을 우리 마음에 최대한도로 크게 담으라는 것입니다.
<*출처 : www.nosuchjesus.com 5/7/2007 *원제목 : 하나님의 애타는 절규, 축약했음.
◑소명
처음에는 소명이 비록 불확실하더라도, 그것은 정화과정을 거친 후에 견고해 진다.
그러므로 소명이 처음부터 너무 뜨겁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니
길고 긴 연단의 과정을 기다리며 인내하라는 주제의 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요15:16
돌아보니 제 소명 역시 갑작스런 부르심이었고,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따라나선 전형적인 케이스였습니다.
깊이 있는 심사숙고와 고뇌 끝에 내려진 결정이기보다
분위기에 이끌려, 공연한 객기에 시작하게 된,
동기가 너무나도 어색하고 결핍이 많았던 소명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소명의 동기가 정화되기 까지 죽을 고생을 해왔고,
지금도 고생이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이 문제는 저뿐만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직자께서도
자신의 소명이 순전히 어머니의 의도에 따라 시작된 길이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훌륭한 성직자는 소명의 동기가
다분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다행히 살아가면서 그분들은 자기중심적인 소명의 동기,
결핍된 선택의 동기들이 나름대로의 ‘정화과정’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운 자기 극복의 기나긴 과정을 체험하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참된 주님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하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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