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7

718 영화 “밀양”을 보고

LNCK 2007. 6. 2. 18:29
 

◈영화 “밀양”을 보고                            골3:13


 

 

▲감상 포인트1 - 신애와 범인이 이해하는 ‘구원의 의미’

이 영화는 인간의 구원과 용서를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이 영화가 다분히 종교적인 것은,

인간의 종교적 영역의 문제, 구원과 용서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영화가 참된 용서와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묻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신애도, 범인도,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신애는 고통으로부터, 범인은 죄로부터. 두 사람 다 용서를 말한다.

신애는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말하고 범인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 한다.

두 사람 모두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영화는 비극이다.

왜 그럴까? 밀양은 바로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신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허상이 아닌 참된 구원과 용서가 무엇이냐를 묻고 있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인트2 - 신애의 ‘허영’ 또는 '허울'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①삶의 허영 - 신애의 돈을 노린 웅변학원원장은 어느 술자리에서

신애가 좋은 땅을 사려고 한다는 말을 듣는다.

은행에 돈을 넣어두기 보다는 목 좋은 땅에 투자하는 것이 낫다는

신애의 말을 듣고 범인은 신애가 꽤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실제 신애는 이곳 저곳 땅을 소개 받아 둘러보러 다닌다.

하지만 사실 신애는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신애는 유괴범과의 통화에서 자신에게는 사실 땅을 살만한 돈이 없음을 고백하며

요구하는 돈을 마련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쩔쩔맨다.


단지 돈 많은 사람으로 보여야 새로운 터전에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란 생각에 신애는 그런 허세를 떨었던 것이다.

결국 아들의 죽음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②신앙적 허영, 허울 - 신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난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신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어쩌면 거기에는 용서하는 믿음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확인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얼마만큼은 자신의 그런 믿음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의 용서 앞에서 참회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범인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 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녔던 것처럼,

신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 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차라리 범인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면 됐지, 굳이 면회를 가서

범인 면전에 대고 용서한다고 말할 것까지야 뭐냐고 말하는 종찬(송강호 분)

그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깝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용서의 세계를 굳이 눈에 보여주고자 했던 신애의 마음에는

분명 영적인 자신감과 범인에 대한 영적인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이 내게 이런 평안을 주셨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것을 말해주러 왔다”는

신애의 말 속에서 그것을 읽을 수가 있다.


문제는 신애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바,

신애는 범인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용서 앞에 감격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범인이

오히려 하나님께 이미 용서를 받았고 그로 인해 지극한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신애는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어떻게 내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신애의 이 말은 그녀가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며

그러기에 그녀의 용서 퍼포먼스가 실은 영적인 허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포인트3 - 끝내 안 되는 ‘용서’

또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던 신애는 마치 하나님께 시위라도 하듯

자신이 나가는 교회의 장로를 유혹해 야외에서 정사를 벌이고자 한다.

그 때 신애는 장로 밑에 깔려 하늘을 쳐다보며 비웃듯이 말한다.

“보여? 이게 보이냐고?”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물론 신을 조롱하며 하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던 신애에게

신의 거처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하늘이다.

그래서 벌건 대낮에 장로를 유혹해 보란 듯이

하나님 면전에서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녀가 보았다고 고백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란 무엇일까?

그녀는 한순간도 눈에 보이는 세계를 떠나본 것 같지 않다.


그녀는 끝내 참된 용서를 하지 못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범인의 딸이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

미장원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신애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인으로서 정말 하기 힘든 용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참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섣불리 할 수 없었던 용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은 그녀의 허영에 불과했다.

그 영적인 허영이 그녀에게 또 다른 파탄을 불러왔다.

종찬의 말대로 그냥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통해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어느 날 진정으로 범인을 용서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포인트4 - 영화의 가장 핵심 주제

신애가 차를 운전하다가 잠시 딴 생각에 잠겨 있다가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칠 뻔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부부인 듯이 보이는 두 남녀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신애에게

이렇게 따진다.

“사람 죽여 놓고(죽인 다음에)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나는 이 대사가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키가 된다고 본다.


그렇다.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말한다고 다가 아니다.

죽인 죄에 대해서는 설사 용서를 받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죽임을 당한 피해자에 대해서 어떻게 면죄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최소한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는 영원한 참회의 자리에 남아야 하는 것이

진정 용서받은 자의 모습이 아닐까?


▲영화 속 범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고통 받은 신애 앞에서

참회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너무도 떳떳하게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선언한다.


신애는 그의 모습에서 최소한의 죄의식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빌미로 내어버리고

사랑과 평안 운운하는 뻔뻔함을 보았던 것이다.

그 뻔뻔함 앞에 신애는 치를 떨었고,

끝내 교도소 마당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영화 밀양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신앙적 질문을 던진다.

죄인이 죄를 용서받음으로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언제나 신은, 죄를 지은 가해자인 죄인의 구원에만 관심하는가?


죄인이 지은 죄를 용서받아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신의 은총이라면

그 죄의 피해자, 즉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영혼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범인은 감옥에서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아 살인죄를 용서받고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그 시간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가르치던 선생님 손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아이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으며,

어린 자식을 잃고 피를 토해내는 고통에 빠져 있는 신애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아야 하는가?


죄인은 값싼 은혜 덕에 최소한의 죄책마저도 안고 살지 않는 동안

그 죄인의 손에 죽어가거나 피해를 입은 가련한 영혼들의 구원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영화 밀양이 기독교에 대해 던지는 중요한 신앙적 물음이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죄인의 영혼구원을 위한 사죄의 은총, 신의 사랑과 용서,

분명히 죄인에게 복음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영혼은 어디 갔는가? 그 영혼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피해자는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나?

피해자의 구원 없이 가해자의 구원만을 노래하는 것이 과연 신의 뜻인가?


▲참된 사죄란 신의 은총으로 그저 자신의 죄만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피해자 앞에서는 영원히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참회하며

피해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피해자의 구원 없는 가해자만의 구원이 과연 신의 은총이랄 수 있을까?


▲Andrew Sung Park이라는 젊은 신학자는 그의 책 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통해 보건데, 교회는 인간의 죄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사실, 인간의 죄로 인한 희생자에 대해 간과해왔다>


죄와 죄인의 구원을 노래하는 화려한 복음의 반대편 응달 그늘진 곳에는,

그 죄의 결과로 희생당한 피해자의 영혼은 통곡하고 있다.

고통에서조차 구원받지 못하고 있다. 마치 영화 속 신애처럼!


영화 밀양은 피해자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않는 가해자 죄인을

(두둔하고) 구원하는 값싼 속죄의 은총이 아니라

죄의 희생자의 영혼까지도 구원하는 신의 은총의 햇살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용서, 속죄처럼 허영 가운데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한 세계 속에 감추어진 신의 은총의 햇살,

Secret Sunshine(밀양)속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장면까지 안타깝게도 신애는

이 밀양의 비밀을 아직 못 깨달은 듯 하다.

그가 밀양의 비밀을 깨닫고,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마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출처 : 김 성 목사 씀.  http://blog.daum.net/omnibusomni/12029233


 

▲신애 씨에게 하고 싶은 말

신애의 오해는, 용서의 주체가 ‘피해를 당한 자신’으로 보는 데 있다.

성경은, 용서의 궁극적 주체는,

피해자(사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라고 가르친다.

 

(궁극적으로) 죄인은 죄인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

모든 인간은, 신애를 포함해서, 용서를 받는 위치에 있지,

용서를 해주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 자기에게 어떤 극한 잘못을 저질러도

궁극적인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를 대언해서 전달해 주는 것일 뿐이다.


성경을 책상 위에 탁 던지면

거기서 구슬 같은 것이 쪼르르 굴러 나오는데, 

-그것은 ‘사랑’이다.


다시 그 핵심을 파악하려고,

그 구슬을 반으로 쪼개어 보면,

-거기엔 ‘용서’가 나온다. 즉, '용서의 사랑'이다.


용서의 다음단계는 ‘축복의 사랑’이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은,

내가 정말 원수를 ‘용서’했다는 증거가 된다.


신애가 범인을 용서해서 교도소에 면회를 갔지만,

아직 그는 진정 축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진정한 마음의 용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으며,

(그렇다. 용서할 권리right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용서할 능력power도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 하나님의 용서가 신자에게 임할 때, 부어질 때 

우리도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데,

그 증거는 '원수 축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축복하지 못하는 자는,

영화 속 신애처럼

언젠가 그 딜레마 속에서 스스로 파멸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원수가 아니라, 사실은 자기자신을 위해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범인은 자기 입으로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영화는, 신애와 마찬가지로, 그를 뻔뻔스럽고 가증스럽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 범인의 회개의 진정성 여부를 차치하고서)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셨다면... 신애도 그를 용서해야 한다.

신애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즉 피해자인 신애와 신애의 아들의 구원 문제,

범인은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칠 때,

피해자의 고통에서의 구원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하나?

이 질문에 관한 가장 근접한 해답은   http://blog.daum.net/rfcdrfcd/11683484

   

 

▲참고 : 영화의 줄거리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살러 내려와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새 삶을 시작하려던 주인공 신애에게 비극이 찾아든다.

어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유괴범은 돈을 노렸다.

범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었다.

신애는 남편의 죽음에 이은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쥐어짠 걸레처럼 온몸이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통곡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약국을 하는 이웃의 권유로

어느 교회의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녀는 여기서 목 놓아 처절하게 운다.

신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인간의 가장 처절한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의 통곡일 것이다.

통곡 중이던 신애의 머리위에 목사의 손이 얹혀지고 신애의 통곡은 잦아든다.


그리고 갑자기 신애가 변했다(!) 그녀가 갑자기 신자가 되었다(!)

그녀는 가정예배에서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었음을 고백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되었다고 간증하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그녀는 매주 열심히 교회를 출석할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찬양하며 노방전도에까지 나서게 된다.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은혜를 받았고 변화를 받았고 열심을 가진 신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 가겠다고 나선다.

목사와 교인들은 그녀의 믿음과 용기를 칭찬하고

신애는 교도소 면회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범인과 마주 앉는다.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 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신애의 입을 통해 하나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놀랍고 감사하다며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신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그리고 다시 신애는 변한다(!)

목사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러 와서 앉아 있어도

나는 못하겠다는 식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다.

교회에 들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미친 사람처럼 두 손으로 의자를 두들겨댄다.

자신을 위한 기도모임을 하는 교우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버린다.

레코드가게에서 음반을 훔치고

그 훔친 음반으로 교회의 야외집회를 조롱하며 훼방한다.


그리고 자신을 전도했던 약사의 남편 교회장로를 유혹에 빠뜨리려 하는 등

신애는 확실히 다시 변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팔을 칼로 그어 자살을 시도하고

미수에 그쳐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는데

하필이면 미용사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의 말썽 많던 딸이다.

신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박차고 나와 자신의 집 마당에 앉아

거울을 앞에 놓고 자기 스스로 머리를 싹둑 싹둑 자른다.


영화는 그렇게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집 마당을 비추며 끝이 난다.

고장 난 차안에서 바라보는 하늘을 비춤으로써 시작했던 영화는

신애의 집 지저분한 마당을 비춤으로써 끝이 난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3:13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리빙 http://blog.daum.net/bible3/11840930

'분류 없음 > 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721 담을 넘은 가지  (0) 2007.06.04
720 가장 요긴한 돌을 버리기 쉽다  (0) 2007.06.04
소명 받은 자의 증거  (0) 2007.06.01
비가 일년에 여러 번 내려야  (0) 2007.06.01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이유  (0) 2007.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