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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739 초대교회의 여자 성도들

LNCK 2007. 6. 14. 16:35
 

◈초대교회의 여자 성도들                      행8:3



▲살벌한 사울의 박해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대교인들의 대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자 사도들를 제외한 교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8:3


박해의 현장의 우두머리격인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아예 잔멸시키려고 했다.

우리말 ‘진멸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리마이 노마이’는

‘포도원에 떨어진 멧돼지가 포도원을 마구 짓밟아서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형국’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그 정도로 사울의 박해는 잔인하고도 집요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감옥에 집어넣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죄 아닌 죄로 인해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감옥에 끌려가는 모습을 잠시 머릿속으로 그려 보시라.

참으로 무시무시하고도 끔찍한 박해가 아닐 수 없다.



▲“남녀를 끌어다가...” 에 담긴 뜻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박해를 전해주는 행8:3절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다.

그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직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려지기 전이다.


따라서 행8:3절이,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끌어다 투옥시켰다고 기록할 수 없었다.

사울이 믿는 이들을 또는 교인들을 끌어갔다 라고도 기록하지 않았다.

성경은 사울이 남녀를 끌어다가 투옥시켰음을 밝히고 있다.  행8:3


헬라어 원문을 보면 ‘남녀’를 복수로 기록하고 있다.

그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사울은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투옥시켰다는 것이다.


왜 원문을 남자들과 여자들이라고 기록하므로

여자들을 부각시켰을까?


당시엔, 여자들을 수의 개념에 치지도 않으므로,

‘남자들’, 또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했을 터인데 말이다. (그 설명이 아래에 나옴)



◑초대교회의 여자들


▲1. 초대교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여자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에

감람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제자들은

자기들의 거처였던 소위 ‘마가의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모여 있던 성도들과 함께 제자들은 거기서 힘써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초대교회를 구성했던 구성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의 아우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여자들로 구성되어있다. 행1:12~15


그런데 그 기도모임의 총 숫자는 약 120명인데,

거기에 모인 남자들은 15명 정도 되리라고 본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남자 제자들.

예수님의 아우들도 역시 남자들이었다.     →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마13:55


이와 같이 이름이 밝혀진 남자 의 수를 다 합쳐도 15 명밖에 안된다.

그런데 그 모임에 모인 총수가 약 120명이라고 증거하고 있으니, 행1:15

신원이 밝혀진 15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마리아를 포함한 대부분이 여자일 것이라 본다.


대체 그 모임에 참석한 여자들은

도대체 어떤 여자들이었는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성경적 단서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현장에 보면,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막15:40~41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갈릴리로 떠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실 때에

예수님을 �아서 예루살렘까지 따라간 갈릴리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 많은 갈릴리 여자들이

초대교회의 모태가 된 이 기도모임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사도행전 1장부터 초대교회 구성원 대다수가

여자였음을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2. 오병이어 현장의 여자들

아득한 먼 옛날에 기록된 성경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시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당시는 성인 남성중심의 사회였다.

얼마나 성인 남성중심의 사회였던지, 여자나 아이는 사람 축에 속하지도 못했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기록된 성경은

여자들과 관련해서 그 당시의 관점으로 본다면,

깜짝깜짝 놀랄만한 사실들을 전해주고 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 여자와 아이 외에

성인 남자가 5천명이나 됨이 기록되어 있다. 마14:21

그 구절이 성경에 대표적인 여성비하의 구절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여자를 수에 끼워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천년 뒤로 돌아가 그 시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그 당시 사회 관습상으로 보면

그 곳에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여자는 있어도 없는 것과 똑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5천명 있었다.’ 라고 짧게 기록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 14:21이 그곳에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성인 남자) 5천명이 있었다고 언급한 것은

그곳에 성인남자 5천명보다 숫자적으로 훨씬 많았던

성인 여자와 아이들이 있었음을 말하는

2천년 전 표현방식이었던 것이다. ★



▲3. 십자가와 부활 당시의 여자들

복음서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고난의 현장에 여자들이 있었고,

사흘 후 부활의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최초의 부활의 증인들도 여자들임을 밝혀준다.


2천년 시각으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었다.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될 여자들의 이야기를 썼다는 것 자체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

끝까지 참된 믿음을 갖고 지켰던 자들이 여자들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4.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행전 1장에서 초대교회가 태동되었던 집을

사람들은 ‘마가의 다락방’(마가의 집)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고

식사 후에 주님이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던 곳도

바로 그곳이고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강림하셨던 곳도 바로 그 집이었다.


그 역사적인 집을 성경은 우리가 부르는 것처럼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한번도 말하고 있지 않다.


행12:12절은 그 집을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성경은 그 집을 마가의 집이라 하지 않고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임을 언급하고 있다.★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그 집을 내놓은 사람이 마가가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였음을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행1장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시작된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이

마리아를 비롯해 대다수가 여자들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당시의 관점으로 본다면 가히 혁명적이 표현들이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와 같은 ‘여자들의 이야기’는

성경에 전혀 기록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에서는 그랬다.


그럼에도 복음서가 당시의 관습을 거슬러 혁명적일 정도로

여자들의 이야기를 강조해서 쓴 의미가 대체 무엇일까?


믿음에 관한한 언제나 여자들이 남자들을 앞선다는 것이다.

믿음에 관한한  여자들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앙심에 관한한 여자들의 신심이 남자들의 신심보다 깊다는 것이다.



▲5. 성령강림 이후 태동된 초대교회에서 여자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행5:14


이 구절의 원문에도 남녀가 각각 복수로 기록하고 있다.

남자들과 여자들의 큰 무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로 나아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2천년 관점으로 되돌아가면

그 구절이 ‘굳이 여자들을 별도로 밝혔다는 것’은

교회에 찾아 나오는 자들 중에 여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나타낸다.


만약 여자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면,

‘남자들, 또는 사람들’로 기록하고... ‘여자’라는 단어는 누락시켰을 것이다.

당시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이다.



▲6. 교회가 핍박을 받을 당시의 여자들

그렇다면, 초대교회 박해를 증언하는 행8:3절에서

사울이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다가 투옥시켰다는 기록에서

왜 굳이 “여자들”이란 표현을 썼는지 알게 된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박해 받은 남자보다도

박해 받은 여자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는 ‘2천년 전의 표현법’이었던 것이다.


초대교회를 이루고 있던 여자들의 신앙심은 그만큼 참되고도 깊었다.

초대교회의 여자들은 평소에는 주님을 잘 쫓다가

믿음으로 인한 자신에게 위해가 가해질 때는

간단히 주님을 외면하는 신앙의 기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세주임을 확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에게 임하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의 양심을 어기면서 까지도 박해를 모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박해를 당할지언정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진정한 크리스천들이었다.


초대교회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여자들이

그처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던 차에

그 여자들 앞에서 초대교회의 어느 남자가, 남자 체면이 있지,

자기 신앙을 박해 때문에 헌신짝처럼 내던질 수 있었겠는가!

 

결국 ‘여자들을 강조하는’ 2천년 전에 기록된 행8:3절은

초대교회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킨 원인이

‘여자들의 깊은 신앙심으로 비롯되었다는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의 믿음이 중요하다


왜 여자들의 신앙은 이토록 중요할까?

왜 믿음에 관한한 여자들의 역할이 항상 남자를 앞설까?



▲사람을 낳는 자궁은, 세상을 낳는 자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는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을 잉태하는 생명의 태요,

생명의 자궁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어떤 인간도 여자의 태를 거치지 않고 나올 수 없다.

심지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여자의 태를 통해 오셨다.


알고 계시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여자를 통해 잉태된다는 것은,

사실은 이 세상 역사 전체가 여자를 통해 잉태된다는 뜻도 된다.


그러므로 믿음에 관한 한, 아니 믿음의 세계를 벗어나서도

모든 생명의 태인 여자의 중요성은 매우 중요하다.



▲여자의 무시무시한? 영향

여자가 어떤 마음,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그 여자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수 없이 많은 사람,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8:3절에서 좀 더 귀중한 사실을 알게 된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남자와 여자)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8:3


위 구절에서 ‘남자’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르’는

‘남자와 남편’을 동시에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여자’를 가리키는 헬라어 ‘귀네’ 역시

‘여자와 아내’를 동시에 뜻하는 단어이다.


이 두 단어는,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의미보다는

‘남편과 아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울이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다가 투옥시켰다는 말씀은

바로 ‘남편들과 아내들’을 끌어다가 투옥시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구절을 2천년 전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아내들이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키는 한,

남편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아내들이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데,

사나이라는 남편들이 박해를 두려워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베드로가 청렴했던 이유

이것은 백 번 타당한 말이다.

아무리 남편이 참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려고 해도,

아내가 남편의 발목을 잡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탐하도록 닦달하면

가장인 남편은 절대로 신앙양심을 지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걸인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요구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나는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노니...”


그러나 만약 그 때, 베드로의 아내가 베드로의 발목을 잡고,

당신도 다른 집 남편처럼 은금을 제발 좀 집에 가져오라고 매일 닦달했다면,

과연 베드로의 삶 속에 그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역사가 가능했겠는가?



▲주기철 목사님의 아내의 역할

아내가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한,

남편은 언제든지 위대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사한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순교자의 대명사로 추앙받고 있다.

주 목사님이 순교하기 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킴으로 인해

하마터면 맥이 끊어질 뻔 했던 한국교회의 정통성이 지켜지고, 이어졌다.


하지만 주 목사님 역시 인간인 이상 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없었겠는가?

연로한 노모, 사랑하는 아내, 나이어린 자녀들을 생각할 때마다

왜 불쑥 불쑥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목사님이 순교하시기 까지

신앙의 정절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아내 오정모 여사의 내조로 인함이었다.


오정모 사모님은 사랑하는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을지언정

처자식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도록

초지일관하게 결연한 신앙으로 남편을 내조했다. 

*관련글: http://blog.daum.net/ygbhygbh/2592716


마침내 주 목사님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셨다.

주님을 위해 순교함으로 그 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았고

그분으로 인해 한국교회 전체가 살아났다.


하지만 오늘의 설교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야기는 약간 더 자세히 이해된다.

그분의 아내 덕분에 그 분은 그리스도안에서 자기를 지킬 수 있었고

한국교회를 지킬 수 있었다.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라는 이름에 가려져

그 분의 아내 오정모 여사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지일관했던 그 분의 아내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을 살렸고, 한국교회를 살렸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을 향해서만 박수를 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그 분의 아내, 오정모 사모를 위해

더 큰 박수를 쳐 주셨을 것이다.



▲여인의 중요성

여인의 믿음은 이렇게 중요하고 여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한 시대의 건강성은 언제나 여자에게 달려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인류의 타락은 인류 최초의 여자였던 하와의 범죄로 인함이었다.

믿음의 조상인 유대인이 아랍과 갈라져서 지난 4천년간 대립을 계속해 오는 것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신의 태를 통해 후손을 태어나게 하신다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자신의 몸종을 남편의 첩으로 삼게 해 준

불신앙의 결과였다.


열왕기에는, 모든 왕들의 어머니의 이름이 반드시 기록되어 있다.

어느 여자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어느 여자의 자식으로 성장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왕인가가 결정되고, 그로 인해 왕국 역사가 달라졌음을

우리로 하여금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여자가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

복음서는 약혼자를 둔 처녀가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 마리아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여자 마리아의 사명이 중요했다.

만약 마리아가 불순종했거나, 불건전했다면... 구세주의 탄생이 방해받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여자가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을 지녔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에게 증언해 준다.


이것은 남자의 역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거나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남자의 중요성도 두말할 나위 없이 크다.

단지 오늘 이 시간에는 모든 생명의 태가 되는 여자를 더 중요시하는

성경의 관점을 여러분과 함께 논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여자 성도님들

이다음에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살 때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상류사회에 속했는지,

얼마나 이재(재리)에 밝았는지

절대로 따지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를 따지실 것이다.

단지 이 세상에 속한 세상의 여자로 살았는지,

신앙심 깊은 믿음의 여자로 살았는지 물으실 것이다.


여자들이 어떤 생각,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남편과 자녀의 인생이 달라지고,

교회와 사회의 기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혜자 솔로몬의 깨달음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14:1


3천년 전 솔로몬은 나라의 삼권을 장악한 절대군주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권력이나 군대의 힘으로

자신의 집이나 국가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 집안과 한 국가의 흥망성쇠가 오직 여인에게 달려있다고 고백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이 여자로부터 잉태되기에

‘이 사회 자체가 곧 여자로부터 잉태된다는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깨달음’

그것이 바로 솔로몬의 지혜였던 것이다.


이 설교를 듣는 자매님들이여,

이 시대를 허무는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라

이 시대를 진리 위에 바로 세우는 지혜로운 믿음의 어머니,

믿음의 딸, 믿음의 아내가 되시기를 축원 드린다.

그래서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가정, 교회, 사회가

날로 새로워지는 믿음의 역사가 계속될 줄 믿는다.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07.06.10. *원 제목 : 남녀를 끌어다가  (행8:1~3)

 

 

 

▲주기철 목사님과 오정모 사모님의 마지막 면회


주기철 목사님의 아드님 주광조 장로님이 07.06.08. 이 자리(강변교회)에서

아버지의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다섯 번째로 연행되어 갈 때는

이 길이 마지막 길이라 예감했던지 할머니에게 큰 절을 하시면서

‘하나님께 어머니를 맡겨놨습니다’ 라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예배드리려 찾아오셨던 20여명의 교인들에게

그가 남긴 마지막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 그리고 내 영광까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디에 두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지금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면 끝나버릴 이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수 없습니다.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옥살이 7년. 마침내 욥의 고난과 인내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어머님과의 마지막 면회는 1944년 4월 21일 평양 형무소에서였습니다.

면회 직전, 형무 소장은 주 목사님을 병보석으로 풀어주겠다고 허락했지만,

간수 등에 업혀 나온 주목사님을 뵌 어머니 오정모 사모님은

‘목사님!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목사님의 승리가 곧 조선교회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고난을 이겨내도록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살아서는, 눈 뜨고는 생명이 붙어있는 한 이 붉은 벽돌문을 나가지 않을 것이오.

나는 오래지 않아 주님 앞으로 갑니다.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잘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나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를 구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혀 병감으로 돌아서 가며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먹고 싶소.’


해방을 1년 4개월 앞둔,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형무소에서 기나긴 7년 여 간의 옥고 끝에 순교하는데,

그 때 그분의 연세가 48세셨습니다.”


주광조 장로님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으로 양식 삼고, 인내로 거처 삼아,

결국 죽음으로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제 아버님이신 주기철 목사님이 그러셨고,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성도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이상 한국교회에서 고난도 십자가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오로지 축복과 은혜만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불편함이나 인내는 참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우리에게는 욥의 어떤 고난이나 인내, 신앙을 위한 손해를 감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입술은 쉼 없이 부흥을 말하고, 솔로몬의 영광을 갈구합니다.

우리 모두는 편안함에 길들여진 채, 솔로몬의 영광만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인내가 없이는 부흥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빠진 부흥은 곧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일 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고난의 십자가가 살아날 때,

그리고 그 고난에 인내할 때 진정한 축복과 부흥의 시작이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버님 주기철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뵌 세월이

어느덧 6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마치 어제 일 인양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평양 형무소의 묵중한 문이 닫히며 그 틈으로 뵌 푸른 죄수복에 짧은 머리,

그리고 깊게 패인 아버님의 두 눈은 어느 누구의 눈빛보다도 강렬했고,

아버님의 잔잔한 미소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애로우셨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버님의 믿음과 선택, 그리고 순교를 다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아버님의 믿음은 옳았습니다. 분명 아버님의 순교는 저와 저희 가정,

그리고 한국교회에 큰 축복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이 단락 출처 : 강변교회 주일설교 0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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