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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 믿으면 자유인이 된다

LNCK 2007. 6. 22. 23:48
 

◈믿으면 '자유인'이 된다              갈5:1,  요8:30~37         인터넷설교 녹취


▲유대인이 반발한 이유 - 네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니... 오만방자하구나!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믿었더라 요8:30


적어도 이때 까지는 괜찮았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발짝 더 깊은 곳으로 그들을 끌어가셨다.

그들에게 좀 더 깊은 진리(자유케 하리라, 이 설교 주제)를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소란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본문 요8:30~37절에서 핵심적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하셨다. 요8:36


이 말씀을 듣자, (처음에 예수를 잘 받아들이고 믿었던) 유대인들이 발끈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자유를 잘 구가하고(누리고)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매여 있단 말인가?

저 사람, 그런대로 믿어주려고 했는데, 아주 상대 못할 사람이로구만!


이제까지 가르침이나 행동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더니,

이제는 스스로의 권위로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네!

이 사람 엉망이로구만, 왜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원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그 조상의 권위아래서도 얼마든지 자유를 누리고 살아왔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주절거리는가?’ 라며 반발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시려는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누리는 자유참 자유가 아니었다.

고집과 편견으로 뭉쳐있는 거짓된 특권의식 속에서

도저히 참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허상을...

예수님은 깨뜨리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믿는 바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요8:30~37절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가?

믿음으로 성숙되어 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런 주제에 대해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유대인들이 처음 예수를 믿은 것은.. 자기 생각대로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자기들의 구미와 적성에 예수님의 메시지가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의도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시작하시면서

그들은 혼란을 겪었고, 심지어는 분노까지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점점 더 자유인이 되어가는 것

믿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종교성에 충실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이든지, 거룩한 것이든지

자기 욕구에 충실하게 응답해주는

그런 신을 믿는 것을... 기독교의 ‘믿음’이라 말하지 않는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분의 삶을 자세히 주목해 보고,

그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삶 ‘믿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신념이나 확신이 아니고,

‘삶’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믿는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씀해 주신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진리를 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에 접근해 가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점점 더 자유를 누려간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이신 예수님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특징적으로 머릿속에 한 단어만 떠올린다면

어떤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겠는가? -자유인이다.

당시의 전통적인 구습과 형식에 매이지 않으시는 진정 자유인이셨다.

 

우리 주변에 보면, 환경과 사람들의 이목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간혹 있다.

자기 신념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자유인이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유하라고 가르치셨다.

또한 당신이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자유하신 모습


예수님이 자유하신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셨는가?

그 모습을 확실히 보고 깨달아야

우리도 ‘신앙의 목표인 - 자유’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1. 물질적 자유를 누리신 예수님


우리는 종종 절대빈곤이든지 상대빈곤이든지, 물질적 어려움에 봉착하며 산다.

빈곤하지 않다 하더라도, 물질은 언제나 우리의 뇌리에 따라다니는 문제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속에서 그런 말을 되뇐다.

‘돈만 좀 많으면, 내가 이렇게 쩨쩨하게 살지는 않을 터인데...

좀 더 자유롭게, 좀 더 넉넉하게 살 수 있을 터인데, 돈이 웬수지...‘


사람은 누구나 물질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움츠려드는 경험을 하곤 한다.


사실 예수님에게도 물질적 문제는 공생애 내내 따라다녔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그 문제에 대처하셨는가?


▲예수님의 물질적 자유

예수님은 추종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구나...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말하자면, ‘집도 절도 없는 나를 따라다녀 봤자,

너희들 별 재미 못 볼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은 빈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먹는 것 때문에 종종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먹보’라 불리기도 했고, 눅7:34    

제자들은 안식일 날 밀밭 사이를 걷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기도 했다.

평소에 충분히 잘 먹고 지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돈만 충분히 있었다면, 그런 치사한 욕은 어쩌면 안 들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처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물질적 부자유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내셨는가?


그 분이 직접 가르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리고 광야에서 40일간 주리실 때에도

돌들로 떡을 만들어먹으라는 마귀의 유혹에도 예수님은 단호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예수님은 물질적인 부자유함

하나님이 주시는 내면적 말씀에 딱 묶어두심으로(가두어두심?) 인해서

당신 자신은 여유 있게 자유를 누리셨다.

즉, 진리(말씀)가 예수님을 자유케 하셨던 것이다.

 


▲2. 존재론적 자유를 누리신 예수님 (남의 평가로 부터 자유함) 

첫 번째가 물질적이라면, 이것은 정신적인 측면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시선과 관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은, 다른 사람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왜 나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이목에 내맡겨 두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야 될 줄 알면서도, 우리는 거기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모두는,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묶여져 (부자유하게) 살고 있다.


사실은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들은 나를 주목해서 볼 시간이 없다.

그냥 쓱 스쳐 지나가면서 볼 뿐인데,

왜 우리는 그 쓱 스쳐 지나가는 그 눈길이

내 가슴 폐부를 깊이 찌르는 것처럼 느끼는가?


그것은 타인의 이목과 관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내가 누구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해서,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더냐?, 어떻게 나를 평가하더냐?’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설교를 하고 나면,

초연하게 넘겨듣는 듯 하면서도.. 청중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된다.

즉, 타인의 반응에 부자유하게 된다.


예수님도 그런 문제에 적지 않게 시달리셨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실 때, 사람들은 달려들어 다짜고짜 물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구냐?”

“네 형제자매가 우리 중에 있지 아니하냐?” (우리가 환하게 다 안다)

“너는 그 목수의 아들, 그 예수가 아니냐?”


“네 이력을 우리가 뻔히 아는데, 네가 알면 도대체 얼마나 아느냐?”

“나사렛에서 무슨 특별한 것이 나오겠느냐?”

“그 촌 동네에서 배우고 들은 것이 있다면, 뭐가 있겠느냐?

네가 알면, 뭣을 알겠느냐?”


등등의 여러 조소 섞인 소리들을 예수님은 들으셔야만 하셨다.

예수님은 그때마다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이셨다.

자신의 성분 때문에, 가문 때문에, 학벌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셨다.


사실 오늘날도, 학벌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자기 정체성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도 허다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타인의 이목과 평가에 대한 부자유함

어떻게 극복하셨는가?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

성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부르셨다는 확신이 분명하셨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논란을 벌이려고 했을 때,

예수님의 태도는 단호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눅4:18


나는 내 가문에 의존된 사람이 아니다.

내 환경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부르셔서.. 너희들 앞에 이렇게 섰다.

내 출신배경을 탓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 세례를 받으실 때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이 때부터 예수님은,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히 확립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누구냐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이 없으셨다.


그래서 과거의 이력으로, 가문으로, 배경으로 예수님을 평가하려는

그 도전을 과감히 물리치셨다. (2천년이 지난 요즘도 이런 것 많이 따진다)


‘오늘날 나는 과거에 매여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에 의해 이렇게 되어진 존재가 아니다.

나는 매일 매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부름을 받은 자이고

오늘 이 시점에도 나를 형성해 가시는 하나님 안에서 되어져가는 나이다.

당신들의 이목에 붙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변 여건이나 환경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으셨다.



▲3. 죽음의 문제에 자유를 누리신 예수님


우리는 죽고 사는 문제, 건강의 문제에 대해 전전 긍긍한다.

‘내가 건강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텐데...’

우리에게, 중한 질병과 죽음의 그늘이 얼쩡거리는 것을 의식하면

궁극적인 가치를 향해 용기 있게 발을 내딛지 못하는 

그런 부자유스러움이 종종 있기 마련이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부자유스러움이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는 두려움의 절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존재의 소멸과 안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많은 두려움의 근저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국 목숨에 대한 두려움이다.


예수님은 목숨의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죽음에 대해 초연하지 않으셨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으셨다. 왜 내가 존재해야 되는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그런 물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답이 나왔다.

다른 사람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 도달하셨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마20:28절이다.

거기에 예수님의 자기 존재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 사명(사는 이유, 존재의 목적)을 확실히 하심으로써,

‘불안한 자기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이유가 분명할 때,

오늘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그 목적을 확실히 알 때,

그 불안한 자기 죽음의 부자유스러움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죽음의 문제에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선교지에 가서... 거기서 죽어서 묻히겠다는 선교사가 간혹 있다.(농담 아니라 진짜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다.


또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날마다 다짐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시골에서 평생 목회하다가 죽겠다는 사람도 있고,

평생 연구하다가 도서관 곁에서 묻히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런 자기 사명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자유함이 우리 각자에게도 꼭 필요하다. 



▲4. 명예로부터 자유함


예수님은 ‘명예와 지위의 문제’를 ‘죽음의 문제’와 연결해서 말씀하신다.

(마20:25~27절은 명예, 28절에 죽음의 문제를 연결해서 가르치셨다.)


제자들은 지위와 명예 문제에 대해 민감해서 시도 때도 없이 서로 다투었다.

우리 중에 누가 크냐? 누가 으뜸이냐? - 이런 문제로 그들은 자유함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이 명예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상처를 받고 있구나.’

이런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5~28


‘내가 누구보다 더 우월하다고 하는 것도, 내가 누구를 지배한다고 하는 것도,

내가 누구보다 열등하여 누구의 지배를 받아야한다는 것도

이것이 다 무엇이라고요?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러지 아니할 지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방식은 그러지 않을 지니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삶이 우리의 삶이다.’


사람이 목숨까지도 내어주겠다는데,

까짓것 명예 정도도 포기 못할까! 그를 섬기지 못할까!

그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깨달으면 너희가 자유케 되리라.

더 이상 거기서 전전긍긍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니 이방인이 행사하는 질서(서로 크고자 다툼)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질서에 역행하는 삶의 질서(섬김는 자가 크다)를 보여줌으로써

자유를 누리라고 하신다.


그러면 자신이 붙잡고 있는 이름 몇 자, 명예 때문에 부자유스러운 가운데서 벗어나 

존재의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적용 : 현실과 이상의 괴리 - 어떻게 극복?


이런 예수님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분의 삶은 그러했다. 초연하셨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지금 우리의 삶은 거기에 비해 얼마나 크게 다른가?

 

예수님은 보통 사람으로는 현실 불가능한,

오직 인자니까 가능한, 그런 목표를 제시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5: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믿는 우리에게 "이미" 자유를 주셨다고 했다.

고로 이미 이 자유를 얻은 상태에서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참 중요한 말이다. 우리는 이미 자유를 얻은 자이다.

그리고 그 자유를 바탕으로, 참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실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죄악에 끌려 사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는가?

이미 속사람이 거듭나지 않았는가! 


▲더 부자유해 질 뿐!

우리가 물질적 문제 때문에 부자유함을 느낄 때, 거기서 자유를 얻으려고

물질을 한 번 끌어모아 보시라.

 

명예 때문에, 권력 때문에 부자유스러울 때,

자유롭기 위해 더 큰 명예와 더 큰 권력을 향해 달려가 보시라.


건강 때문에, 죽고 사는 문제 때문에 부자유해서.. 그 자체에 매달려 보시라.

 

다른 사람의 주목(인기, 명예)에 부자유스러워서.. 그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어내는데

자신을 한 번 투신해 보시라.


그런데 그런 삶의 방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그것들을 얻은 순간 (자유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또 다시 더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얻은 물질을 지켜야한다. 이것은 가난할 때보다 더 힘들다.

얻은 명예와 권력을 지켜야한다.

얻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지켜야한다는 부자유함

우리는 또 다시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예수님은 참 자유라고 하지 않으신다.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어떤 외부 환경적 조건에 의존하지 말고, 

부자유함이 있는 그 상태로 주님 말씀 안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하신다.


즉, 부족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 주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묵상해 보라는 뜻이다.

(바로 예수님이 극복하신 방법이다.)

그 말씀 속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보시라.

즉, 말씀이(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물질 명예 등 외부 환경적 조건이 아닌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크리스천에게는 두 가지 실존이 있다.

하나는, ‘매일 직면하는 현실’이 있고,

또 하나는, ‘믿음 안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이상’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현실’과 ‘믿음의 이상’은

상당히 거리가 멀다. 괴리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의 이상’으로 접근해 가려는 용기를 잘 내기 어렵다.

즉, 현실은 현실이고, 믿음은 믿음이라는

두 실존이 평행선을 그리는 상태로 살아간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살아간다.

무슨 ‘경건의 연습’ 따위는 실종된 지 오래다.

영적 성숙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믿음의 삶이란, 끊임없이 경건의 삶을 연습해 가는 과정이다.

경건의 연습이란, 그런 ‘현실’과 ‘신앙 이상’ 사이의 간격을

조금씩 좁혀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내 현실’이 마침내 ‘믿음의 이상’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진리(말씀)로 그 둘 사이의 간극이 점점 좁혀져서 마침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자유케 된다는 상태를 온전히 자기 삶에서 실현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천의 목표 - 절대적 자유

예수님의 초대는 ‘절대적 자유’이다.

우리는 ‘상대적 자유’(남들보다 물질, 명예, 건강 등을 더 많이 가졌다고 하는 자유)

에 만족하면 안 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이시다.

그 자유는 진리로 통해 얻어진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의 믿음의 목표를, 주님이 주시는 온전한 (절대적) 자유로 정하시고

그 영적 고지를 향해 매일의 삶의 여정에 경건의 연습을 해 나가시기 바란다.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07.06.17. *원제목: 무엇을 믿는가?(2) 요8:30~37, 갈5:1             ▣ 복음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