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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752 두 번째 손가락의 글씨

LNCK 2007. 6. 23. 18:34
 

◈두 번째 손가락의 글씨         요8:1-11



▲정경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 논란을 일으키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본문(요8:1~11)은

초대교회부터 대단히 유명한 본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본문이 성경에 포함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이 복음을 전해야 될 것인지 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성경 사본에 보면, 어떤 사본에는 이 기사가 빠져 있습니다.

또 다른 어떤 사본에는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또 시간이 지난 후에는 빠졌던 사본에 다시 들어가 있습니다.

어떤 사본은 요21:25절(맨 마지막 절)다음에 본문을 추신처럼 추가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본마다 다양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초대교회의 ‘정경화 과정’에서

간음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이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고, 교회가 이것을 설교하고 가르친다고 한다면

교회는 음행을 용인하는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죄도 용서받아야 되지만 이런 여인이 용납된다면

교회의 거룩성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게지요.

그래서 빼내곤 했던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로, 성경을 읽다보면 (없음)이란 구절이 특히 신약에 많이 나옵니다.

성경이 필사가 되어서 전파되는 과정에서, 필사자의 주석이나 설명이 덧붙여졌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보다 오래된 사본(원본에 가까운 사본)을 발견해서 보니,

어떤 구절은 후대 사람들의 ‘설명 또는 주석’이 첨가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설명, 또는 주석, 또는 반복(강조)’ 구절을, 후대에서, 삭제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성경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원본에 보다 가깝게 복원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없음)으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5:4절 ‘천사가 물을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낫는다’는 구절도

필사자의 ‘설명’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런 설명을 안 해도 다 알고 있지만,

이방인들은 베데스다의 특별한 사연에 대해 설명을 해 줘야 본문을 이해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 구절은 아직까지 (없음)으로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으로 두 번째 글을 쓰시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슨 글을 쓰셨는지 성경은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주는 단서clue에 의해 이런 글이었으리라 추정됩니다...


▲단서1 : 카타그라펜

헬라어 원문에 보면 ‘글을 썼다’는 말에 "카타그라펜"이라는

퍽 재미있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카타"라는 말은 "against" 곧 "대항하여"라는 뜻이고

"그라펜"은 "글을 썼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 했는데 선생이여 어찌할까요?"

라고 예수님을 고발할 거리를 찾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대항하여 글을 썼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그들의 죄목을 쓰고 그 죄를 다스릴 율법을 썼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쓰고

그들이 지은 죄를 일일이 썼을 것입니다.

죄목과 율법과 정죄와 심판의 내용을 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단서2 : 두 번째 글을 쓰시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손가락으로 두 번 글을 쓰셨듯이(8:6절과 8절)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손가락이 직접 나타나 두 번 글을 쓰신 적이 있으십니다.

출애굽기에 십계명을 하나님의 손으로 “두 번” 쓰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36장에 보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모세가 가져온 돌판에 하나님의 손가락이 십계명을 쓰셨습니다. (1st)

모세는 그 십계명 돌판을 들고 산을 내려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세가 없는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향하여 십계명 돌판을 던졌습니다.

십계명 돌판이 사정없이 깨어졌습니다.


이것은 ‘너희들이 계명을 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다’는 상징적인 의미였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계약을 어기면.., 저주요, 심판이요, 정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40장에 보면 다시 손가락이 나타나 새 돌판에 십계명을 썼습니다. (2nd)


똑같은 계명, 똑같은 돌판이었지만

그 두 번째 쓰신 돌판을 법궤 속에 넣고 어린양의 보혈의 피를 발랐습니다.

속죄소로 덮었습니다. 이것은 용서의 복음이며 사랑의 복음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복음이며, 생명의 복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두 번째 쓰신 글은 ‘용서의 복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첫 번째 손가락의 잣대로 재어지면

우리는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심판과 정죄의 잣대로 재어지고 율법의 잣대로 재어지면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땅에다 글을 쓰시고, 잠시 중단하시고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고

두 번째로 허리를 굽혀 땅에다 글을 쓰실 때 (다 쓰기도 전에)

돌을 들었던 군중들은 모두 슬금슬금 다 도망갔습니다.


이제 두 번째 땅에다 글을 다 쓰신 후에 일어나서 보니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여자를 용서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본문 정황을 자세히 생각볼 때,

첫 번째 땅에 쓰신 내용이 ‘정의의 율법’이었다면,

두 번째 땅에 쓰신 내용은 ‘용서의 복음’이 맞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예수님의 두 번째 손가락을 만나야 됩니다.

첫 번째 손가락의 글씨만 보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용서’를 만나고 ‘복음’을 만나야 됩니다. ‘은혜’를 만나셔야 됩니다.


이 여인이 맞아야 될 돌을 예수님이 대신 맞아 주셨습니다.

범죄 했던 내 손과 발을 쳐서 찢어야 할 그 돌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아 당신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남자들이 던져서 옆구리가 터져서 피가 흐르고 뼈가 부러져야 될 그 돌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옆구리를 치시사 물과 피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내가 맞아야 될 돌을 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내가 터져야 될 그 머리를 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내가 찢겨져야 될 자리에 예수님은 대신 찢겨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느니라"

그가 상함으로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허물로부터 우리는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 안에서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죄는 용서 받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정경 안에 포함시키기로 한 결정은, 올바른 결정이었습니다.



▲율법의 손가락(첫 번째 손가락)을 붙들고 살지 마십시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고, 아프게 하고, 찢고, 상처내고, 망가뜨리는

첫 번째 손가락으로 살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손가락을 주님의 보혈의 피에 적시길 바랍니다.


우리 시대 유명한 기독교 저술가 C.S. 루이스는「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에 의해서 지은 죄는 작지 않다.

그러나 악마적인 본능으로 서기관들과 율법주의자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격을 말살하고 다른 사람들이 멸망해가고 몰락해 가는 것을

기뻐하는 어리석은 죄,

그가 용서받고 그가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생명의 길을 차단한 죄,

이것은 바로 악마적인 죄다"


주님의 은혜의 손을 붙드십시오. 회복의 손을 붙드십시오.

치료의 손을 붙드십시오. 새로워짐의 손을 붙드십시오.


<인터넷 설교 발췌, 축약 07.06.17. *원제목 : 주님께 끌려온 죄인, 요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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