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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756 하나님은 빛이시라

LNCK 2007. 6. 26. 22:34
 

◈하나님은 빛이시라              계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21:23,  요일1:5참조. 



성경에, 천국은 지상의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님의 빛, 예수님의 빛(등불)이 비취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빛의 비췸’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1. 빛은.. ‘기쁨’이다.


얼굴이 어둡다는 것은, 색깔이 검다는 뜻이 아니요, 기쁨이 없다는 뜻이다.

그의 얼굴이 밝다는 뜻은, 그에게 기쁨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빛은.. 기쁨을 상징하고,

반대로 어둠은.. 슬픔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뜻은,

그냥 ‘눈부시게 밝다’는 뜻 말고도, 항상 ‘기쁨이 충만하시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의 빛이 누구에게든지 비취면

그도 역시 기뻐서 찬양하게 된다. 그 기쁨을 반사하게 되는 것이다.


♬내 영혼에 햇빛비치니... (There's sunshine in my soul today)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488장)


기뻐하며 왕께 노래 부르니... 우리 주님과 함께 기뻐하리라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주께 영광 할렐루야 주만 찬양해


우리가 이 땅에서도 예배드리며 주님과 함께 기뻐하지만,

햇빛도 없고 달빛도 비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빛만 가득한 천국에 가면,

거기는 기쁨이 충만하고 더 넘치도록 충만할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시라, 교회에서 은혜스러운 성가대의 찬양을 들어도 기쁜데,

천국에 가서 천군천사의 찬양을 듣는다고 상상해 보시라!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2. 빛은 ‘아름다움’이다.


넓은 꽃밭에 가서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것을 바라볼 때, 넋을 다 잃어도,

날이 어두워지면... 그 어떤 아름다움도 표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도, 빛이 없는 캄캄한 방에서는.. 아름다움이 실종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대자연의 경치도, 어둠이 깔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빛은..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면,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뜻이요,

하나님의 빛이 비취는 곳(천국)에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오늘날 이 세상에도 화창한 햇볕이 내리쬐면.. 대자연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면, 햇빛보다 더 밝은 주님의 빛이 비취는 그 동산은,

그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 실과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그래서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잠시 환하게 변화된 천국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거기서 눌러 붙어 살 결심까지 했다.

간혹 가이드포스트 등에 영안이 열려 천사를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믿거나 말거나)

그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신비한 아름다움’이다.

만약 우리가 천국의 아름다움을 잠시라도 경험한다면,

이렇게 ‘현세적’으로만 살지는 않을 것이다.



▲3. 빛은 ‘지식’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어둡다’는 뜻은 상징적으로 ‘무지몽매하다’는 뜻이요,

‘밝다’는 뜻은 ‘지식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12


이 말씀은, 지금은 우리가 지식이 있어도, 아주 보잘 것 없다는 뜻이다.

마치 청동거울로 얼굴을 보듯이 희미하고 뿌옇다.


그러나 천국에 가서는, 하나님이 빛을 비추실 때,

우리가 여기서 평생 터득한 지식도.. 천국에선 단 5분만에 다 깨닫게 될 것이다.


천국에 가면 지식의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전13장에서 거울을 거론하며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지식’보다는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님! 


*관련글 : 신학자 칼 라너가 가장 좋아했던 성구  1)


세상에 왜 무시무시한 전쟁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이 전쟁을 주관하시는가?

왜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불치병이나 사고를 당해 죽는가?

왜 나에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이 일어나는가?


이런 모든 질문은, 천국에 가면 모두 환하게 다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빛이 비추는 곳에는 ‘지식’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기쁘고 아름다운 것만 갖고는 안 된다.

기쁘고 아름다운데 '백치'이면 뭐가 좋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지식'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4. 빛은 ‘드러냄’이다.


빛이 비취면 세미한 먼지까지도 다 보인다.

우리가 빛 되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우리의 속 모습이 다 드러날 것이다.

숨은 생각, 행동, 말까지도 다 그 환한 빛 앞에 밝히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어둠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 믿기를 거부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사랑한 것이니라 요3:19


그런데 빛이 비취면, 어둠과 동시에 아름다움도 드러난다.

우리 크리스천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혀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그와 함께 부활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가면, 우리의 의로움과 아름다움이 ‘빛 앞에서’ 드러날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겉모습만 보고서는 구분이 쉽지 않다. 아직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서는, 성도의 영광이 찬란히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성도가 진정 회개한 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히 지워져 버렸다.

천국에서 백일하에 드러날 것은, 이제 영광스럽게 변화된 ‘성도의 영광’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 육체가 점점 늙어 감을 한탄한다.

그래서 노인일수록 얼굴을 크게 크로즈업 해서 사진 찍는 것을 꺼린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런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로 영원히 살지 않는다.

실례지만, 대머리도 다 젊은 시절의 무성한 머리로 복원될 것이다.


천국에 빛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날 때,

지상에서 성도 속에 숨겨져 있던 그 성도의 영광도

그 날에 환하게 다 밝히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영광을 반사할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는 이런 미래 천국의 영광과 그 밝은 빛을,

기쁨, 아름다움, 지식 들을

지금 이 <현재 천국>에서도 미약하게나마 맛보고, 드러내는 일들이

날마다 계속될 줄 믿는다.


사실 미래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고 기다리며 사는 것이, 지상에서 성도의 삶인데,

그것이 너무 희미하고 뿌옇게만 보이니까

확실하게 보이는 현세적인 것들에 너무 목을 매게 된다.

그런 점을 타개하려면, 앞으로 이런 ‘천국 메시지’가 더욱 계발되어야 할 것이다.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07.06.24. *원제목 : 천국의 소망, 계21:22~27



1) 칼 라너가 좋아했던 요절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꼽으라면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독일의 유명한 예수회 사제 칼 라너 Karl Rahner 1904~1984 신부를 꼽습니다.

이 분의 펜 끝에서 흘러나와 출판된 책은 4천여 종에 달합니다.

또한 이 분의 신학을 다룬다는 제목이 달린 단행본과

정기간행물이 7백여 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분에 대한 연구가 또 하나의 신학 학문이 되고 있습니다.


칼 라너 신부는 평생을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에 대하여 신학 서적을 쓰시고

강단에서도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치신 분이셨습니다.


이 위대한 신학자는 80회 생신인 1984.3.5. 오스트리아 인스부룩에서

친구, 제자들과 더불어 조촐한 생신잔치를 치르고

이튿날 병원에 입원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끝내 나오지 못하시고

1984.3.30. 한 밤중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신부님을 마지막 떠나보내는 인스브룩 예수회 성당의 장례미사 중에는

위대한 신학자가 살아생전 가장 깊이 묵상하며 사랑했던 성경 말씀이

봉독되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13:9~10, 12


그 위대한 신학자 역시 이 같은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만나 뵈옵는다면, 그때에 가서는

모든 신비와 의문점들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펀 글)


[주제별 분류] 종말과 내세 http://blog.daum.net/bible3/11423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