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관계’이다. 요14:6
예수를 믿지만, 주님과 깊은 교제 관계,
예수 안에서 성숙의 단계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 결과 신앙생활이 자꾸 공허해지고, 마음은 계속 매 말라 가는데...
▲뒤늦게 잘못을 깨닫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이 가야할 길을 선택할 때
대부분 그 가치기준을 돈, 명예, 성공에다 둔다.
그러한 길을 선택해가는 세미나 또는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가치 기준에 따라 길을 걸어갈 때,
내적으로 공허와 방황, 인격의 불일치를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표준을 향해 전력투구하며 달려가다가
뒤늦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사, 공무원 등 무슨 특정 직업을 선택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인, 종교인, 농부 등 사람마다 다양한 직업의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내가 어떤 농부로서 살아가느냐?’
‘내가 어떤 경제인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크리스천이면서도 공허한 이유 - ‘관계’가 맺어지지 못했기 때문.
믿음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이 제시하는 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관계에 이르는 것이다.
그 친밀한 교제 관계에 이르지 못하면,
크리스천이 되었더라도, 늘 공허와 허무 속에서 갈등하고 살게 된다.
신비의 영역으로 발을 거의 디뎌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주님과 ‘관계’를 맺는 법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길은... 그 분이 제시하시는 길에 순종해야 한다.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오로지 자신의 계획,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자기에게만 골똘할 때,
예수님과 관계도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도 점점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내 삶의 원형이요, 중심>이 되신다.
그런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질 때,
우리 삶은 점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존재의 중심, 원형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즉,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면,
<내 삶의 원형과 중심>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되며,
그런 자기 가치관이 확고하므로...
어떤 역경과 고난의 풍랑도 견뎌낼 수 있다.
▲나 자신과 멀어지면... 무게중심이 흔들거린다.
어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성공에만 집착해서
밤낮 오직 그 일에만 전력투구하며 살아간다.
그는 꿈에 자주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꿈을 꾼다.
깜짝 놀라서 깨면 등골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흐른다.
그는 견디다 못해 상담가를 찾아가서 자세하게 상담했다.
그 상담가는, “당신은 지금 당신 자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있습니다.
지금 돌이키지 않으면, 당신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재난이 닥칠 것입니다!”
라고 경고했다.
▲삶의 무게중심을 잃고 블랙홀에 빠져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붙잡혀서
블랙홀에 빠져든다.
‘블랙홀’이란, 중력에 의해 천체가 빨려 들어가는 우주의 가상적인 구멍을 뜻한다.
일단 그 소용돌이에 빠져들면 절대 돌이킬 수 없다.
사탄이 우리를 끌어들이는 그 블랙홀은
통제되지 않는 나의 여러 감정들이다.
‘쾌락’이란 감정에 몰입되어 중독 되는 블랙홀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탄이 우리를 ‘미움, 증오’라는 감정적 블랙홀에 몰입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오직 ‘성공, 명예’에 집착하다보면, 그런 블랙홀로 빨려가 파멸되기도 한다.
▲무게중심을 잃은 두 아들
‘돌아온 아들(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하지 (교제 관계) 못하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인데,
오늘도 그런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된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를 동경하는..
오늘도 그런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첫아들에게는 철저히 도덕적이고 완벽한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한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아버지와 함께 아무 교감(관계)이 없는,
그러한 유형에게는 언제나 사탄이 끼어들게 된다.
그리고 '도덕주의'의 미끼를 던지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를 멀리 떠나게 한다...
▲‘관계’로 부르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길은
오로지 ‘콜링, 직업적 소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주님과 동행, 순종의 삶’까지 포함된다.
제가 목사가 되라는 콜링을 받았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제가 목사로 살아오면서,
예수께서 저의 삶 전반에 거쳐서
당신이 보여주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계속 동행하라는 요구를 해 오시고 계신다.
설교를 할 때나,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믿는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재물, 성(性),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
곤고한 가운데 있을 때, 또는 외로울 때,
-삶 전체에 걸쳐서 순간순간-
예수께서 같이 가자고 요구해 오고 계신다는 것을
거듭거듭 분명하게 확인해오고 있다.
▲예수와 교감 없이... 그 길을 갈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길은.. 우리 직업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삶 전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목사가 된 다음에, 야망, 명예, 인기에 도취되어 살아가면서
예수가 인도해 가시는 길, 요구하시는 길을.. 전혀 걷지 않을 수 있다.
예수와의 아무 교감(=친밀한 관계) 없이.. 그 길을 갈수 있다.
평신도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삶 전반에 걸쳐,
‘이 길을 걸으라!’ 하시는 것이다.
-내 삶의 전 영역에서-, 길을 같이 가자고 말씀하신다.
▲얕은 교제관계, 깊은 교제관계
처음에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낯설고,
내가 결정해 놓은 길과 반대 되고, 방해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할 때, 교감 없이 내가 일방적일 수 있다.
‘이렇게 해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
이 길을 가겠으니 대신에 제 무슨 부탁을 들어주세요!’
관계가 맺어 있으나, 영적으로 깊은 관계가 형성되어있지 않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려면, 나 자신을 점점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면 점점 (주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주님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분과 영적교제가 형성되게 된다. (→이 설교문의 주제)
그분이 점점 내 삶의 중심부로 들어오시기 시작한다.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생명의 길’인가?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죄다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길이 진정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길인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의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상 가치관에 의해 집필된 책에 소개되어있는 길을 선택한다.
그런 원리는 세상에서는 성공하는 길은 될지 모르지만,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는 거리가 멀다.
‘길’과 관련해서 문제의 핵심은
‘그 길로 가면 진리와 생명에 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직업인으로서 살면서, 생명과 진리를 접촉해 가는 길로 가고 있는가?
내가 종교인으로 살지만, 진리와 생명에 접근해 가면서 살고 있는가?
혹자는 사업가로 살지만,
사람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참 길에 대한 그리움(종교적 열망)이 있다.
▲참 길(교제 관계)에 들어서게 되면.. 점차 평안이 온다.
정 궤도에 들어섰다는 확신이 든다. 방황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전에 경험 못한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게 된다.
그런 사람은 열린 전망에서 살아간다.
현실에 살지만, 다른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구원의 대로가 있다.
그 길이 좁고 험난한 길이지만, 그 길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이 가야할 참된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신 것도 중요한 일어었지만,
인간이 가야할 참된 길을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몸소 보여주셨다. - 이것은 더 매우 중요하다.
그 분이 존재하신 삶의 전체가... 우리가 가야할 길의 모범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깊이 사귈수록... 참된 인생의 길을 자꾸 보게 된다.
▲‘동행, 교제’의 실제 사례
우리가 현실에 살면서 미움 갈등에 사로잡혀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파괴적인 길로 가려고 할 때,
잠시 조용히 깊은 호흡을 몇 번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의 길을 묵상하면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때 우리 영혼에는 조용한 평강과 기쁨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도 이 길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냥 미움과 증오에서 자기 입장만 성취하고 남을 공격하기 위해서
본성이 원하는 길로 그냥 치닫게 된다.
그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길만 골똘해진다.
그 때 조용히 주님을 묵상하면
주님이 그와 함께 가시기 원하는 길이...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그 길은 나를 부인하고, 그 분의 뜻대로 하는 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이 선택하려고 항상 유혹받는 길은,
언제나 자신을 희생시키고, 자신을 손상시켜서
상대를 자기가 의도하는 길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자기 의도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자기를 자꾸 희생시켜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그래서 자기가 의도한 그 길로 상대가 (미안해서라도) 들어서게 만든다.
그가 평생 가는 길이.. 그런 길이다.
상대방을 그 길로 끌어들이려고 아주 힘들게 수고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거기에 끌어들여 보려고
아주 유아적인 태도로, 유아적인 방법을 취한다.
이런 사람은 더 성숙해져야 한다.
▲크리스천들 대부분이 성숙의 길을 포기해 버린다.
자기의 평안과, 명예와, 안일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하려고만 한다.
거기에는 신앙의 신비라는 것이 없다. 영적 성숙이란 것이 없다.
자기 스타일이, 사고체계가 파괴되니까... 싫어한다.
자기 집(城)만 좋아한다.
달팽이처럼 성숙이 느리게 기어간다.
늘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성숙의 길로 인도해 가신다.
비록 아파도, 그 (성숙의) 길로 가게 만드신다.
그 길을 가는데 장애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이다.
나란 존재는 조금 가다가 주저앉아서
‘근처의 사람이 미워서 못 가겠어요!’ 한다.
그 때 주님이 오셔서 손을 잡고 “예야, 그러지 마, 그 사람 때문이 아냐,
나와 함께 새로운 길을 보아라!” 일으켜 세워 주신다.
그는 조금 가다가 또 기분이 좀 우울해져서 못 가겠다고 응석을 부리면서
털썩 주저앉아 소리를 지른다.
그 때, 주님께서 와서 말씀하신다.
“얘야, 너의 문제는 우울한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우울한 삶을 만들어내는 너에게 있단다.
다시 일어나서 나의 길에 동참하라!”
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세우신다.
▲인생의 참 길은 오직 예수에게만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를 머리로가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 가야한다.
삶의 전 영역에서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 거기에 생명, 거기에 진리가 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방황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 길을 알지만, 자기 것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길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참 말씀인 것을
우리 삶 속에서 확증해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07. 07. 15.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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