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7

801 무엇을 위한 부흥인가?

LNCK 2007. 7. 31. 12:00

◈무엇을 위한 부흥인가?                      행1:1~8                       07.07.22.설교녹취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부흥을 일으키시는 것일까?


우리가 부흥을 사모하기 이전에

‘무엇을 위한 부흥인가?’ 라는 (자기 교회 성장을 위한 부흥인가?)

부흥에 대한 참된 목적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부흥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관심의 충돌 - 제자들의 관심은 세상 나라


세상 나라적인 ‘부흥’을 구하는 제자들

‘내가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시고 내 소원을 들어주신다.’

이것은 크게 틀린 공식은 아니지만, 굉장히 우리를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


또는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지금 모두가 부흥을 염원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이런 심리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나 여러 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부흥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 민족이 이 금수강산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도와주세요!

국민소득이 2만, 5만, 10만 불로 넘어가게 해 주세요!’를 기대하는 심리다.


이것을 우리는 세상 나라를 구하는 부흥의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 나라를 구했던 제자들

여러분,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를 생각해 보시라.

나라는 로마 제국 아래 침탈당하고 있었고, 그 때 메시야란 분이 오셨다.

그 때 제자들의 기대는 어쩌면 당연히 ‘민족 해방’이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 때입니까?’                         행1:6


그러나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니, 너희는 땅 끝까지 복음이나 전파해라!’      행1:8


이렇게 주님과 제자들은 서로 ‘관심의 충돌, 이익의 충돌’을 나타내 보여준다.


5병2어 표적도 마찬가지였다.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군중들은 ‘저 분이 메시야가 맞아!’ 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다.


기사와 표적을 행하실 때는 분명히 메시야 같은데,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 하시는 예수님!

무능해 보이기도 하고, 제자들이 한참 헷갈렸을 것이다. 세례요한까지 그랬다.

‘저 분, 정말 메시야 맞아?’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세상에 그런 허망한 일이 있었을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아무 징조도 없었다.

아무 보탬이 안 되는 그야말로 허울뿐인 메시야였다.


우리는 베드로가 옛날 직업인 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갔다고 비난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끊임없이 일관되게 가르치신 것은,

이스라엘 나라 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엠마오 내려가던 제자들은

‘그 분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분으로 알았었다’고 고백한다.   눅24:21

그 길에서 눈이 열리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제자들은

다시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란 기대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하니                     행1:6


그런데 예수님은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후에도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독립 운동은 눈꼽 만큼도 안 하시고,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1:3

제자들 관점으로는 복창 터지는 일이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으랴?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은 다시 한 번 공개질문을 던진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하니                     행1:6


예수님의 공식적인 대답은 이렇다.

그런 것은 너희가 알 필요조차 없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나 되라!          행1:7~8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만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 하나님의 나라


▲인간적으로 실망될 때도 있다.

성도들은, 자신의 소원을 주님이 들어주신다는 기대가 누구나 있다.

그리고 그런 내 기대를, 하나님이 전혀 들어주지 않으신 적도

이미 여러 번 경험하셨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신중하게 어려운 길을 간 해외단기선교 팀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충돌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빨리 하나님의 관점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도 맞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분이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나를 인도하신다.


▲부흥에 관한 주님의 관점을 가져야!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가 다시 부흥을 달라고 구할 때,

우리는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마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그래, 부흥 주면 뭐 하게?’


사도행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부흥의 목적과 결과를 말해준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이기적 목적(세상 나라)의 성취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근본 목적으로 한다.


▲부흥 후에 도리어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핍박 온다.

여러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 부흥이 임한 후에,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나?


그렇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패턴을 보면,

부흥 다음에는, 부흥의 결과로 (원치 않는) ‘핍박’이 왔다.

교회 지도자들이 목숨의 위협을 당했다.


▲잡혀간 사람들을 위한 기도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잡혀갔을 때, 성도들은

‘주님, 저들을 무조건 석방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도 기도하지 않은 것을 보고, 저는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대신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저들의 위협함을 하감(consider, behold, 주의 깊게 보다)하옵시고

그 위협 때문에 이 복음의 진보가 막히지 않도록,                            행4:29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지도록’ 그렇게 기도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의 파라독스(역설적 진리)이다.


주님, 이제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굽어 살피소서.                행4:29

또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쉬운성경)


아프간에 안타깝게도 피랍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은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준비된 최고의 그릇들을 선택하셨다.)

그 분들을 구출해 달라고 기도함과 아울러

우리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교회가

복음을 더 담대하게 온 세상에 전하는 일이 더 왕성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부흥의 목적 - 복 받음인가, 하나님 나라의 전파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이미 보상(영원한 구원)을 받았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상급은 ‘하나님 자신’이다.


사도행전의 스토리는, ‘하나님 백성이 복을 더 많이 받는 것’에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관심에 신자들이 더 잘 쓰임 받는 데’ 초점이 있다.


스데반이 순교했을 때도, 그 일로 인한 핍박 때문에 성도들이 더 많이 흩어져서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1907년 대부흥의 결과

우리 민족이 1907년에 대부흥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구한말에 우리 민족은 ‘은자의 백성 the hermit nation’ 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은둔적이었다.


그 때 하나님이 부흥을 주셨다.

그 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열강의 침탈의 회오리에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지켜주시리라는 그런 기대를 자연스레 가졌다.

물론 구국기도회도 가졌다.


1907년 당시 10만이던 성도들이 1910년에는 ‘백만 구령 사업’을 목표할 만큼

당시 기독교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1910년에 경술국치(한일합방)를 맞게 된다.


당시 교회는 한국 사회에 뭔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야 했다.

그렇게 예수 잘 믿는다고 으스대더니,

나라꼴은 도리어 최악의 결과를 맞고 말았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서 뭣 하고 계셨던 것인가?


그러나 빗장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던 우리 민족이

한일합방과 신사참배의 고난을 겪으면서

거기에 시달린 백성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흩어졌고,

만주로 흩어진 조선족은, 지금 중국 선교에

연해주로 갔다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지금 중앙아시아 선교에

귀한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


그 외에도 북한의 위협 등으로 전 세계로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는

세계 복음화에 지금 매우 요긴하게 쓰임 받고 있다.


반만년 역사에 한 번도 흩어진 적이 없던 우리 민족이

지난 1백 년 동안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전 세계로 흩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체질과 DNA를 바꾸셨다.


이제 우리 민족은 더 이상 은둔, 수줍음, 조신함의 민족이 아니다.

가장 진취적이고, 가장 코스모폴리탄적인 민족이 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있은 후에도

한국교회는 제주도, 만주, 연해주, 일본으로 선교사를 내보냈다.

한국교회의 최초의 선교운동은 평양대부흥의 결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대부흥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과연 무엇을 위한 부흥인가?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해야 한다면 과연 무엇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더 부흥해야 한다면 과연 무슨 목적 때문인가?


▲로마제국의 이상한 방식의 부흥

기독교를 지난 3백년간 핍박하던 로마제국이

콘스탄틴 황제 때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제정하고, 기독교를 공인한다.

그렇게 핍박하던 시절에도 교회가 크게 부흥했는데,

이제 기독교가 공인되었으니, 로마에 대부흥의 시대가 오리라고 모두 기대했다.


그런데 결과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복음을 받기 전에는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로마제국이

밀라노 칙령이 있은 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아서

반달족, 야만족에 밀린 게르만의 대이동 때 로마가 맥없이 함락되고 만다.


그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뜻밖의 결과를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어떻게 예수 믿는 로마제국이, 저 신앙 없는 야만족에게 당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을 써서 거기에 대한 답을 도출해 주었다.

내용인즉, 로마가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어도,

로마 제국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역 신’이 아니시다.

미국의 하나님도 아니요, 한국의 하나님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백두대간에 거하시며 한반도를 굽어 살피시는 호국신이 아니시다.)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이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어도,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닌 것이다.


당시 로마가 야만족에게 침략을 당하면서

야만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부흥이 일어났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그 결과는 큰 축복이 아니라, 큰 핍박이 일어나면서

그들은 ‘개’로 여기고 접촉을 꺼려했던 사마리아와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갔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가 원하는 축복...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속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신다.

우리가 예수 잘 믿어서, 우리 민족이 복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젠다(시급한 처리현안)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이 되신다.

뭘 더 바라랴?

아브라함아, 나는 네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큰 아들을 책망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너는 나를 가졌거늘, 뭐가 더 아쉬워서 다른 것(송아지)을 바라느냐?

복은, 하나님을 소유한 것 -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님은, 오히려 예수 잘 믿는 우리 성도들을 흩어서라도

세계 복음화를 원하신다.



▲마치는 말 : 무엇을 위한 부흥인가?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YWAM의 로렌 커닝햄 총재는 

한국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여러 모임에 초대되어 가면서

가는 곳마다 ‘부흥, 부흥, 평양 백주년!’ 하니까

그가 한국 교회를 살짝 꼬집었다고 한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부흥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시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인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개인의 부흥이건, 교회의 부흥이건,

‘부흥주면 뭐하게?’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흥’은 사도행전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에너지이다.


맞다. 역사상 참된 부흥 운동은

반드시 세계선교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8세기의 대각성 운동도 개신교 선교운동으로 수렴되었다.


평양 부흥운동은 미국의 무디의 대각성운동의 결과였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당시 미국의 10만 명의 청년들을 ‘학생자발운동’으로 일으켰다.

거기서 자원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왔고,

그들에 의해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가진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분류 없음 > 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리는 강하다  (0) 2007.08.02
802 짐 엘리엇을 다시 생각해 본다  (0) 2007.08.01
800 건강한 자기 사랑  (0) 2007.07.30
799 믿음이란 관계이다  (0) 2007.07.22
796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0) 2007.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