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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7

868 중보기도 안 하면, 손해 보기 쉽다

LNCK 2007. 9. 13. 20:08
 

◈중보기도 안 하면, 손해 보기 쉽다.                       암4:2~3



타인의 약한 부분을 보고, 인간의 본성은 쉽게 그를 비난하게 되는데

만약 그 비난이 합당치 않으면... 그 비난과 저주가 도리어 내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을 위해 중보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적극적으로 나를 스스로 (저주의 부메랑으로부터) 보호하는 길이다...



◑무너진 곳을 비판하는 자



▲축복도/저주도... 내게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축복해야 하는 이유는,

만약 그가 그 복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면... 그 복이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마10:13

이 원리를 바꾸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절대로 남을 저주해서 안 되는 이유는,

만약 그 저주가, 그가 받기에 합당치 못하면...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시109:17

 


▲저주는 반드시 되돌아온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민23:23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할 수 있는 사술이나 복술이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미국) 사탄숭배교에 빠져있던 한 여학생이 예수님께로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어머니는,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딸을 사탄에게 바쳤었습니다.

그러나 회심 후, 그 여학생이 했던 말에 나는 전율했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저주를 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왜냐고 묻자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주를 하면, 그 저주가 우리한테 돌아오기 때문이지요!”


이 말은 발람의 말과 일치합니다.

설사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발했다 해도

그 저주는 발람의 머리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너진 곳을 비판하는 자’가 되기 쉬운데,

그러면 부메랑을 맞아 내가 스스로 무너집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무너진 곳을 막아서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무너진 곳을 막아서는 자


▲아모스의 예언 - ‘무너진 데’ 때문에 망한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암4:2~3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이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하르몬(거름더미)으로 던지우리라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성벽을 보수 재건하지 않은 허술한 곳으로

적이 침공해 들어와서 정복당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의 예언 -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사람이 없구나!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22:30~31


아모스(BC760년경)와 에스겔(BC591년경) 두 선지자의 예언에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성 무너진 데로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에스겔은 <성 무너진 데를 막는 자가 없기에 망한다.>고 했습니다.


계시의 역사성입니다. (참된 계시는 역사적으로 시대를 걸쳐 계속 이어져 내려간다는 뜻)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원칙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내부로부터 무너진다는 뜻

성벽이 한 군데 무너지기 시작하면, 성 전체도 거기서부터 시작해 무너집니다.


성이 무너지는데도 아무도 막지 않는다는 것은

외부 침공 이전에 -내부에서부터- 곪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적 적용으론, 내가 망하는 이유는 결코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새기 시작하는 부분은, 내 내부에 있습니다.)


성이 무너져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을 만큼 죄에 빠져 죄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깨어있는 신자는

성벽이 무너진 데를 찾아서

사람들에게 크게 알리는 파수군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그곳부터 막아서야 합니다.



▲여왕벌의 휴르몬 - 소수의 사람이 틈을 막을 수 있다.

유명한 생물학자인 라이언 왓슨이 쓴 얘기가 생각이 납니다.

이 사람은, 꿀벌 통 안에 벌들이 잔뜩 활동하고 있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체 벌들이 일사분란하게 활동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여왕벌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보통 벌들은, 여왕벌을 전혀 볼 수 없는데

여왕벌로부터 나오는 ‘휴르몬’이라고 하는 화학물질을 받아들이는 벌은

살아서 꿀을 만들고 그렇지 못한 벌은 죽어버립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가 열권의 역사학 연구책을 내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역사는 다 기울어지고 잘못 되었을 때도

그것이 다시 바로 잡혀지고, 또한 거기에서 새롭게 되어진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비록 극소수의 사람일지라도

내면적 영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썼습니다.                     internal spirituality


라이언 왓슨이 말한 여왕벌의 휴르몬=토인비의 내면적 영감=성경의 성령의 영감입니다.

그것을 받은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

역사는 새롭게 되어지고 전진합니다.

이러한 소수자가 바로 무너진 곳을 막아서는 자입니다. 



▲무너진 틈을 막은 소년 한스

네덜란드는 수면보다 낮아, 국토의 대부분이 제방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어린 소년 한스는 하교 길에,

둑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스는 즉시 그곳을 살펴보고, 자기의 작은 손으로 그 곳 구멍을 틀어 막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멍이 점점 커 지며 물이 더 많이 새게 되자,

한스는 자기 옷을 벗어서, 손에 둘둘 말아서 그 구멍을 막았습니다.


그러다가 밤은 깊어가고 한스는 그 자리에서 손으로 구멍을 막은 채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길을 가던 사람들은,

어린 소년 한스가 둑의 터진 구멍을 막고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의 용감한 행동은,

그 지역을 물바다로 망하는 것을 막은

진정 ‘무너진 틈을 막아서는 자’였습니다.




◑관련 글 : 결렬된 틈 사이에 막아 선 -중보기도의- 사람들


죄인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의 틈에 서기 위해서는,

자기는 죄가 없음에도 기꺼이 죄인과 동일시하는 대가를 치를 마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성경 속에는 여러 곳에 걸쳐 이 원칙이 드러나 있다.


▲모세

모세가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기꺼이 큰 대가를 지불하는 모습을 보시라.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다니엘

또한 히브리 청년이었던 다니엘의 중보 역시 좋은 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다니엘이 죄 많은 이스라엘을 위해 기꺼이 결렬된 틈 사이에 섰기에,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느헤미야

의로운 느혜미야는 이렇게 기도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느 1:6).

신실한 제사장 에스라도 결렬된 틈에 서서 하나님 앞과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울며 엎드렸다.


▲사도바울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대신 지옥을 가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결렬된 틈 사이에 서는 중보기도자의 가장 뛰어난 모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1) 우리의 질고를 지고,

(2)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

(3)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4)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5)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결렬된 틈 사이에 서셨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만찬 식탁에서

잔을 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이상 모두 펀 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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