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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 아프간 피랍 사태의 개인적 적용

LNCK 2007. 9. 17. 21:07
 

◈아프간 피랍 사태의 개인적 적용                          왕상19:13



아프간 피랍 사건...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 그것은 내가 이 사건을 계기로 부담감사명감을 느껴야 하는데...



▲인간은 주님의 섭리를 다 모른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참 신비롭다.

아프간에서 23명이 탈레반에게 피랍되었는데,

왜 하나님은, 2명은 순교하게 하시고, 나머지 21명은 풀어주셨을까?


정답은.. “우리는 이유를 모른다!”이다.


사도행전 12장에서 두 사도가 똑같이 옥에 갇혔는데,

왜 사도 베드로는 옥문을 열어서 풀어주시면서                      행12:2, 7

왜 사도 야고보는 칼에 죽임을 당하도록 하셨는지...

우리는 그 주님의 섭리를 모른다.


그러면 야고보는 기도나 충성을 많이 안 해서, 일찍 데려가셨을까?

물론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는 잘 모른다.


특별히 ‘순교’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종종, 에녹처럼, 가장 순결하고 고결한 영혼을 먼저 부르시고 택하신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잘 모른다.”


우리 교회에 똑같은 두 명의 뇌종양 환자들이 기도했는데,

왜 어떤 환자는 기적적으로 낫고,

왜 다른 환자는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시는지... 사람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앞서 소천한 생명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순교의 제물을 필요로 하셨는데,

그가 내 대신 십자가를 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나 대신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남은 사람은 자기 사명감을 투철하게 재확인해야 한다.

뭔가 자기가 아직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기에,

하나님은 (그를 먼저 불러 가셨지만) 자기는 세상에 남긴 것이다.

 

 

▲오늘 우리 모두가 느껴야 하는 부담감, 사명감

이번에 아프간에서 살아남은 21분의 귀하신 형제자매님들은,

왜 두 분은 불러 가셨는데, 왜 하나님은 21분들을 살려주셨는가?


앞서가신 두 분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감-세상에서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을 재확인하고

남은 인생 더 값지게 사시기를 축원 드린다.


사실 이것은, 비단 생환한 21분만 느껴야 하는 부담감은 결코 아니다.

오늘 살아서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느껴야 하는 부담감, 사명감이다.


사실 우리도, 그들처럼 아프간에 갈 수 있었다.

과거에 사실 우리도, 그들처럼 피랍될 수도 있었고, 순교할 수도 있었다.

과거에 다른 나라에서라도 얼마든지 그럴만한 기회와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혹자는 먼저 데려가시고,

왜 우리는 살려주셨는가?


오늘 우리는, 아프간에서 살아나신 21분과 똑같이

먼저 순교하신 고귀한 두 분의 생명에 대한 부담감을 느낌과 동시에

(그가 내 대신 순교했다는 부담감, 

하나님은 지금 순교자가 필요하신데, 그를 나대신 택하신 것이다.)

 

내가 가진 사명감을 뼛속 깊이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시기를 축원 드린다.

(내가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나를 데려가지 않으셨다는 사명감)


이것이 아프간 사태를 바라보는, 오늘 나의 ‘개인적 적용’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부담감을 가지는 선한 크리스천들

오늘날 샘물교회 사건을, 늘 자기 마음에 빚으로 여기며 사는 성도들이 있다.

(반면에 남의 교회 일이라고,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이 사건을 향하여 애타게 기도하고, 눈물까지 흘린다.

그리고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정성껏 헌금으로 샘물교회를 도우는 이들도 있다.

어찌 보면 남의 교회 일이고, 자기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이들이야말로, 21명처럼 ‘살아남은 자’들로서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는 성도들이다.

이분들은 오늘날 영혼이 깨어있어서, 자기의 사명감을 잘 인식하는 분들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

최근 개봉된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데...


결국 여주인공(이요원 분)만 남고, 등장인물들, 그녀의 주변의 사람들은 다 죽는다.

그녀의 아버지, 남자친구, 동네 아저씨들 등.., 출연자들은 거의 다 죽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환상처럼(광주사태가 없었으면 곧 치러졌을)자기 결혼식 장면을 떠올린다.

그 결혼식에 죽었던 사람들이 모두 나타나서

(그 비극이 없었으면 다 살아서 식장에 참석했을 하객들이)

서로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며 신랑신부를 가운데 세우고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모든 죽었던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밝고 웃음이 가득하다.

그들은 정말 ‘화려한 휴가’(영화제목)를 떠난 것인가?

그들의 죽음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한 알의 밀알로 떨어진 정말 값진 것이었다는,

그런 자부심이 그들 마음에 가득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들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반면에 자기 혼자 살아남은 그 여주인공, 부케를 가슴에 안고 있는 그 신부는,

실제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웃음이 넘쳐야 할 결혼식의 주인공인데도,

어째서인지 -혼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감독이 무슨 의도로 그 영화를 만들었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제가 감동을 받은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 마지막 ‘결혼식 사진 찍는 장면’은, 너무나 성경의 종말론적인 그림이었다.

이 땅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다 감당하고

때가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와

그 외 수많은 천상의 성도들은,

지금 천국에서 밝고 환~하게 웃고 즐거워하고 있다. 영화 속 먼저 죽은 하객들처럼


주님이 그 얼굴에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위로를 받으며,

천사들과 함께 지금 천국에서 정결한 신부의 혼인잔치처럼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지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무거운 사명감 때문에,

마음이 힘들고 부담이 되어, 그 신부(이요원 분)처럼, 얼굴이 우울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살아남은 자의 부담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호흡을 연장시켜 주신 것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배형규 목사 등 우리 보다 먼저 가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그 분들은 자기 일을 마치고, 천국에서 환하게 웃으며 잔치에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들에게는 감당해야 할 무거운 사명감과 책임감이 뒤따른다.


또한 그들이 우리 대신,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는, 부담감도 반드시 있다.


그러므로 할 일 많은 이 시대!, 시시하게 살지 않으시기 바란다.

이번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그런 부담감과 사명감을 새롭게 정립하시기 바란다.


▲회복이 있으시기를 바란다.

엘리야에게처럼, 주님은 오늘 내게 물으신다.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있느냐?”                                     왕상19:13


우리는 로뎀나무 아래서, 초라하게 자살충동이나 느끼는 엘리야처럼 되지 말고,

“어찌하여 네가 여기에 있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모두 영적인 회복이 있으시기 바란다.

그래서 자기의 거룩한 사명감과 부담감을 새롭게 회복하게 되시기를 축원 드린다!


<07.09.16. 인터넷 설교 중 발췌

 

[주제별 분류] 시사 관련 http://blog.daum.net/bible3/12690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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