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증에 걸린 신데렐라 계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3:13
아래 설교문은 비판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너진 틈을 막아서는 자’를 위한 자료입니다.
▲멍하게 정신 나간 신데렐라
신학자 마이클 그리피스는, 오늘날의 교회(교인)의 모습을
‘기억상실증에 걸린 신데렐라와 같다’라고 표현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신데렐라] Griffiths, Michael 著
정훈택 書評, 「신학지남」248호, 96년9월 pp.289~293.
그는 자기가 쓴 책에
‘신데렐라가 신발 한 짝을 쳐다보며 멍하게 앉아있는 삽화’를 집어넣었다.
그녀는 자기가 신데렐라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기억상실증 때문이다.
곧 바로 왕비가 되어서, 행복과 영광을 누리게 될 터인데,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서
망연자실해서 자기가 잃어버린 자기 신발 한 짝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영광스런 신부로서 부요함과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또한 장차 그 나라에서 지금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영광과 영원한 행복과 축복을 누릴 터인데,
그 모든 특권들을 망각한 채, 이 현실 세상의 세속적인 삶에 도취되어
또한 세속적 탐욕을 다 가지지 못하여 망연자실한...
자기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인 것을 잊어버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것이다.
▲대장간 조수 우화
어떤 대장장이가 말발굽 주문을 1백 개 받았다.
그런데 마침 급한 볼일이 생겨서, 조수에게 샘플 1개만 주고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말발굽 1백 개를 똑같이 만들어 놓으라고 시켰다.
며칠 후에 대장장이가 자기 볼일을 다 보고 대장간에 돌아와 보니,
조수가 만든 말발굽 1백 개가... 치수가 제각기 모두 달랐다.
“아니, 어떻게 만들었기에 치수가 제각기 다 다르냐?”
“원본 보고 1번 만들고, 1번 보고 2번 만들고, 2번 보고 3번 만들고...”
그 결과 1백 개의 말발굽이 하나도 쓸모없게 되었다.
원본을 보고 1번 만들어내고, 또 원본을 보고 2번을 만들어야 했었다.
그래야 1백 개가 모두 똑같이 나왔을 터인데 말이다.
예수님이 마16장에서 베드로에게,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예수님이 말씀하신 완전한(완전에 가까운) 교회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시절에 세워졌다고 본다.
오늘날 교회들이, 원본(초대교회)을 보고 따라 만들어야 하는데,
만든 것 보고 또 만들고, 그것보고 또 만들고 했다가
나중에는 원본 치수와 엄청나게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주님이 디자인하신 교회가 사도행전에 나온다.
사도들은 교부들에게 그 교회를 물려주었고,
또 후대의 교부들은 또 후대의 제자들에게 그 교회를 물려주었다.
윗사람을 보고 배우고, 또 윗사람을 보고 또 배우고...
이렇게 2천년이 흘러내려왔다.
그 결과 오늘날의 교회 모습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를 수도 있다. (물론 같은 점이 더 많겠지만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만 봐도, 또한 교회의 제도나 사명도,
따지고 보면 초대교회의 모습과 다른 것들도 꽤 있을 것이다.
일례로, 초대교회와 오늘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차이는 ‘핍박’에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그 순간부터, 그는 가문에서 쫓겨난다.
예수를 믿는다는 그 순간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신앙 때문에 순교하고 투옥되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났다.
원형경기장에 야수의 밥이 되기도 했고,
죽을 때까지 지하 탄광촌에서 사슬에 매여 혹사당했다. 죽어야 거기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생명을 걸고 예수를 믿었다.
지금도 유적지에 가보면, 탄광촌 벽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내 영혼은 새처럼 난다!”
비록 그들의 육신은 쇠사슬에 결박당해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새처럼 창공을 훨훨 날았던 것이다.(4차원의 세계로 추정됨)
아무도 그들의 영혼을 결박할 수 없었고, 그들은 붙잡혔지만 자유 했던 것이다.
그들은 더 좋은 부활을 사모했으므로, 기꺼이 순교했다. 히11:35
그들은 당시에 ‘염병’이라고 불렸으며, 행24:5
그 ‘(전)염병’들이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래서 로마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원본(오리지널) 교회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미국에 어디에 사람 많이 모였다더라!’ 하는 모습도 참고해야 되겠지만,
그보다는 원본 교회 모습을 본받는 데에 더욱 치심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온도조절기, 온도계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썼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온도조절기와 같았다.”고 했다.
미국의 각 집에는 온도조절기가 있는데, (오늘날 한국에도 있다.)
온도조절기를 만약에 23도에 맞춰놓으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에어컨과 히터가 자동으로 돌아서
항상 실내온도를 23도에 맞춰준다. 그 센서가 바로 ‘온도조절기’이다.
초대교회 성도가 온도조절기와 같다는 말은,
성도들의 믿음의 온도에 따라, 사회가 따라와서 맞춰졌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절대 영향력을 뜻한다.
당시 사회의 기류와 온도를.. 성도들이 적절히 조절했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킹 목사는
“요즘 교회는, 온도계 역할은 하는데, 온도조절기 역할은 못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사회의 온도가 몇도 인지, 가르쳐 주기는 하는데,
그 기류와 온도를 바꿀만한 능력은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어떻게 이 사회가 살아야 하고, 어떤 길로 가야 한다고 가리켜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움직여 그 길로 나아가게 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킹 목사 사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은 교회와 신자가, 우리 사회의 온도가 몇 도 인지조차
가르쳐 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라고들 말한다.
자동온도조절기의 고장은 물론이요, 온도계 기능마저 상실했다는 얘기다.
믿는 사람이나 세상 사람이나 구분이 안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을 쫓아가면 뭔가 어색해야 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흩어지는 교회」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호켄다이크 박사가 쓴「흩어지는 교회」이다.
그 책 주제는,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교인들을 위해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세상을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교인들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이다.
건강한 교회가 존재한다면, 건강한 세상이 존재해야 한다.
건강하고 좋은 교회가 되어 있다면, 건강하고 좋은 세상이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풍성한 교회는 우리 교인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만약에, 교회는 좋고 교회는 더 건강해지는데,
세상은 더 나빠지고 더 병을 많이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세상이 더 나빠졌다면... 그것은 교회가 더 나빠진 결과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다.
주일날 예배하러 ‘모이는 교회’가 마치면,
우리는 세상으로 흩어져서, ‘흩어지는 교회-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교회가 ‘모이는 교회’가 너무 잘 되어서
2~3년마다 건물을 증축해야 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만약에 썩 잘 감당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결코 만족하고만 있을 일은 아니다.
▲싸움터는 세상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다.
그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가 아니며,
‘너희는 교회의 소금이다, 교회의 빛이다.’도 아니다.
여기서 ‘교회’란 일차적으로 우리 성도 각자를 가리키며,
이차적으로 성도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우리 각자의 미션(사명)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 도시에 가로등 숫자는 점점 늘어가는데
도시는 밤에 점점 더 어두워간다면, 말이 안 된다.
유능한 지도자는,
교회에서 모임을 적게 가지더라도, 가급적 세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인도 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모임을 많이 가지도록 유도하면서, 세상에서 아무 영향력도 발휘 못하게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무능한 지도자가 되는 셈이다.
지금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점점 많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07.09.16.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온도계와 온도조절기 - 개인적 적용
온도계와 같은 인생이 있고,
온도조절기와 같은 인생이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갑니다. 날씨가 더우면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신앙생활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삶의 활기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반면에 온도조절기는 날씨가 추우면, 조절기가 자동으로 온도를 올립니다.
날씨가 더우면 조절기가 자동으로 에어컨을 돌려서 실내온도를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부터 온도를 조절합니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이요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온도계, 주식이 온도계입니다.
주식이 올라가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주식이 뚝 떨어지면 코가 쑥 빠져 다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의 성적이 온도계입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세상 살 맛이 납니다.
그런데 성적이 뚝뚝 떨어지면 만사가 재미가 없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외국에 나가있는 아들이 온도계입니다.
아들이 웃으면서 전화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우울한 전화 한통 받으면 일주일동안 기분 나쁘답니다.
이것이 온도계 인생이지요.
온도계처럼 살면, 환경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는 내가 믿음으로 환경에 영향을 미칩니다. 조절합니다.
환경이 어렵지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조절합니다.
살림이 막다른 골목 같지만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창조적으로 긍정적으로 능동적으로 그 사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삶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온도조절기의 삶이며,
우리는 그 영역을 계속해서 키워나가야 합니다.
놀랍게도 온도계의 영역이 커져 가면.. 온도조절기의 영역이 작아집니다.
온도조절기의 영역이 자꾸 커져 가면.. 온도계의 영역이 작아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풍부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의 생애는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매 맞고 괴로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풍성한 삶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풍성한 삶 - 이것이 희락의 열매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환경을 온도조절기처럼 조절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펀 글)
[주제별 분류] 교회론 http://blog.daum.net/bible3/1279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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