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판단, 타인 판단, 주님의 판단 고전4:1-5
◑나에 대한 내 판단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고전4:3
I don't even trust my own judgment (NLT)
이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판단을 아예 안 하겠다’는 그런 선언이 아닙니다.
판단은 필요한데, 나의 관점에서만 본 나에 대한 판단은 적합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지렛대, 자기 판단의 기준 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할 때
우린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언제나 극단적인 두 개의 경향에 빠집니다.
①하나는 자학입니다.
자학은 지나친 과도한 자기비판의 결과입니다.
스스로에게 엄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사람이 지나친 자기비판을 하게 되고 자학에 빠지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스로 자학하면... 인생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상실하게 됩니다.
다시 재기할 수 없어요. 자존감이 상처를 입고 자신이 무너진 사람들은
인생을 향한 다른 도전이 시작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학은 결코 인생의 어떤 복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②또 하나의 극단적인 자기 판단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지나치게 과도한 자기 사랑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교만에 빠지면, 사람들은 거짓된 자기 허상을 바라보고
자기 실제 모습이 아니라 허상의 자기 이미지를 설정해 놓고
그것이 ‘자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되지도 못하고 된 줄 로’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갈6:3
자기가 굉장히 이상적인 인간인 것처럼 착각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일종의 나르시스적인 자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자기 판단, 그것은 유해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기 판단의 오류, 인간 판단의 주관적 오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바울은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 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고전4:4
내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자책할 어떤 것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의롭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리 스스로 정의롭다고 주장해도
그것으로 내가 의롭다는 마지막 판단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 주관적 판단의 오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관점에서만 나를 판단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타인의 판단’
두 번째로, 바울 사도는 타인의 관점에서 내 인생의 평가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웃의 나를 향한 충고에 귀를 열고 들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충고를 도무지 못 듣는 사람이 있죠? 이 사람은 성숙할 수 없습니다.
잠언에 보면, 아름다운 충고의 축복에 관한 교훈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웃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들을 줄 아는 귀는, 복된 귀입니다.
▲잠언서에 충고를 ‘모사’라고 개역성경에 번역했습니다.
이 ‘모사 counselor’라는 단어가 우리 말 뉘앙스로는 아주 안 좋게 들려요.
'모사'라 그러면 무슨 나쁜 일을 꾸미는 사람처럼 들립니다마는
성경에는 ‘모사 상담자가 많으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내 약점을 알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따뜻하게 내 마음을 열고 나를 세워줄 줄 아는 이런 충고자,
이런 격려자, 이런 모사counselor 친구들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여러분! 이웃의 충고는 필요한 것입니다.
이웃의 객관적 관점에서,
내 인생에 대한 내 사각지대를 진단하고 비판해 줄 때
우리는 겸허히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지 참고 사항일 뿐
내 인생에 대한 마지막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 잘못될 수가 있는 것처럼,
종종 이웃들의 나를 향한 판단도 거기에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한 이웃의 판단, 그것은 결코 마지막 판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판단 할 때도 그래서 참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판단의 악을 경계합니다.
판단 때문에 서로 관계가 깨어지기 쉽습니다.
판단에는 항상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도 심히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비행기 대합실에서 비스켓 착각 일으킨 여자 예화
(전략, 아직 모르시는 분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자기 쇼핑 백을 열어보니까, 웬걸 자기 쿠키가 그 대로 다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성이 자기 것을 놔두고, 신사의 것을 집어 잡수신 겁니다.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그 신사가 다르게 생각이 되더래요.
야, 얼마나 멋있는 신사예요?
자기가 남의 것 집어 먹는 동안에 한 마디 얘기도 않고,
마지막 하나 남은 그 크랙커를 딱 반을 잘라서 먹으라고 줄 수가 있었던 그 여유!
‘야, 진짜 젠틀맨이로구나!’
조금까지의 열 받아서 ‘그 인간이..!’ 하다가
‘야! 역시 참 신사로구나!’
여러분, 사람의 판단이라는 것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달라질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나 쉽게 한 사람에 대한 판단을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비록 나쁘게 평가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을 끝난 것처럼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조금 칭찬했다고 해서 너무 뭐 내가 정상에 도달한 것처럼
그렇게 흥분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시하지는 않지만, 크게 고려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때로 나를 향한 다른 사람의 판단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하는 경향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건강한 미래를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여러분 인생의 판단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판단을 지나치게 의존하지 마십시오.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중요한 마지막 판단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작은 일이라” 고전4:3
...it matters very little what you or anyone else thinks...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무시할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뭐라 그랬습니까? 작은 일이라, 귀담아 듣고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치면 내게 유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에 대한 마지막 선언일 수 없어요.
이웃들이 내 인생에 대한 결정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내 인생은 판단되어야 마땅할까요?
◑주님의 관점으로 자기를 판단하시라!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강조하시는
그리고 바울이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관점을 가지고 내 인생을 판단하자는 것입니다.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고전4:4
내 삶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신 바로 그 분, 나를 창조하신 그 분,
나를 섭리하시는 그 분, 마지막 날 나를 심판하실 그 분,
그 분이야말로 가장 완벽하게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공정하게 나를 판단하실 주님인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판단의 마지막 때를 정확하게 그 분은 정하고 계십니다.
그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그 분이 친히 여러분과 저를 판단하실 것 입니다.
그때는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 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4:5
때가 이르기 전, 그 마지막 판단의 때가 오기 전에
너무 서둘러 내 자신이 자신을 판단하거나
이웃들의 판단을 마지막 판단처럼 수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때에 주께서 친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시고
그리고 내 마음의 속 깊은 뜻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내 행동을 결정하고 행동하게 했던 내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모티브와 동기까지도
다 살피시는 바로 그분, 그분만이 나에 대한 마지막 판단자가 되실 것입니다.
▲칭찬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 때 그분이 그렇게 완벽하게 판단하시는 그날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뭐가 있으리라 그랬어요?
'칭찬이 있으리라!' - 여기 주님의 중요한 의도를 여러분이 읽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주님의 자녀들을 판단하실 때, 그 의도는 처벌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때, 그분의 마지막 의도는 처벌이 아니에요.
우리를 처벌하기 위해서, 내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대한 파괴적인 판단, 파괴적인 비판, 그 정죄,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이미 그 심판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믿으십니까? 요5:24등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주의 백성들에게 3가지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너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다시 말하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3가지 약속을 하셨어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1:7
주님은 우리를 칭찬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고 싶어 하세요.
우리를 존귀케 하고 싶어 하시는 주님,
그래서 그 분은 우리의 삶 속에 (판단보다는) 칭찬할 거리를 찾고 계십니다.
(후략)
▲어떤 여자의 실수 + 착각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어떤 여성이 갈아 탈 비행기를 기다릴 때였다.
여성은 신문과 쿠키 한 봉지를 사들고
빈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쿠키를 집어먹으려 하는데,
갑자기 곁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신문을 내리고 쳐다보니,
어떤 잘 차려 입은 한 신사가 같은 테이블의 옆자리에 앉아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의 쿠키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매우 황당했지만 여자는,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기가 싫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신문을 계속 읽으며 계속 쿠키를 집어먹었다.
하지만 그 남자도 계속해서 쿠키를 집어 먹었다.
여자는 속으로 너무 화가 났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번갈아 먹다가 마지막 쿠키 하나가 남았다.
그러자 남자는 쿠키를 반으로 쪼개더니 반쪽은 여자 쪽에 밀어주고
반쪽은 자기가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는 것이었다.
여자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신문을 내리고 그의 뻔뻔한 뒷모습을 한참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기가 막힌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여자가 비행기에 올라 자기 쇼핑백을 짐칸에 올려놓으려고 할 때,
거기엔 아까 샀던 쿠키 봉지가 그대로 보이는 것 아닌가!
오 마이 갓! 여태 여자는 그 신사의 쿠키를 먹은 것이었다.
이 여자가 겪었을 패러다임의 전환은 정말 극적인 것이었다.
염치없고 뻔뻔하게만 보였던 그 남자는,
낯선 여자가 자기 쿠키를 먹는데도 너그럽게 용인하고
마지막 쿠키까지 반으로 나누어줄 줄 아는 마음 넓고 멋진 신사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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