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딤돌, 걸림돌
◑메시야를 기다렸으나, 정작 오시고 나니...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하박국 이후,
유대 사람들은 메시아 대망사상 Messianic Expectation 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그저 메시야만 오면 다 해결될 줄로 알아서
간절히 기다리는데, 때와 장소, 인물까지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믹5:2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에 따라,
메시아가 동정녀의 몸에 오실 것이라 생각하고 사7:14
베들레헴에는 메시아를 낳아보겠다고
시집 안 가고 기다린 처녀도 수 백 명 많았답니다.
그만큼 동정녀에서 난다는 것과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과
그리고 이때쯤 오시리라는 것까지 다 알고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나라가 망해서 탄식할 때도, 경제적인 빈곤 속에서도 메시아만을 기다렸어요.
그들의 모든 초점은 메시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정작 오셨어요. 오시고 나니 어떻게 합니까?
헤롯왕은 당장 그 아기 예수를 다짜고짜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 자기 보좌를 내놓고 싶지 않으니까요.
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성경만 전문으로 연구하던 사람들 역시
메시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주동이 됩니다.
왜? 현실에 안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기득권과 위치를 내놓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이제 임한다며, 먼저 회개하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있었고, 기대도 있었는데,
정작 메시아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없었습니다.
마음의 회개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돌(기초석)로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 위에 건축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걸림돌stumbling block이 되고 말았습니다.
◑끊임없이 본질을 추구해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학자, 사상가 - 이런 사람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신학자, 사상가는
끊임없이 기독교의 본질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할 본질적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학과 사상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디딤돌 stepping stone 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 stumbling stone이 됩니다.
(이 글에서 모퉁이돌이나 디딤돌은 그 위에 뭣을 세운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서구의 탁월한 신학자, 사상가, 선구자들을 볼 때,
예를 들면 빌 하이벨즈, 릭 워렌, 레노바레, 내촌감상 등 (힐송 포함)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디딤돌로 여겨서 딛고 올라설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걸림돌로 여겨서 비판만 하다가 걸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비판을 하면 그들의 장점을 전혀 못 배울 뿐더러, 내게 성령이 소멸됩니다.
다만 내게 필요한 부분만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면 됩니다.
현대신학의 원천은 1919년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라고 합니다.
현대신학에서도 만약 배울 점이 있으면, 찾아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적 기독교의 본질>을 추구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배척했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되면 안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머리'로서 우상화되면 안 되겠습니다.
혹자는 교회에 유익하면 뭐든지 가리지 않고 수용하면서,
만약에 교회에 해로우면 그것이 진리라도 거부합니다.
▶어떤 분은 신학과 철학과 성경을 연구해서
이론과 학문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추구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기독교의 진리를 실제로 자기 몸으로 실천하고 체험합니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의 본질을 발견하고 전파하는 분도 있습니다. (실천신학자)
성 프랜시스나 마더 테레사, 또한 목회자들은 실천신학자라 볼 수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 양쪽이 모두 필요합니다.
예수님처럼 양쪽을 다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국은 세계 선교의 첨병 사명을 지금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본질적 기독교를 전파해 주어야 합니다.
성공주의, 현세주의, 율법주의, 신비주의, 샤머니즘적 기독교를 전파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시대적 중요한 사명입니다.
◑정채봉선생의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60년대 서울에 올라온 한 시골 청년이 고향 친구에게 편지를 합니다.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일자리를 구하는데 있는 것 같다.
모두가 일자리를 찾느라고 애쓰고 있다.’
70년대 들어와서 이 청년은 다시 고향 친구에게 편지를 합니다.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돈에 있는 것 같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눈에 비친 서울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80년대 들어서 이 청년은 친구에게 다시 편지를 합니다.
‘지금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권력에 있는 것 같다.
권력을 잡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경주한다.
권력이면 모든 일이 다 될 것처럼 생각한 나머지
그 권력을 잡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쓴다.’
90년대 들어와서 다시 편지를 합니다.
‘서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곧 스피드다.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단 1분의 시간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달린다.’
(그래서 성공주의와 자기 계발self development 등이 당시에 유행했습니다.)
60년대부터 각 십년(decade)마다
교회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세상과 비슷하지 않았습니까? <인터넷 설교 참조 편집
[주제별 분류] 기독교 사상 http://blog.daum.net/bible3/13735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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