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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1067 영적인 삶은 훈련으로 가능하다

LNCK 2008. 1. 15. 14:00
 

◈하나님 나라의 삶, 영적인 삶은 가능하다        막10:23        *출처 휘발되고 없음

 

 

『모든 것을 새롭게』 헨리 나우웬, 윤종석 역, 두란노, 

 

 

◑서론 : 하나님 나라의 삶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삶을 살려면 -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은 선물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들어올리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나라로 끌어올림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주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뭔가를 구한다는 것은 간절한 열망뿐 아니라 단호한 결의를 수반합니다.

영적인 삶은 인간의 노력을 요합니다.


우리를 염려 투성이 삶으로 되잡아 당기는 세력을 이겨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못 박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막10:23


또한 우리에게 고된 노력의 필요성을 확실히 보여 주시고자 이런 말씀도 주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그 노력이란 - 다른 말로 훈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삶에서의 훈련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훈련 없는 영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제자의 길에는 훈련이 요구됩니다.


영적 훈련은 우리를 하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더욱 민감하게 해줍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서가 아니라

세미한 소리를 통해서였습니다. 왕상19:9-13


영적 훈련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그 세미한 음성에 더 귀 기울이게 되며,

그 말씀이 들려 올 때 더욱 기꺼이 반응하게 됩니다.

 

▲그 훈련이란 - 음성을 듣는 훈련입니다.

염려로 차고 넘치는 삶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안팎으로 너무나 많은 소음에 둘러싸여 있어

정작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제대로 듣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머거리가 되어,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부르시는지도 모르고

어느 방향으로 부르시는지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어리석은 삶이 되고 맙니다.

 

'어리석다(absurd)'라는 말은 '귀머거리'라는 라틴어 'surdus'에서 왔습니다.

 

영적인 삶에 훈련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말씀하시건만 우리는 좀처럼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듣는 법을 배우면 우리의 삶은 순종하는 삶이 됩니다.

'순종한다(obedient)'라는 말은 '듣는다'는 뜻의 라틴어 단어 'audire'에서 왔습니다.

 

어리석은 삶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번잡한 염려로 가득 찬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를만한 자유로운 내적 공간이 있는 삶으로 서서히 옮겨가기 위해서는

영적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음성을 듣는 귀를 가집시다.

예수님의 삶은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셨고,

언제나 그 음성에 귀 기울이셨으며, 언제나 그 인도에 깨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듣는 귀'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듣는 귀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기도의 참 모습입니다.


모든 기도의 핵심은 사실상 듣는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 순종의 마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훈련’은 우리의 삶 속에

순종이 실행될 수 있는 내면적, 외적 행동을 만들려는 집중된 노력입니다.

영적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들을 여지조차 남지 않을 만큼 우리의 삶을 점령하려는 세상을 막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단계로 올라갑시다.

영적 훈련은 우리로 기도할 자유를 얻게,

더 정확히 말해서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게 합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두 가지 훈련을 소개하려 합니다.

둘 다 기도의 훈련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나는 고독의 훈련이요, 또 하나는 공동체 훈련입니다.


◑1. 고독의 훈련   (중략, 아래에 있음)


◑2. 공동체 훈련   (중략, 아래에 있음)




◑맺음말


▲영적인 삶은 가능합니다.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나는 영적인 삶을,

염려로 가득 찬 실존의 한복판에 찾아오시는 성령의 활발한 임재로 묘사했습니다.


우리의 꽉찬 삶 속에 고독의 훈련과 공동체 훈련을 통하여

서서히 자유로운 내적 공간이 생겨나, 성령의 임재가 분명히 드러나게 될 때

그런 삶은 가능합니다.


▲영적인 삶은 가능한데 - 노력해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염려투성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일로 마음 쓰고 염려하지만

동시에 권태, 적개심, 우울, 심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한가운데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 오사

우리에게 새로운 삶, 성령의 삶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삶을 원하지만,

그런 삶을 바라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 만큼

그것이 여태 익숙했던 삶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각조각 분열된 삶에서 한데 모아진 삶으로,

많은 것에서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으로,

마음이 나뉜 삶에서 성령 안의 일편단심의 삶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를 재창조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노력입니다.

 

▲혼자 또는 공동체로 -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 노력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잘 계획된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하루에 몇 분이라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우리의 많은 관심사 한복판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있으려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내가 두려울 때 매달릴 대상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공간을 만들어 갈 동료 인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잘 계획된 단계, 즉 고독의 훈련과 공동체 훈련이야말로

"그의 나라를 구하는"구체적인 길로서, 염려의 위력을 서서히 와해시켜

우리를 쉬지 않는 기도의 세계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로, 세상 염려를 이기도록 훈련하십시오.

대체로 영적인 삶을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염려를 유발하는 세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임재가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훈련에 성실히 임하다 보면 새로운 굶주림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 새로운 굶주림이 하나님의 임재의 첫 신호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계속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언제나 그 나라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기쁨에 젖어들 것입니다.


..............................................................


◑1. 고독의 훈련

 

고독 없이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독이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 삶 속에 활발하게 임재하고 계심을-치유,

가르침, 인도 등-정녕 믿는 우리라면,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그분께 집중할 시간과 장소를 떼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

 

우리의 삶 속에 고독을 들여오는 것은 매우 필수적이면서도 무척 어려운 훈련입니다.

진정한 고독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으면서도 막상 그 고독한 시간과 장소로 다가가려 하면

모종의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도 책도 텔레비전도 전화도 없이 혼자가 되는 순간,

우리 안에는 내적 혼돈이 펼쳐집니다. 이 혼돈이 너무 산만하고 번잡스러워

다시 바빠지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고 해서 내면의 회의, 불안, 두려움, 나쁜 기억,

풀리지 않은 갈등, 분노의 감정, 충동적 욕구가 그 즉시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방해 세력을 제거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내적 방해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적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외적 방해 세력을 이용하곤 합니다.

그러니 혼자 있기가 어렵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닙니다.

자신의 내적 갈등을 대면하는 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고독의 훈련은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고독이란 집착과 염려의 삶에 대한 자발적 반응이 아닙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은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간의 고독을 신중하게 계획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하루 5-10분이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최대치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하루에 한 시간, 한 주에 한 나절, 한달에 하루, 일 년에 한 주간만큼

마음이 준비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의 양은 기질, 나이, 직업, 생활 방식, 성숙도 등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있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떼어놓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인 삶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시간을 빼앗지 못하게 일정표에 분명히 표시해 놓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놓으면 친구나 이웃이나 학생이나 고객이나 의뢰인이나 환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그 시간에는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서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홀로 시간을 보내는 일에 꾸준히 자신을 드리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민감함이 생겨납니다.

처음 며칠, 몇 주, 혹 몇 달 동안은 말짱 시간 낭비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한 고독의 시간이란 처음에는 마음의 숨은 부분에서 오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요동쳐 나오는 시간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일수도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 작가 한 분은, 고독한 기도의 첫 단계를 오랜 세월 문을 열고 살다가

갑자기 문을 닫기로 한 어떤 남자의 경험에 빗대어 말했습니다.

그 집에 늘 드나들던 객들은 왜 더 이상 못 들어가는지 궁금해 문을 쾅쾅 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고 나서야 이들은 서서히 발길을 끊습니다.


이것은 영적 훈련이 별로 없이 살다가 고독 속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자라면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온갖 잡념이 끊임없이 고개를 쳐듭니다.

그러나 점점 관심을 덜 받는 사이 그런 잡념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춥니다.


분명한 사실은 훈련에는 성실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고독이 우리의 욕망에 너무 어긋나 보여 도망치고 싶은 유혹이 그치지 않습니다.

도망치는 방법 중 하나는 공상에 젖거나 아예 잠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듣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 속에서

계속 훈련에 힘쓰다 보면 점차 하나님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게 됩니다.

고독 속에서 대단한 만족을 경험하지 못할지라도,

고독 없는 하루가 고독 있는 하루보다 덜 '영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압니다.

심지어 이 무용하고 이상한 시간을 고대하기까지 합니다.

고독에 대한 이 열망은 흔히 기도의 첫 신호요, 성령의 임재를 인식하는 첫 징후입니다.

많은 염려에서 자신을 비울 때, 우리는 그간 우리가 절대로 혼자가 아니었으며

성령이 줄곧 우리와 함께 계셨음을 머리로뿐 아니라 가슴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로마서에 기록한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고독 속에서,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던 성령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독 속에서 만나는 고통과 환난은 소망의 길이 됩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환난이 끝난 뒤에 일어날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한복판에 임하시는 치유하는 성령의 실제적 임재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의 훈련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 소망의 임재를 서서히 느낄 수 있게 해주며,

해 하늘과 새 땅에 속한 기쁨과 평안의 첫 열매를 지금부터 맛볼 수 있게 해줍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고독의 훈련은 기도의 삶을 키워 감에 있어

매우 위력 있는 훈련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직업과 염려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케 되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음성을 비로소 듣게 하는 단순하면서도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이제 고독의 훈련을 실천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려 합니다.

고독의 훈련을 위해 방이나 방의 한 구석을 따로 정해 두면 아주 유익합니다.

 

이런 '준비된'장소가 있으면 따로 시간 들여 준비할 것 없이 그의 나라를 구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이런 장소를 구별하여 간단히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독의 장소를 단순하게 그리고 지저분하지 않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극적인 것을 읽는다든지, 재미있는 생각을 한다든지, 특이한 경험을 하는 등

뭔가 유용한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우리가 받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독의 순간이란 아무것도 과시하거나 입증하거나 옹호할 것 없이

벌거벗은 몸, 빈손, 연약하고 쓸모없는 모습 그대로

우리 주님의 임재 안에 있고 싶은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법을 서서히 배워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많은 잡념은 어찌할 것인가? 그런 잡념과 맞서 싸우면서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음성에 더 민감해지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그것은 기도에 이르는 길이 아닌 듯싶습니다.


모든 에너지를 잡념과 싸우는데 쏟아 부으면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직접적인 방법으로 잡념과 싸우다 보면 

결국은 필요 이상으로 잡념 자체에 더 주의를 쏟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땅히 주의를 쏟아야 할 성경말씀들이 있습니다.

 

시편, 비유, 성경 기사, 예수님의 말씀, 바울이나 베드로나 야고보나 유다나 요한의 말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주의를 하나님의 임재에 고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많은 다른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박탈해 버립니다.

 

성경 말씀을 고독의 중심에 놓으면 그 말씀이-짧은 표현이든 문장 몇 개이든 긴 본문이든-

우리가 딴 방향으로 빗나갈 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준점 역할을 합니다.

그 말씀들은 풍랑 이는 바다에서 안전하게 닻을 내릴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 고요히  거하는 이 시간의 말미에 가서 우리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모든 사람

들을-친구는 물론 적까지-중보 기도를 통해 그분의 치유의 임재 안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칠 때는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로 맺으면 어떨까요?

 

이것은 고독의 훈련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형태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들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자연 속을 걷는 것, 주기도문 같은 짤막한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 간단한 찬송을 부르는 것,

특정한 동작이나 자세를 취하는 것, 그 밖에 많은 요소들이 고독의 훈련에

유익한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떤 형태의 훈련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으며 성실하게 따를 수 있는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가끔 큰맘 먹고 한 시간씩 고독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매일 10분씩 연습하는 것이 낫습니다.

다양한 자세를 계속 실험하기보다는 한 가지 자세에 익숙해지는 것이 낫습니다.

자신의 길을 찾는 데는 단순성과 규칙적인 것이 최선의 지침입니다.

 

그럴 때 고독의 훈련은 먹는 것과 자는 것처럼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삶의 일부가 되면 우리의 번잡한 염려가 점차 지배력을 상실하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서서히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됩니다.

 

고독의 훈련에는 따로 구별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우리 심령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고요한 골방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훈련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주하고 활동적인 삶의 한복판에서도 그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시공의 고독이 심령의 고독이 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그 고독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적인 삶을 살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독의 훈련은 우리로 세상 속에서 적극적인 삶을 살면서도

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르게 해줍니다.

 

 

◑공동체의 훈련

 

고독의 훈련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 훈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 훈련이란, 사람들 사이에 함께 진정한 순종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롭고 빈 공간을 만들려는 노력입니다.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서로에게 매달리는 오류를 피하고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음성을 들을 공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훈련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훈련 없는 공동체는 새 생명을 받아 풍성함에 이르게 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안전하고 익숙하고 배타적인 장소를 더 많이 지칭하는 '알맹이 없는' 단어가 되고 맙니다.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려는 곳일수록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고금의 다양한 형태의 공동생활에만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우정, 결혼, 가정의 상호 지지관계에도 똑같이 필수적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공간을 만들려면

서로 상대방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끊임없이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독의 중심에서 생명의 성령을 알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의 참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똑같은 생명의 성령이 동료 인간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음을

또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거꾸로, 생명의 성령이 더불어 사는 삶의 원천임을 인식한 사람일수록

고독 속에서도 더 준비된 자세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정, 결혼, 가정, 종교 생활, 기타 모든 형태의 공동체는 고독과 고독의 인사요,

영혼과 영혼의 대화이며 심령과 심령의 부름입니다.

그것은 삶을 함께 나누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감사로 인정하는 것이며,

성령의 재창조하는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훈훈한 공간을 기쁨으로 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형태의 더불어 사는 삶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를 서로에게 보여 주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간 상호 일치성과는 거의 무관합니다.

교육배경, 심리상태, 사회신분 따위의 유사성은 사람을 한데 모아 놓을 수는 있으나

결코 공동체의 기반은 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기반은 사람끼리 서로 끌리는 매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함께 나란히 부르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기들 이익을 보호하고 자기들 지위를 옹호하고 자기들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결성된 단체가 많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아닙니다.

이런 단체는 현실의 혹은 가상의 침입 세력에 대비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문을 꼭꼭 걸어 잠급니다.

 

정확히 말해서, 공동체의 신비는 아무리 제각각 다른 사람들일지라도

모든 사람을 다 품어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하늘 아버지의 아들딸로 함께  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 공동체 훈련의 구체적인 형태를 한 가지 소개하고 싶습니다.

함께 듣는 연습입니다.

말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을 대개 말하는 데 소비합니다.


경험을 나누고 흥미로운 주제를 토론하고 시사문제에 일가견을 표할 때

우리는 가장 편안함을 느낍니다.

아주 열심히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발견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란 것이 문보다는 벽으로,

가까워지기보다는 멀어지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종종 깨닫습니다.

서로 경쟁하고 있는(때로 본심과는 정반대로)우리 자신을 보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야말로 남의관심을 끌 가치가 있으며 남한테 보여 줄 특별한 것이 있다며

서로 그것을 입증해 보이려 합니다.

 

공동체 훈련은 그런 우리에게 함께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훈련된 침묵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침묵이 아니라,

우리를 나란히 부르신 주님에게로 함께 시선을 모으는 침묵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인간이 만들어 낸 정체(identity)에

초조히 매달리는 자들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께 아주 친밀하고 독특한 사랑을 입은 자들로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를 공동의 침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고독의 훈련과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일 때가 많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성경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으로 각기 다른 곳에서 와 이렇게 함께 있습니다.

이렇게 상이한 사람들이 똑같은 말씀을 함께 들을 때

우리 안에는 공동의 열린 마음과 연약함이 싹트게 되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 말씀 안에서 함께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참 정체를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부름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으며,

그렇게 우리는 함께 부름받는 다는것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으며,

그렇게 우리는 내가 고독 속에서 만난 그 주님이

언어와 교파와 성격을 초월하여 이웃들의 고독 속에서도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는 중에 진정한 창조적 침묵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 침묵은 하나님의 자상하신 임재로 가득 찬 침묵입니다.

 

이렇듯 말씀을 함께 들을 때 우리는 경쟁과 라이벌 의식에서 벗어나

같은 사랑의 하나님의 아들딸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 및 서로의 형제자매로 우리의 참 정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공동체 훈련의 많은 형태 중 한 예일 뿐입니다.

함께 축하하는 것, 함께 일하는 것, 함께 노는 것,

이 모두가 공동체 훈련을 실천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 형태야 어떤 것이든 공동체 훈련은

언제나 우리로 인종, 성별, 국적, 성격, 나이의 벽을 뛰어 넘게 하며,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 앞에서 우리의 참 존재를 보게 해줍니다.

 

공동체 훈련은 우리로 사람이 되게 해줍니다. 우리 힘으로 깨달을 수 없는 

크고 깊고 풍성한 진리, 아름다움, 사랑의 소리를 서로에게 전해 주는

통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사람 personare 이란 말은 '소리를 통과시킨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우리 삶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를

서로에게 끊임없이 새롭게 보여 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훈련은 진정한 기도 훈련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성령의 임재에 깨어 있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시며

그렇게 우리 공동생활의  중심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란 함께 실천하는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따르려는 나 개인을 어디로 인도하실까?"

단순히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욱 근본적이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하나의 공동체인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따를진대, 우리는 함께 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한 함께 창의적 반응을 모색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와 행동이 진정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공동체로서 하는 모든 행동은 우리 가운데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반응일 때에만 진정한 순종의 행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공동체도 고독과 마찬가지로

우선적으로 심령의 자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한 장소에 있어 보지 않고는 공동체를 결코 배울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동체란  반드시 육체적으로 같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으로는 혼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유로이 행동하고 정직하게 말하고 고난을 참아 낼 수 있음은

서로 시공으로 갈라져 있을 때조차도  사랑의 친밀한 끈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나라와 대륙의 경계만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골까지도 뛰어넘습니다.

먼 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의식은 물론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통해서도

우리는 치유와 지원과 인도의 공동체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공동체 내의 하나님의 공간은 모든 시공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공동체 훈련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성령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설사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도 어디든 가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오순절 체험입니다.

두려운 속에 함께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자

그들은 밀폐된 방에서 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두려움 속에 모여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뒤에는 자유인의 공동체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떨어져 있는 중에도 서로 연합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공동체로 묶어 주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성령일 때,

시간과 공간의 거리는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고독의 훈련을 통해 우리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공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동체 훈련을 통해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 안의 공간과 우리 가운데의 공간은 결국 같은 공간이기 때문에

이 두 훈련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곳은 바로 그 신성한 공간입니다.

기도란 무엇보다도 우리의 개인 및 공동체 생활에 성령이 활발하게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고독의 훈련과 공동체 훈련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많은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천천히 부드럽게 그러나 꾸준히,

하나님은 어쩌다 한 번씩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말씀하십니다.

밤낮으로, 일하는 중에나 노는 중에도,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성령은 우리 안에 임재하사

일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임재가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 속에 실체로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고독과 공동체는 성령의 임재에 귀 기울이고,

거기에 두려움 없이 후하게 반응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드는 훈련입니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공동체의 삶 속에서도 듣게 될 것입니다.

동료 인간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면 그분과 단둘이 있을 때에도 듣게 될 것입니다.

 

고독 속에서든 공동체 속에서든, 홀로 있을 때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든,

우리의 소명은 순종의 삶,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라 함은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또한 우리 가운데서 쉬지 않고 하시는 성령의 기도에 우리가 늘 깨어 있는 까닭입니다.


[주제별 분류] 제자 훈련 http://blog.daum.net/bible3/13800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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