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9jDF75JsEaI&feature=youtu.be
◈본질적 기독교인의 삶이란? 이사야53:10 *출처 휘발, 김성수 목사 설교녹취
약 10번을 반복적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저도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을 많이 모르고 있었군요...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른 말로, 성도의 본래 인생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그 답으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큰 건물 짓거나, 큰 업적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모호한 것 같은 이 개념을, 오늘 한 번 자세히 살펴보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드러내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즉 사랑, 온유, 화평 절제 겸손과 오래 참음 등을 세상에 보여주면서
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백성은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하였나니... 이사야43:7
여러분, 우리 인간이 창조된 목적을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빛을 발하고, 내 영광을 나타내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내가 창조된 목적이다.
그래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상 백성들이
나 같은 성도들을 보면서=나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요15:8
- 과실을 많이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삶 속에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것이 우리 창조, 존재 목적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 내 착한 행실은, 하나님의 성품이 나를 통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가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나 세상에서, 자꾸 내가 드러나면 망하는 것이다.
나는 질그릇이고, 그 안에 있는 보배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 본능적 생각에는 <내가 드러나야 하고,
내가 드러나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근본부터 잘못된 개념이다.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다.
기독교는 다른 세상 종교들처럼
나의 힘과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절대자를 의지하는 그런 종교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9~10
◑‘약하다’ 개념의 올바른 이해
‘약하다’는 - 가난하고 힘없고 능력 없는, 세상적 기준의 약함이 아니다.
내가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진 힘이 크건 적건 간에, 내 힘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는 것 - 그것이 ‘약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힘’도 일차적으로 인격적인 힘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뜻한다.
정리하면, 힘이 많건 적건 간에 자기 힘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의 능력을 동원하니 - 자기는 ‘약한’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 내 힘을 쓰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그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것이 - ‘약한 자’의 삶이다.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내가 나를 죽이고, 나의 힘을 죽이고
나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 약하다는 의미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성품
내가 나의 힘과 능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오는 힘과 능력으로 살기 때문에
- 세상 사람들이 보면, 약하게 보이는 것이다.
절대 자기 힘과 능력을 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하지 말아야!
그런데 오늘 크리스천들이 거의 모두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남부럽지 않는, 남에게 뒤쳐지지 않는 “강한 힘”이다.
“예수 믿으면 이렇게 강해지는 거야! 까불면 혼 내 줄 거야!”
이런 강함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한다.
내가 물리적 힘을 발휘해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일을 도와드릴 테니까, 제 소유를 좀 많게 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한번 멋지게 헌신하겠습니다. 제가 거하게 한 번 쏘겠습니다!’
그런 흥정인지, 호소인지, 탄원인지 그런 식의 기도를 드린다.
절대 아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여러분의 성품과 인격의 문제를 다루지,
물리적인 힘과 소유의 문제가 일차적 주제가 아니다.
(우리 눈과 마음이 자꾸 성경의 그런 면을 중점적으로 보기 때문에 기독교를 오해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힘을 드러내려 하면 안 된다.
도리어 이 땅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나의 삶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니까
‘아버지께서 돌봐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기본자세이다.
그런데 자꾸 “주여 (물리적 힘과 재력을) 주시옵소서!” 하면 안 된다.
주님은,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다.
실제로 조그만 유치원 아이가 되라는 것인가?
(아니다. 유치원 아이들도 본질적으로 전적 타락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주님의 속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어린아이처럼 살아라는 것이다.
▲신앙은 강한 힘으로 살지 않고, 반대로 항복하며 산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살았다. 렘1:5 참조
솔로몬도 그렇게 고백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3:7
‘하나님 나를 좀 도와주시면
제가 섭섭지 않게 할께요!’
그런 식으로 기도하면서, 자기가 자꾸 강해지려고 하면 안 된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는가?
너희가 수효가 적은 연고로 택하셨다. 신7:7
하나님이 들어서 쓰시는 사람이나 민족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스스로 약해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힘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에, 시퍼렇게 살아서 펄펄 뛰던 나를 하나님께 항복시키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항복한 선지자들의 예
*호세아 선지자의 예, 중략
*이사야 선지자의 예, 중략 (인터넷에서 직접 들으세요)
*예레미야는 명절에 수 십 만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예루살렘 성전 앞에 가서,
‘너희는 여기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라는 말을 믿지 말라’고 전했다.
이것은 거기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에게 짱돌 맞을 일이다.
만약 여러분이 미국의 어떤 큰 교회 앞에 가서
“여러분들은 예수 지금 잘못 믿고 있습니다. 똑바로 믿으세요!”
이렇게 외친다면, 나는 그런 자신 없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맞아죽을 각오하고 그렇게 했다.
▲가치관이 달라져야 한다.
신앙은 내가 소유한 지식이나 물질, 지위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내 소유가 많건 적건 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그것을 비워내고 항복하고 나가는 것이다.
그럼, 많이 가진 자가 비우기 쉽겠는가, 적게 가진 자가 비우기 쉽겠는가?
우리가 복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은
세상이 정의한 가치관과는 정반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이 추구하다가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
그런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고, 힘들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맡기는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우리를 죽이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흘러나오는 삶을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이 전해지는 것이다.
▲힘이 아니라, 자기 비움이다.
그래서 식민주의, 힘에 의해 전파된 복음은 - 전부 실패작으로 끝났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힘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에 완벽한 모델이 되신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해서 살다가 가셨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가 시키시는 말만 하셨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했다고 고백하셨다.
그러고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자기를 비우며 살았으므로
‘나를 본 받아라’고 자신 있게 가르쳤다.
◑ ‘고난’의 참된 목적
이런 생각 해 보셨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시려고 오셨으면, 그냥 쉽게 죽으시면 되지,
뭐 하러 꼭 그렇게 비참하게 무시당하시고, 수난 당하셔야 했나?
십자가만 지셨으면... 좀 더 편하지 않으셨을까?
왜 공생애 3년 동안 배반, 수모, 고난 이런 것까지 비참하게 당하셨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 우리가 이 땅에서 수난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고난을 통과해야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이루어진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2: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5:8
이 구절들을 언뜻 보면, <주님은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잘 이해해야 한다. 보통 오해하기 쉽다.
전에 뭔가 부족한 분이셨는데,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셨다는 뜻은 옳지 않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온전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고난과 수난을 통과해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시키신 일, 그 사역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고난을 통해서!
그러니까 고난과 수난은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신 뜻이고,
그것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정하신 뜻이란? (아래에 계속 설명)
▲고난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기회다.
예수님은, 자기를 돌로 치려는 자들을 향하여
사랑과 용서와 인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셨다.
자기를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던 사람도... 품어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으로 원수들을 대한 것이... 바로 고난이었다.
우리가 워낙 물질주의, 성공주의, 쾌락주의에 빠진 세상을 살다 보니까
고난 하면 - 사업이 망하고, 가난해지고, 이런 것으로 이해하는데...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이란,
내가 정말 힘이 있고, 내 성질대로라면 저걸 확 밟을 수 있는데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하는 자로서 그것을 참고,
도리어 그런 수욕의 고난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다> 이다.
▲고난을 통해 ...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더니
다른 말로 ‘고난을 당하셨더니’
위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증거 한다.
즉,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계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세상에 살면서 입술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순교로 비참하게 죽었더니
남은 자들이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했다. 계11:13
이 구절도 빌2:11절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두 증인의 순교의 고난을 허락하셨고, 예수님도 그런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신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전도, 구원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다가 가셨더니,
‘많은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더라’고 했다. 빌2:5~11
성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도 그 자리로 부르신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인 것이다.
즉,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에 가기 전에 벌써, 이런 삶을 연습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는 - 율법주의, 윤리도덕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이 반드시 자기 삶에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 당위성이다.
즉 나의 고난(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나게 되는 역사다.
▲내 고난의 의미를 깨달으시라!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이 고난을 통해, 누군가가 지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나중에는, 여러분이 당하는 그 고난의 삶을 통하여
여러분이 용서하고, 인내하고, 참고 하는 그런 고난의 삶을 보면서
지금 누군가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고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고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지도록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
▲제 친구 중에 봉수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20살에 온 몸에 관절이 다 썩고, 거기에 욕창이 나는 희귀한 질병에 걸렸다.
여름에는 거기서 진물이 나온다.
나는 그를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살지?’
그는 말했다.
‘나에게 이런 삶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러므로 내가 또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 있어!’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그의 모습을 보고, 나와 다른 이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이 짧은 삶 속에서, 우리가 맡은 역할은 다 다르다.
그러나 자기 역할을 감당해 내는 중에,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는 것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더라는 것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7나팔 등의 ‘재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불신자들에게는 정말 재앙이요, 심판이지만,
성도들에게 그것은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어내고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당시에 성도들이 걸핏하면 끌려가서 사자에게 밥이 되고,
그렇게 극심한 핍박을 당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속으로 드문드문 하나님을 원망했겠는가?
그들이 얼마나 자기 신앙에 대해 드문드문 회의적이었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말려주지 않으셨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도록 놔두셨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록을 쓰면서 이런 메시지를 전해 준다.
‘아냐, 너희들은 지금 잘 가고 있는 거야!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다가 가셨잖아!
그러니까 힘을 내, 그게 맞는 거야!’
너희들(두 증인)은 큰 성 길가에서 죽임을 당하지만, 계11:8
그것은 결국 승리하는 길이란다.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계11:13
그러면서 동시에 천상에 완성된 그들의 모습을, 계시록 중간에 간간히 보여준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이다.
▲고난은... 여호와의 뜻을 성취한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53:1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그 수난의 삶을 주셨다고 한다. 사53:10
왜 주셨는가?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상함과 고난과 찔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증거다.
오늘도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런 수난과 고난의 삶을 주신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우리가 거룩해져야 그 나라는 완성된다는 뜻이다.
거룩하다는 뜻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자꾸 나타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성도는 고난을 통해, 더 거룩해진다.
그러니까 모든 주제가 한 가지로 귀결된다.
성도의 존재 목적=하나님께 영광=하나님의 뜻=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드러냄
=성도의 거룩함=고난을 주신 목적=죄인들이 돌아옴
우리가 대단히 잘 나가게 되고, 큰 교회당 짓고,
크게 뭘 해내는 것이 (기독교의 일차적, 근본 목표가 결코) 아니다.
◑꼴찌로 나셔서, 꼴찌로 사시다가, 꼴찌로 죽으신 예수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힘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상에는 나라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개인 사이에도 권력 다툼이 계속 된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은 마구간에 나셨다. 꼴찌로 나셨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거창하게 아니라, 사회에서 꼴찌로 사셨다.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회에서 가장 약한 꼴찌로 죽으신 것이다.
꼴찌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힘의 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평화의 논리를 직접 보여 주셨다.
약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고,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시는 삶이었다. (후략)
[주제별 분류] 복음 관련 http://blog.daum.net/bible3/13734913
*출처 : http://www.newvisionchurch.org/g4/bbs/board.php?bo_table=junior_public&wr_id=34
페이지의 맨 아래 오디오 “너희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녹취, 편집. (지금 휘발되고 없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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