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인 시대
◑변화하는 결혼관
오늘날 현대 젊은이들의 결혼관이 변하고 있다.
최근 뉴스위크지에 보도된 기사의 제목도
“사랑은 괜찮지만, 결혼은 안 돼!”이다.
Yes to Love, No to Marriage http://www.newsweek.com/id/84538/page/1
사람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 중 첫째는
<한 사람(배우자)에게만 헌신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결혼 하고 사나, 안 하고 사나(동거로 사나)
이혼하기는 매 마찬가지라는 부정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다.
▶뉴스위크에 나온 42세의 어느 미국 여성은
자신이 제프라는 남자와 살지만, 결혼식은 올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래에 한국판 뉴스위크 기사 요약)
결혼이라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마흔 두 살이 되도록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
지적이고 창조적이며 사려 깊은 남자 제프를 만난 일은 내 인생에 큰 행운이었다.
이제 독신자 전용 바를 전전하거나
(과거에) 잃어버린 사랑에 얽매여 세월을 허송하는 일 따위는 필요 없어졌다.
지난해 제프는 나에게 청혼했고, 그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동반자로서 함께 꿈을 추구하며 인생의 힘든 일들을 함께 하기로 (동거)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발행하는 종이조각(혼인증명서)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함께 맹세해야, 사랑이 도덕적으로 인정받는다고 말하는
종교(기독교)의 가르침을, 나는 믿지 않는다.
아름다운 신부가 되려고 흰 드레스를 입을 필요도 없고,
순결한 신부인 척 행세할 필요도 없다.
또 제프의 멋진 프러포즈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남들에게, 내가 임자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매일 확인시켜 줄
반지도 낄 필요도 없다.
나는 제프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여자’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 둘만 있을 때, 날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기를 원한다.
결혼한 친구들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생활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결혼이 싫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정식 결혼식이 아닌, 자기들끼리 언약식을 올리는데,
그러다보니 이제 언약식마저도 점점 무가치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런 형식이 관계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데 전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높은 이혼율이 말해준다. (그래서 그런 형식이 더욱 싫다.)
나는 제프의 동반자이자 친구이며 연인이다. 그는 내게 그런 존재다.
‘남편’과 ‘아내’라는 말로는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주위 여러 사람들의 권고로) 7월 중에 그 중요한 행사(언약식)를 열기로 했다.
비록 결혼식은 아니지만, 가족과 친지들이 참석해주기 바란다.
▶이 기사에 관한 어느 미국 목사님의 비평
위 사람의 문제점은, 모든 것을 ‘내가’ 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내가’ 결혼을 원치 않고,
‘내가’ 결혼증명서도 필요치 않고,
‘내가’ 흰 드레스도 별로라고 생각하고,
‘내가’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판단의 근거에 ‘내가’ 버티고 있다.
그 목사님은 ‘나’대신, ‘우리’를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세상에는 ‘내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라는 틀 속에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절대 ‘우리’라는 틀 속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내가’로 살면 당장은 행복할 것 같지만,
평생 자기 혼자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세상은 대부분 ‘우리’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바이블 스탠다드(성경적 삶의 표준)를 버리면 안 된다.
‘내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항상 생각해야 한다...
◑변화하는 신앙관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에 ‘내가’로 믿는 신앙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만, ‘자기 방식으로’ 믿고,
모든 선악의 판단, 신앙생활 양식의 판단을 ‘내가’ 내린다.
결국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나-주의 Meism’ 라는 말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거대한 시대사조로서, 무조건 비판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다.
예를 들면, 아무리 팝 뮤직이 나쁘다고 떠들고 비판해도
사람들은 팝 뮤직을 계속 듣는다. 그 흐름은 점점 더 늘어간다.
과거에 찬송가에서 → 복음성가로 변화되었듯이
그래서 오늘날 복음성가도 → 힐송(팝) 스타일로 점점 바뀌고 있다. 세계적 추세다.
사실 오늘 대부분의 교회에서 전자기타와 드럼을 쓰지 않는가!
그러니까 ‘나-주의 Meism’로 바뀌는 시대를 바라보며, 비판, 개탄만 하지 말고,
기독교 신앙 형태도 그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방식도 필요하리라 본다.
무조건 내 옷 사이즈에 맞추라고 요구하기보다는,
내가 상대방의 사이즈에 맞춰주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비판만 하지 말고,
‘다음 세대, 미래의 현대인’들이 기독교 본질을 추구할 수 있는
기독교 자체적 변화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앞으로의 숙제)
[주제별 분류] 기독교 사상 http://blog.daum.net/bible3/1386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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