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 심 눅12:13-21
◑탐심은 부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문제
▲억울한 동생의 하소연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더불어 나누게 하소서 눅12:13
아마도 형이, 유산의 동생 몫까지도 자기가 착복해 버린 것 같아요.
율법에 의하면 장남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갑절을 가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두 형제라면, 형에게 2/3가 가고, 동생에게 1/3이 가는 것이 합당했을 텐데,
아마도 형이 1/3마저 가로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동생이 갑자기 무리 중에서 튀어나와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심한 대답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12:14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접근해서,
‘예수께서 공정한 분배에 대한 관심이 없으셨다’ 든지,
혹은 ‘정의에 대한 무관심’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도 예수님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접근하십니다.
즉, 탐심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계속 살펴봅시다.
▲동생도, 형과 마찬가지로 탐심이 있었다.
물론 이 형에게 문제가 많죠.
그러나 이런 문제로 예수께 나와 탄원하는 그 동생,
예수님은 그 형에 못지않은 동생의 마음속에 밑바탕에 깔려 있는
형과 동일한 어떤 문제(탐심)를 보신 거예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기 것을 달라고 요구 하는 동생의 마음속에도
꼭 같이 자리 잡고 있는 탐심이라는 그 문제의 뿌리를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12:15
(온갖 욕심을 경계하고 주의하여라! - 쉬운성경)
▲가난한 사람에게도 탐심이 있다.
탐심의 죄악을 말하면, 우리는 얼른 부자들의 죄악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탐심은 부자들의 문제만은 아니지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에도
꼭 같이 탐심이라는 죄악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형을 고소하는 동생처럼 말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12:15
여기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생명’은 ‘목숨’이 아닙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행복한 인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16절 이하에서,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탐심'이라는 죄악의 정체를 규명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 탐심이란 자기중심적인 죄악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12:16~18
▲자기중심적인 부자
자, 이 짤막한 부자의 독백 가운데,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단어가 하나 있었죠?
“내가”라는 단어예요.
여기서 우리는 이 어리석은 부자의 의식 속에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세계가 자리잡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자기를 위한다든지, 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든지
자기를 존귀히 여긴다든지... 그 자체를 우리가 정죄할 필요는 없어요.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 위해서는 안 돼!
자기를 위하는 것은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하는 것, 이것은 죄악이에요.
이때부터 우리는 탐심이라는 늪 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탐심의 지배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는 치유하기 어려운 병적인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컨트롤 할 수 없어요.
이젠 질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것을 자기 손에 쥐기 위해,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탐심은 이웃을 향해서 문을 닫아버리게 만든다.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부자의 독백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부자의 독백 가운데 이웃이 고려된 흔적이 있습니까?
이웃이 언급된 적이 있나요?
이 부자의 세계, 그것은 ‘네가 없는 나만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세계적 명저를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당신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는 거예요.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의미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이 어리석은 부자,
이 부자도 나름대로 어떤 성공을 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이웃들의 참여와 도움이 있었을까요?
그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씨앗 가게 주인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농기구 제작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그가 부렸던 소나 말을 정성스럽게 키운 가축 사육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곡간을 확장하기 위해서
아마도 그는 은행 융자를 위해서 은행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그의 밭을 일구는 작업을 위해서 많은 소작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계에는 여전히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나만 잘 살면 그만이에요. 이웃은 살든 죽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웃이 굶든 말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얘기에 불과했습니다...
▲빈곤에 허덕이는 지구촌
여러분, 세계 60억 인구 가운데 약 10분의 1,
즉 6억 정도는 매일 밤 채워지지 못한 창자를 붙들고 잠자리에 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시나요?
이 세상에는 날마다 약 4만 명 정도가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는 100명의 아기 가운데 40명 정도는 영양실조로
회복 불가능의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한 평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매년 10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비타민A의 결핍으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아시나요? 그런데 나만 풍족히 살면 돼요?
▲바벨론에서 나오라!
계시록 18장에 바벨론의 멸망이 나옵니다.
이 바벨론의 정체는, 소유 중심의 가치관이 빚어내고 있는 이 세상,
특별히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로 대표되는 이 세상입니다.
이 바벨론이 망하는 마지막 순간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 시간에 망하였다 계18:15
이 쾌락주의와 물질주의로 대표되던,
소유 중심의 가치관을 벗어내지 못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지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 광경을 보여주면서 성경은 이런 경고를 합니다.
내 백성아 내 백성아 너희들은 거기서 나와서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18:4
우리가 이 바벨론적 라이프스타일을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아, 내 백성들만이라도 이런 죄에서 나와라. 나와라!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물질주의적이고 쾌락중심의 가치관을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탐욕 방지 훈련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자기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킵니다.
그 중에 십일조, 그런데 십일조에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식의 십일조가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십일조 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거예요.
나눔의 원리가 강조되고 있어요.
또 매 3년마다는 구제의 십일조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옵션이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성경은 거의 의무로써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살면 돼요?
그래서 탐심은 이웃과의 관계를 차단시키는,
이웃을 향해서 창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죄악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2. 탐욕은 끝이 없다.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에게서도 그런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에 보시면, 창고를 더 크게 짓고 더 많은 곡식을 쌓아 두리라.
더, 더.. 이것이 바로 병적인 이기주의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은 지옥을 묘사할 때, 다른 말로 무저갱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이죠? ‘밑바닥이 없다’입니다. 지옥은 끝없는 욕망의 세계입니다.
▲세계적 부호의 불만족
저 유명한 세계적인 부호인 락펠러가 남겨 놓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가지면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해요.
“당신은 참 부자인데, 당신이 축적한 이 모든 재물로 당신은 만족하십니까?”
락펠러가 대답하기를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락펠러가 대답하기를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Just little more! 조금만 더!”
▲절대 만족은 없다.
저는 잠실벌이 개발될 때, 어떤 교인 집사님의 가정을 심방했던 적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13평짜리 주공아파트의 집을 장만하고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같이 축복하고, 같이 예배를 드렸는데
얼마 후에 심방을 갔더니 그 분이
“목사님 기도제목이 있는데, 기도해 주세요!”
“뭡니까?”
“우리 집을 갖게 되어서 너무나 기쁜데,
저희 소원은 20평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겁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에 20평으로 옮겨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집을 또 심방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사님은 또 기도제목을 냈습니다.
“우리 집의 평생소원은, 화장실이 두 개인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입니다!”
조금 만 더. 조금만 더!
그래서 헤어나오기 어려운 이 죄악의 정체! 이것이 바로 탐심이에요.
우리의 이기심이 끝없이 살찌우는 죄악, 이것이 바로 탐심의 정체입니다.
▲3. 탐심은 우상숭배
본문을 포함해서 성경은, 결코 물질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성경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부나 물질을 창출하는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 주인의 뜻대로 그 물질을 선용할 줄 아는
분명한 가치관이 우리에게 확립되어 있는가를 성경은 묻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만약 이 탐심의 노예가 되면,
내가 물질을 부리는 자가 아니라, 물질이 나를 부리게 되면,
내가 돈을 소유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탐심의 죄악 속에 빠집니다.
그리고 탐심의 죄를 갖게 되면 우리 눈이 멀어요. 안 보여요.
인생의 판단이 흐려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못 보고 살아요.
▲탐심은 눈을 멀게 한다.
여러분, 민수기 22장에 아주 재미나는 얘기가 나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고용했어요. 뇌물을 줍니다.
뇌물을 줘서 네가 이스라엘을 좀 저주하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주저도 했지만, 뇌물이 들어오니까 발람의 눈이 어두워졌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귀가 안 가요. 나귀가 낑낑거리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귀 앞에 뭐가 보였어요. 천사가 칼을 빼고서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나귀는 보는데, 발람 선지자는 그걸 못 봐요.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선지자가 나귀를 두들겨 팹니다.
세 번씩 나귀를 두들겨 패니까, 왜 패냐고 나귀가 소리를 질러요.
‘하나님이 안 보이냐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디 보이느냐?’
그때 하나님이 한 순간 선지자의 눈을 열어 주셨어요. 그러니까 보여요.
하나님의 천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발람이 뛰어 내려와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사람이 탐심에 젖어 버리게 되면 눈이 멀어요. 맹목적인 인간이 돼요.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리고 세상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이 상실됩니다.
그래서 탐심은 무서운 죄 입니다!
◑탐심을 극복하려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12:20
▲1.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앞서 부자는 “내 것”을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가져가겠어, 네 생명 끝! 그러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물으십니다.
생명은 물론, 재물까지도,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관리해서 쓰고 있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물질적 탐심을 버리는 제일 좋은 경건의 훈련이
규칙적 헌금의 습관입니다. 바로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에요.
규칙적인 헌금의 드림의 습관은,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아니다.’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물질에서 자유를 얻어요. 탐욕에서 자유를 얻어요.
▲2. 정말 탐심에서 자유하려면, 참된 부요의 삶을 살아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 바꿔 말하면 진짜 부자는 누구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요한 자, 이것이 진짜 부자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른 사람,
하나님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평안으로,
하나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가치로 가득 차 있는 사람.
쉽게 말하면, 하나님으로 배부른 인생. 그것이 진짜 부요한 삶이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이 사람이 진정 부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부요해진 사람은
절대로 물질에 대해 탐심을 품지 않습니다.
물질에 자유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 못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만 “더, 더” 하는데
하나님으로 꽉 차있으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더 원하는 게 없잖아요.
뭘 더 원해요? 하나님으로 꽉 차있는데!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존재로 가득 찬 인생!
▲마더 테레사의 소원
한번은 마더 테레사가 미국 순회 집회를 하는 도중에 굉장한 부자를 만났데요.
그런데 마더 테레사에게 뭐 좀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뭐가 필요하십니까?
"What do you need the most?" 당신이 뭐가 제일 필요하십니까?
그러자 마더 테레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그분이면 족합니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가 구원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소망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능력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가 내 소망이고, 구원이고, 능력이고, 나의 꿈이고,
나의 자랑이고, 나의 기업이고, 나의 피난처고, 예수가 나의 구원이시라면
뭐가 더 필요해요?
예수로 꽉 찬 인생, 성령충만한 인생, 그리스도로 꽉 찬 인생,
정말 그리스도의 임재가, 그리스도가 나의 자랑이 되고,
그리스도가 나의 프라이드가 되고, 그리스도가 나의 기쁨이 되고,
그리스도가 자랑이 되어버린 인생이라면 누구나 지금도 이 고백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어요!”
이렇게 탐심에서 참으로 자유한 인생, 이 자유의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주제별 분류] 성결의 신학 http://blog.daum.net/bible3/14042991
'분류 없음 > 연도 알 수 없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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