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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9 하나님께 받는 위로

LNCK 2008. 2. 27. 12:03
 

◈하나님께 받는 위로                     고후1:4                         칼럼 여러 편 수집 



바울은 자신이 발견한 “고난의 적극적인 목적”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후1:4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로 고난을 겪게 하시고, 또 그 고난 중에서 위로를 체험하게 하시는 이유,

그것은 내 주변에 나의 경우와 비슷한 유형의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고후1:6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환난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웃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환난을 경험해 본 사람, 역경을 겪은 사람, 그런 사람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괴테가 “나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않겠다!”

라고 말한 것처럼, 고난의 의미를 체험한 사람들만이

같은 고난 속에 처하고 있는 이웃들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위로를 얻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저는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인생의 극한적인 어둠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몸도 약했고, 집안도 파산했고, 전혀 내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불교를 비방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당시 제가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릴 때

부처님의 평화스러운 그 얼굴이 제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평화스러우니까, 내 고난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이따금 보게 되는 십자가상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본 적도 없는 저였지만,

십자가상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수님은

어쩐지 저의 아픔을 이해해 주실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다리 다친 강아지를 구입한 소년

애완견 상점에 한 소년이 들어왔습니다. 강아지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주인은 색깔이 예쁘고 털도 고운, 귀여운 강아지들을 여러 마리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주인이 골라 주는 강아지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한쪽 다리를 다친 강아지를 가리켰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그 강아지는 너와 친구가 될 수 없어.

다리를 절기 때문에 너와 같이 뛰어다니면서 놀 수도 없는데... ”라고 말합니다.


그때 그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강아지는,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할지 몰라요.”


전혀 소년답지 않은 이 말에 주인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 강아지를 소년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주인은, 돈을 지불한 후 절름발이 강아지를 안고 떠나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금 전에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강아지는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할지 몰라요”

소년은 자신이 그 눈물과 그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에,

비로소 이웃의 고통 앞에 남다른 깊은 관심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당하신... 그리스도의 수난

그리스도는 최악의 고난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위로 하지 못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위로자와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당신은 내 삶의 고난과 눈물을 이해하시며 나에게 다가오시는,

나의 위로자와 구원자가 되시는 주님을 발견하십니까?



▲당신에게 절망과 고통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뜻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주간을 수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수난의 계절이 지나면, 우리 앞에 부활의 찬란한 아침이 열릴 것입니다.

수난의 어둠은 곧 지나갈 것입니다.


내가 지금 처해 있는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위로를 체험하고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면,

나는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성숙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이웃들을 진실로 위로하며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당신에게 절망과 고통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고통을 겪어야 창조적 소수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연구 A Study of History] 라는

10권이나 되는 방대한 역사 연구서를 집필했습니다.

그 속에서 역사의 맥락을 그는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역사>로 설명합니다.

 

계속적으로 도전이 있고, 이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좌우된다 하는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는 중에

그는 아주 달관한 역사의식으로 이렇게 말해줍니다. 신비로운 진리입니다.


“Creative Minority 와 Dominant Minority에 의해서 역사는 움직여진다!”

즉 '창조적 소수'와 '지배적 소수'에 의해서 역사는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Minority, 소수입니다.


우리는 대중, 민중 하지만, 전체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게 아니고

언제나 역사는 소수에 의해서 선한/악한 방향으로 움직여 가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해요. 미친 사람 몇 명 때문에 세계가 고생한다 그래요.

사실입니다. 그 몇 사람, 지배적 소수였던 그 몇 사람 때문에

온 국민, 온 세계가 고생을 했습니다.

히틀러, 스탈린, 칼 막스 등 역사를 지배했던 인물들, 소수였습니다만,

역사를 거꾸로 후퇴시킨 ‘지배적 소수’였습니다.

 

이렇게 힘으로 지배하는 자,

다시 말하면 권력으로 지배하는 지배층이 소수 있는데, 이게 화려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권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깊은 곳(이면)에는 그렇지 않아요.

Creative Minority 보이지 않는 '창조적 소수'가 있어요.

그들에 의해서 역사는 움직여지고 발전합니다.

보세요, 예술가, 도덕가, 철학가, 종교인(성자)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조용히 죽어갑니다. 그러나 그는 '창조적 소수'에 속합니다.

그를 통해서 이제 사도바울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합니다.


역사는 로마 황제가 지배한 게 아니고, 사도바울이 지배한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고 볼 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와 그 제자들이 역사를 지배한 거예요.


‘창조적 소수 Creative Minority’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스데반처럼, 고난을 통해, 하늘의 위로를 받는 사람만이,

원수를 품고 사랑하며, 다른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창조적 소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에게, 계속적인 고난과 연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조적 소수와 지배적 소수의 그 차이는

'받는 고난'과 동시에 '하나님께 받는 위로'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삶의 여러 어려움에 대해 이제부터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Arnold J. Toynbee (1889-1975), His monumental comparison of the historical patterns of twenty-six civilizations, in A Study of History, was published in ten volumes between 1934 and 1954. Toynbee's research focused on questions of how civilizations were created and why some flourished while others failed. Toynbee discovered that challenges (such as those of climate and foreign invasion) great enough to cause extinction of culture if not met successfully, but not so severe that the culture could not respond creatively, was the ideal condition in which great civilizations developed. In "Challenge and Response," from A Study of History, Toynbee uses analogy as his main expository principle to synthesize conclusions he reached on the rise and decline of civil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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