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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 임종을 대면하는 용기

LNCK 2008. 3. 5. 11:19
 

◈임종을 대면하는 용기  고후5:1~10



신앙인들의 삶 속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요소 중의 하나는

“죽음에 대면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의 기도문을 내용으로 한 찬양이 있는데,

끝 부분에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역(誤譯)입니다.

원문에 보면 이 구절은

“우리가 죽음으로써 영원한 세계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길 수 있고 또 마땅히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의 편지에서, 그 승리의 비결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내세에 대한 확신 - “아나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5:1



개역 한글성경에는 장막집이나 영원한 집이나 똑같이 ‘집’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전혀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장막집은 문자 그대로 “텐트(tent)”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집에서의 집이라는 단어는 “빌딩(building)”이라는 의미입니다.


텐트와 빌딩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낡은 장막집 같은 우리의 육체,

우리는 이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보약도 먹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장막집이 낡아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장막집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이 임박할 때, 절망이 아니라, 도리어 소망이 넘치는 것은

우리가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5:1


주께서 이 땅을 떠나가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압니다. 그래서 평안합니다.

 

(1937년, 연해주의 우리 동포 30만 명이 화물열차에 태워져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장 큰 고통과 두려움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는 절망감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앙아시아로 옮겨질 것이다. 거기서 살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보장이 있었다면 굶으며 기차를 타고 가는 그 고통을 참고 견뎠을 것인데,

그런 귀뜀이 전혀 없으니까

'우리가 지금 어디로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것 아닌가?'

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기차를 타고 가는 수 십일 간 내내

그들 모두를 불안에 떨게 했다고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미래에 대한 확실성, 내 미래를 아는 것'은

우리 마음에 행복과 평안을 줍니다.)   



◑2. 내세를 사모함 - “사모하노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5:2


C.S.루이스의『악마의 편지』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사단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세를 인정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믿고 사모하지는 못하게 하라!”


내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과

그 내세를 믿고 사모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참으로 사모한다면, 그 내세를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바로 내세를 사모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늘에 나를 위해 예비된 영원한 집이 있으니까

이 땅의 삶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정직하게 살아야지...’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등과 고뇌는,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혹은 천국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히브리서 믿음의 거장들의 승리 비결 - 본향을 사모함

히브리서 11장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으로 살아갔던 신앙의 선배들,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갔던 그들의 삶의 승리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한번 신앙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딘 이후에

다시 옛 삶을 향해서 돌이키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고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고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11:15~16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11:8, 10


▲현세에 욕심이 많은 이유 - 내세에 대한 사모함 부족 때문인가?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욕심꾸러기들이 많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가진 신앙의 내면에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참으로 내세를 믿고 내세를 사모한다면, 그들의 삶은 지금과는 다를 것입니다.

조금 큰 집에서 살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집이 예비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주님을 사모함으로 내세를 사모함

여기서 한 가지 점검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세를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세가 이 세상보다 더 좋고 더 아름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내가 사랑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고후5:6


우리는 주님을 영접했을 때,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혹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육체적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2천 년 전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며 말씀하시며 위로하시던

그 주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그런 열망을 갖게 됩니다.

바울은 그런 강렬한 열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후5:8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은 가깝게 느껴진다.

남편이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떤 부인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게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목사님, 제 남편이 세상을 떠나간 후 천국이 가깝게 느껴져요.

이전에는 천국이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미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었는데,

사랑하는 남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천국이 너무 가깝게 느껴져요”


사랑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곳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내 찬송의 주제요, 내 소원이요, 내 믿음이요, 내 사랑이신 주님이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세를 사모하는 열정, 그곳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열망,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심판 날을 준비 함 - “받으려 함이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10


여기에서 ‘심판대’라는 단어는 정죄나 형벌의 개념이 별로 들어 있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의미로는 “심판관 앞에”라는 말이 나을 것입니다.


옛날에 희랍 사람들은 이 심판대라는 단어를 “베마”라고 불렀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한 종목의 경기가 끝난 후에 선수들은 심판관 앞에 섭니다.

그때 선수들은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치른 경기에 대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잘 달렸든 못 달렸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평가를 받게 됩니다.


크리스천도 그 신앙의 깊이나 열정의 정도, 혹은 헌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날의 평가도 다양할 것입니다.


삶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는 날,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되겠습니까? 부끄럼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인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면,

주님 앞에 서는 일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안식이고, 축복이다.

얼마 전에 제 큰아들이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빠, 이번 학기는 전과목 다 <수>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옆에서 둘째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아빠,  나는 <미>가 하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 후 성적표를 받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자,

제 두 아들의  태도가 판이하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성적표를 가져오는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큰아들은 얼굴에서 광채를 발하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둘째 아들은 안절부절 못합니다.


저는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그 때를 준비한 사람,

그에게 죽음이란 안식이고, 위대한 결산이며, 놀라운 승리의 절정입니다.


“주님, 제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인생은 얼마나 귀한 인생인지요!



▲성 프란시스의 임종

성 프란시스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의사로부터 자기 삶이 몇 달 안 남은 것을 알게 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전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프란시스는 하나님을 향하듯 두 손을 치켜들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쁜 표정으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라. 오, 나의 잠의 죽음이여, 나의 잠의 죽음이여>


그는 육체의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육체의 죽음에 의해서 당신은 찬송을 받으소서.

이 땅에서 한번 삶을 누린 자라면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

죄 중에 죽는 자는 재앙이로다.

그러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세상을 떠나는 이,

그는 행복한 자가 아닌가!>”


죽음의 날이 드디어 그를 찾아왔습니다.


프란시스는 조용히 시편 142편에 자신의 곡조를 붙여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프란시스는 완전히 실명(失明)한 상태입니다.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마지막 한 번 더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의 영혼은 단 한 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조용히 움직이면서 계속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다.


<내 주여, 나의 전부여, 내 주여, 나의 사랑이여!>

프란시스는 회개한 지 20년이 되던 해인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저녁에

찬송하면서 죽어 갔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 다섯 이었다.”



▲기도

당신은 주님을 향해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하루 당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날을 준비하는 삶입니까?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삶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결산하는 준비를 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날 수많은 후회와 부끄럼 속에서 떠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인터넷 설교 정리, 연월일 알 수 없음


[주제별 분류] 종말과 내세 http://blog.daum.net/bible3/14218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