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외에는 갈6:11~16
▲기독교의 핵심은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에 보면
‘기독교 복음과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이 우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주님의 가르침이 곧 기독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오늘날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종교적 천재이며
그는 모든 철학자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산상수훈을 비롯한 그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산상수훈 같은 윤리적 가르침을 처방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상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 전한다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것입니다.
그것을 주로 강조하다보면, 사람을 심하게 비난하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가르침의 내용을 완벽히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을 우선순위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내게는 산상수훈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예수의 가르침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모범적인 삶’을 중심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우선적으로 전파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였습니다.
그 다음에 도덕적 교훈을 전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사도들과 바울이 전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의미였습니다.
갈6: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마치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파한 바울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은 갈6:1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고
강조하는데,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안 전하면, 박해도 없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십자가로 말미암은 박해를 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 뿐이라... 갈6:12
당시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핍박이 두려워
유대의 율법과 전통을 계속 지킴으로써
자신들이 유대인으로서 손색이 없음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는 슬그머니 무시해버리고,
대신에 율법의 전통, 가르침, 규례를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1. 십자가는 ‘거치는 것’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그렇지 않습니다.
갈5:11에, 그러나 형제들아 만일 내가 지금껏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느냐?
그랬더라면 십자가의 ‘거침’이 그쳤으리라.
①십자가의 ‘거침’(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스칸달론)이란
원래는, ‘구세주가 어떻게 흉악범처럼 형틀에 매달려 죽느냐!’는 모순인데,
그래서 그것이 당시에 전도의 장애(거침)가 되었던 것입니다.
②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전파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에게 고난 받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자신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전파하니,
세상에 누가 이런 메시지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거치는 것'입니다.
그냥 도덕적 교훈을 전하면, 세상 사람들이 ‘감명적이다’며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집니다.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 십자가의 ‘거침’에 대하여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도 시대는 물론 초대 교회에서 지금까지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은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당해왔습니다.
십자가의 거침이 되는 것은 고전1:22-24에서도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반대로) 우리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노니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하나님의 지혜니라.
▲2. 십자가 말고는 자랑이 없노라 갈6:14a
바울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또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a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도덕적 교훈이 일차적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런 중요한 메시지인 '십자가'는 뒷전이고,
할례, 절기 지키는 일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바울이 흥분했던 것입니다.
▲3. 십자가에 세상을 못 박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b
바울도 한때는 세상의 부귀영화, 명예, 권세를 추구하며
인간적인, 세상적인 성공을 바라보며 살았으나
결국 실패했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세파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빌3:4-6 라고 고백할 만큼
세상적으로 부귀영화, 명예권세의 출세가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즉 세상 부귀영화와는 담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빌3:8,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에 눈이 뜨여졌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에겐, 세속적 욕망이 끈질기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기도 중에 십자가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이 세속적 욕망이 끊겨지고
십자가를 지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용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가치관이 바뀌어 지고,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십자가를 지는 것과, 세상의 정욕 추구는 절대 둘 다 함께 추구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한 개를 추구하면, 다른 한 개는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 중에, 둘 다 동시에 추구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있는 삶'을 체험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세상에서 무난하고 평탄하고 적당히 성공하며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지혜>가 없습니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지는 모르나,
세상을 구원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현세에 무난한 삶으로 끝나겠지만, 영원히 별처럼 빛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4.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다시 부활하다
이렇게 갈라디아서에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유난히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이제 내 삶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 실패하고 무능한, 절망적인 내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당당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참고 :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갈6:11
바울은 결론 부분에 와서 친필로 큰 글자로 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고대의 편지 쓰기는 지금처럼 간단하고 용이하지 못했습니다.
매끄러운 종이가 있던 시절도 아닙니다.
바울의 시대에 주로 사용된 파피루스는 오늘날의 종이처럼 매끄럽지 않은 표면에
갈대를 잘라 만든 펜으로 글씨를 정서하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숙련된 기술을 습득한 필경사를 비서를 두고 글을 쓰고는 했습니다.
바울도 이런 관행을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서의 뒷부분에 보면 문안인사에서
갑자기 1인칭 단수가 가리키는 인물이 바울 아닌 딴 사람으로 바뀝니다.
롬16:22,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바울이 로마서를 더디오라는 사람에게 대서시켰다는 증거입니다.
로마서만이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편지에 있어서도
바울은 이처럼 필경사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측근이었던 필경사가 구술하는 편지를 다 받아쓰고 나면
편지의 말미에 가서 직접 펜을 들어 문안인사 부분을 적으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고전16:21, 골4:18에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라고 합니다.
살후3: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 이렇게 쓰노라
①이렇게 편지의 끝 부분에 자신의 친필체로 한 마디씩 하는 것은
그 편지 내용에 <사도로서의 권위>를 담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②또한 그 편지가 바울의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수신자에게 알리는 <서명 구실>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수신자들은
숙련된 필경사가 정서한 편지 뒤에 붙어있는 그의 필체를 확인하면서
사도가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 권위를 느꼈을 것입니다.
③그러면서 큰 글씨로 섰다는 것은
바울이 필경 솜씨가 마치 어린아이같이 서툴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큰 글씨 표현은 그 만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문제를 일으키는
유대주의, 율법주의자들을 삼가라는 강한 권면의 말씀인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육체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빌3:18절 말씀처럼
십자가의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08.02.03.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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