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분별하는 지혜 왕상3:9
▲핵심을 볼 줄 알았던 솔로몬
질문하는 수준을 보면, 그 학생의 실력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솔로몬의 대화의 수준을 보니까, 그는 정곡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1천 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구하라’고 하셨다.
그 때 솔로몬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한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3:9
선악을 제대로 분별하는 지도자는... 완성된 지도자이다.
사실 얼마나 많은 혼란이, 잘못된 판단과 의사결정으로 인해 초래되는지... 註)
▲듣는 마음
그런데 솔로몬은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듣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과 뜻’을 ‘듣는 마음’이며,
‘지혜로운 대신들의 조언’을 ‘듣는 마음’이다.
판단의 주체가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판단’을 듣고서 그것을 대행하는 종들이다.
많은 시간을 내서 기도하며 말씀 읽는 이유가... 주님의 판단을 듣기 위해서이다.
▲선악과의 핵심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손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게 된 근원에는 선악과가 있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그 핵심이다.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자 하는 교만이 선악과의 정신이다.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나와 내 주변을 보기보다는,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어린 눈으로 형제자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 이것이 판단이다.” (이용규,「더 내려놓음」)
오직 선악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4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3:22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로 판정을 받았다.
그 결과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장수할까 해서 거기서 쫓겨나고 말았다.
우리가 선악을 마치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판별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낭패를 당할 것이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판단”으로 실수했던 적이 많이 있다.
-옥합을 드린 마리아에 대한 제자들의 판단
-돌아온 탕자에 대한 착실한 형의 판단
-예수님이 죄인들의 집에서 식사하신 것에 대한 판단
-남의 종의 실족에 대한 판단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롬14:4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판단하기 전에,
항상 주님의 판단을 ‘듣는 마음’으로 겸손히 물어야 하겠다.
솔로몬이 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성숙과 미숙의 차이
미숙한 자는 아직 ‘선악을 (주님 뜻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제멋대로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을, 아래 본문은 담고 있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자기 판단을 유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신명기 1:39
아래 구절은, 십자가 고난 같은 성경 말씀(단단한 음식)으로 무장한 사람은
장성한 자, 곧 성숙한 자인데,
그들은 ‘선악을 (옳게) 분별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4
이 땅에, 솔로몬과 같이 듣는 마음으로
선악을 주님 뜻대로 옳게 분변하는 지도자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하며... <김지윤
註)
아들 부시 대통령의 대테러전쟁과 이라크 침공은,
후대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아직 모르지만,
지금 대부분, 잘못된 정보로 인한 ‘실패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다.
처음에는 ‘정당한 전쟁 just war’ 명분으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중동에 더 큰 혼란만 야기시켰다.
이 일로 미국은, 전 세계에서 도덕적 지도력과 존경심을 많이 상실했다고 본다.
심지어 서구의 여러 나라들도 미국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힘의 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최근 세계에 유가가 이렇게 급등하는 것도,
과거까지는 미국이 OPEC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가격을 통제했으나,
이제는(부시 행정부 들어서) OPEC 회원국들이 미국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본다.
미국이 도덕적 지도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달러화는 유로화에 점점 밀리면서, 그 위상이 점점 하락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 일어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도
‘이라크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대접한 대로 대접받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다.
이라크에서 일어난 수많은 파괴, 피난... 지금 서브프라임 사태로 사람들이 피난가고 있다.
이라크의 파괴와 혼돈을 초래한 결과를... 지금 미국이 대접한 대로 되돌려 받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잘한 99가지를 언급하지 않고
잘못 결정한 1가지를 부각시켜서 죄송하지만,
‘선과 악의 판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로 들었다.
잘못된 판단의 결과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종말을 초래하고 있다.
*관련 글 : 주님과 판단이 일치해야 http://blog.daum.net/rfcdrfcd/13926017
◑관련 글: 성도는,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따라가는 존재이다.
(이하 08.01.13.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
성경은, 하나님 백성들을 묘사할 때
어떤 결정을 내리는 존재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에 따르는 존재로 묘사한다. 대표적으로 ‘양떼’는 따르는 존재이다.
양은 스스로 갈 길을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성경을 보면, 크나큰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가 했던 일은,
금식하며 기도했던 일이었다.
우리 같으면, 내 이성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모여서 이성적인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성도들은, 금식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결정을 기다렸다.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지도자가 사라졌으니 상당히 당혹스런 상황이었다.
그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이제 우리 뭐할까?’ 하며
회의해서 무슨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대신에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렸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오순절의 역사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결정을 기도로 구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상사의 흐름으로 본 ‘내 이성’(내 판단)의 문제
▲중세의 왕권과 교권에 대항한 이성의 시대 (16세기 르네상스~20세기 초)
전근대(근대 이전, 중세) 시대는 한 마디로 ‘신학과 권위의 시대’였다.
모든 중요한 결정을 국왕과 교권이 결정했다.
보통 사람들은 결정할 권한이 없었고,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다.
그러다가 근대(모던)의 시대로 들어섰는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로,
근대의 시대정신-이성의 시대-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서 국왕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잃어버린 인간 이성을 되찾는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가 도래 했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아갈 때는, 사람들은 절대이성을 믿었고,
이성을 따라 살자는 캠페인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근대 계몽주의 사회'다.
그래서 이성의 빛이 비춰지는 곳마다, 모든 것이 합리적, 과학적이 되면서
인류 사회는 제자리를 찾고 번영할 것을... 모두가 믿고 기대하며 살았다.
▲이성의 시대에 대한 반성
이 '이성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 1,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였다.
이성을 가지고 살 때,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잘 될 줄 알았는데,
이성을 가진 인간들이 역사 이래 가장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예전에 없었던 가장 비극적 대살상의 양차 대전이, 이성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심지어, 가장 이성적이라 여겼던 독일 민족이 히틀러를 추종하면서
유태인들을 6백만이나 학살했던 일 - 이성적이라던 인간들이 자행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이성 신봉에 대한 대대적인 반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간 이성은 믿을 게 못 되는 구나!’
▲2차대전 후 다원주의 등장
그래서 2차 대전 이후에 세계 정신사조의 흐름은 몇 갈래로 나누어졌다.
*소수 사람들은 ‘허무주의’로 빠졌다. 그래서 히피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부 사람들은 ‘신앙주의’로 다시 회귀했다. 역시 하나님이 답이라며 주께 돌아왔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큰 기독교의 부흥이 20세기 후반에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의 길, 즉 다원주의로 가 버렸다.
국왕과 교권의 권위는 이미 잃어버렸고, 그에 反하던 이성마저 권위를 잃어버렸으니,
이제부터는 그 공백에 ‘각자의 느낌과 각자의 판단’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것의 특징은 ‘제 각기 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현 시대 사조를 일컬어 ‘포스트모더니즘(후근대주의), 또는 다원주의pluralism’
라고 한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다 해보라’는 것이다.
남의 기준과 내 기준은, 가치관과 처한 상황이 서로 다르니,
남의 기준을 내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조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고,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한 실존주의의 영향이 시대를 거치면서 점점 성장한 것인데,
일면 맞는 면도 있지만, 이 다원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내가 내 삶의 주권자이며, 내가 내 삶의 판단의 주체’라는 생각이다.
마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기 시대’로 돌아가 버리는 꼴이 된다.
이것은 철학과 사상계에 침투한 마귀의 역사이다.
▲일례로 요즘 나오는 영화를 보면,
아무 도덕적 기준도 없고, 가치관도 없고, 권선징악도 없고, 아무 교훈도 없다.
그냥 깔깔거리며 웃다가 끝난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다원주의)의 특징이다. 기준이 다 무너진 것이다.
그냥 볼거리, 눈요기로만 끝나버린다. 아무 선악의 기준이 없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이순신 장군, 도산 안창호, 김구 선생님... 그렇게 말하면 웃음거리 된다.
그냥 스포츠 스타나 연예스타, 즉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한다.
어떤 절대적 가치관이 무너진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절대 기준과 가치관이 사라진 대신,
그 공백에, 메스미디어가 전해주는 메시지대로, 유행 따라 살아간다.
그래서 이런 시대를 다른 말로 ‘Me Generation’ 이라고 한다.
내가 옳고,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적 스탠다드(삶의 표준,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성경의 절대 기준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다.
-십계명은 절대기준이다... 그러면 십계명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모든 권위에 순종하라... 그러면 내가 좋든 싫든 주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면 내가 좋든 싫든 원수를 사랑하며 산다.
신자는 내 삶의 절대기준을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에 두고 살아간다... '내'가 아니다!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http://blog.daum.net/bible3/14156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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