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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칭의’가 기형적으로 너무 강조되다 / 달라스 윌라드

LNCK 2008. 2. 28. 20:38

www.youtube.com/watch?v=HeQVm1id72Y

◈‘칭의’가 기형적으로 너무 강조되다                  도서요약


*칭의 : Justification, 예수를 믿으면 의롭게 된다는 신학 개념

 

「잊혀진 제자도」The Great Omission 달라스 윌라드, 윤종석 역, pp.224~232

 

 

 

▲1. 현대 복음주의의 표지 (20세기 후반)

현대 복음주의Evangelical의 한 대변자는

현대 복음주의의 근본적 표지를 다음 3가지로 설명했다.

 

*예수의 고유한 신성 (다른 말로,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응)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인간의 저작이라는 데 대한 반응)

*중생의 필요성 (칭의?)

이런 복음주의의 특징은 2차대전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2. 그 이전 복음주의의 표지 (종교개혁~20세기 초반)

저자 달라스 윌라드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다음 3가지이다.

 

*죄의 책망

*경건한 믿음 생활로 회심

*구원의 간증

위 3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①죄에 대한 책망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모든 전통, 즉 마르틴 루터, 리처드 백스터, 필립 스페너,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70년대 빌리 그레함 포함) 등에서 보듯이

모든 부흥운동은 죄책, 죄의 습성 등을 강력하게 책망하며 설교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이런 전통은 율법주의, 도덕적 완벽주의로 빠질 수 있다.

사랑과 회복이 빠진 책망, 본인의 미숙한 상태로 상대를 비판함 등의 부작용이 있다.

오늘날 이 전통이 사라진 원인 중에, 그런 미숙함으로 인한 부작용 때문인 이유도 있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죄의 지적 없이, 깊은 죄책 없이, 사실 복음이나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 없다.

그런데 현대 복음주의는, 이 전통이 사라진 것이 그 ‘특징’이다.

 

②경건한 믿음 생활로 회심

강력한 죄책이 없으니, 강력한 회심도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과거에는 ‘이 죄인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가

오늘에는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그리스도’로 바뀌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하는 목적이, 많은 사람에게 ‘자기 필요를 채움’이다.

 

때로는 ‘칭의 교리’가 너무 강력해서, ‘중생’과 ‘회심’을 모두 희석시키거나

아니면 포함시켜(잡아먹어) 버린다.

예수 영접하고 ‘칭의’를 얻으면 끝났다고 생각한다.

이런 오늘날의 현상은, 복음주의적 전통과는 어긋난 것이다.

 

③구원 사역을 간증

 

(*간증 Witness 이란, 교회에서 성도들 앞에서 하는 신앙 간증,

그리고 전도할 때 전도자가 하는 자기 신앙 간증을 뜻하기도 하지만,

Witness의 가장 핵심적인 뜻은, <삶 속의 간증>임.

즉, 내가 예수 믿는 참 신자,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

주님과 교재, 동행, 성도의 능력으로 정직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 .. 그것을 간증 Witness이라 말함.)

 

자신이 회심하고, 구원 받은 사실을 기쁨으로 간증하면서,

그것을 통해 전도하는 것이다.

자기가 구원받았으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되고,

그 기쁨과 감격을 널리 전하면서, 영적 추수에 자기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①죄책이 안 되면 ②회심이 안 되고, 그 결과 자동적으로 ③간증도 안 된다.

 

위의 3가지를 다 거친 사람은 ‘제자’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고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요즘의 통념에 대해

저자 달라스 윌라드 교수는 반대한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①극단적 ‘칭의’의 강조

위에서 간략히 짚어보았지만, ‘전통적 복음주의’와

2차대전 후 ‘현대 복음주의’는 그 표지(대표적 특징)가 완전히 다르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신학적인 이유로 한 가지 들자면 “지나친 칭의 신학에 대한 강조”라고 본다.

 

‘칭의’란, 아시는 대로,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신학이다.

그러나 이것은 ‘칭의, 성화, 영화’의 전체 과정 속에서 균형 있게 강조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칭의’ 하나만 기형적으로 강조될 때, 전체가 심각하게 균형을 잃게 되고,

기형적 괴물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신학을 한쪽 면으로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반드시 극단주의 extreme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에는 ‘칭의 하나뿐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다른 것은 그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부작용이 지금 현실적으로 한국과 미국 목회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②복음주의 내 反지성주의 (윌라드 교수의 견해)

복음주의가 너무 외적성장, 실천목회에 충실한 반면, 공부를 등한시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반대로 자유주의는 현장에 소홀한 반면, 너무 책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은혜는 공로의 반대 개념

저자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해서

‘신자들은 사실 아무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극단주의를 지적한다.

 

‘은혜’ 개념은 ‘공로’의 반대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다는 ‘노력’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서방교회는 ‘칭의’, 동방교회는 ‘신화’

앞서 #1141글에서, 동서 로마교회가 분리된 후

서방교회는 ‘칭의’, 동방교회는 ‘신화 deification’

전통으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래서 서방교회의 전통을 계승한 개신교회는, 칭의만 강조하고, 

신화, 성화, 영화

- 이런 신학에 대한 강조점이나 ‘설득’이 많이 계발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마치는 말

루터, 웨슬리, 휫필드 이런 분들이 만약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 참석한다면

큰 ‘충격’을 느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만약 주님이 오늘날 교회에 참석하신다면, 과연 뭐라고 평가하실까?

성경적, 초대교회의 전통을 제대로 잘 이어가고 있다고 과연 칭찬하실까?

 

물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고, 생명력을 기적처럼 계속 유지해왔다.

그런 낙관론이 정답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과 성령님은, 당신의 '몸'을 늘 새롭게 해 나가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따라서 노력해야 한다.

 

 

 

 

*「잊혀진 제자도」의 다른 글 보기

*경건의 훈련     http://blog.daum.net/rfcdrfcd/13942802

*성공 같은 실패 http://blog.daum.net/rfcdrfcd/13852285

 

 

[주제별 분류] 기독교 사상 http://blog.daum.net/bible3/14156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