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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6 무디의 일생

LNCK 2008. 3. 7. 22:29

◈무디의 일생                               스크랩 글 편집

 

 

어떤 분이 인터넷에 요약, 발제한 것을

이해하기 쉽게 연대별로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한국에도 무디 선생 같은 분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19세기 말 신앙부흥운동을 일으켜 해외선교운동까지 이어지게 한 주역, 무디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씀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위대한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

(Dwight Lyman Moody, 1837-1899)를 통해 증명 되었다.


19세기 미국 부흥운동(2차 대각성 운동)이 찰스 피니(1792-1875)로부터

무디로 이어졌다. <연대를 살펴보면 한 세대 차이, 피니의 바통이 무디에게 옮겨진 것이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미국과 영국에서 부흥을 주도했던 무디는

외국선교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디의 부흥운동의 영향 아래 많은 외국 선교회가 조직되었고,

이를 통하여 세계 곳곳에 복음이 전파 되었다.


소위 학생자발운동(SVM, 1868~)이 무디의 신앙부흥운동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1837년 출생

무디는 1837.02.05.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노스필드에서

석공인 아버지 에드윈과 어머니 벳시 사이에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그의 아버지 에드윈은 무디가 겨우 4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무디는 유년시절 부터 남의 상점에서 일을 도와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학력은 보잘 것 없었다. 초등학교만 간신히 나왔다.

가정 형편상 생계가 우선이었다. 


▶1853년, 16세

그는 보스턴으로 가서 그의 아저씨 제화점에서 구두수선공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1855년, 18세  -그리스도 영접-

그 제화점 뒷방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註1)


▶1856년, 19세

무디는 시카고로 가서 제화점 영업 사원으로 탁월한 상업수완을 발휘했으며

플리머스 회중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지역 YMCA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고,

Wells street의 모퉁이에 있는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다가

주일학교교장에게 한 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자기가 직접 전도해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58년, 21세

빈 술집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해서

몇 해가 지난 나중에는 1천5백 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註2)


▶1860년, 23세

무디는 상업을 버리고 전도 사업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 남북전쟁 기간 동안 기독청년회 간부로 군대전도를 하였으며,

전쟁 후 시카고로 다시 돌아와 주일학교를 재건하였다.

 

▶1861~1865년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전도하다. 註3) 

 

1867년, 30세  -1차 영국 방문-

무디는 전도자로서의 명성을 영국에서부터 얻기 시작하였다.

영국 순회전도의 발단은 그가 평소에 존경하던

설교자  스펄전(1834-1892)과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1805-1898)를

만나고자 하는 바램이 있어서 영국을 여행하게 된 때부터다. 


그 때 무디는 아직 외부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미국에서 주일학교와 YMCA에서만 열심 내던 청년이었다.


▶1868년, 31세

영국의 소년 설교가인 무어하우스와 함께 (그를 미국으로 초빙해서)

시카고에서 순회 집회를 72회나 가졌다.


▶1870년, 33세

유명한 음악가 생키(Ira D.Sankey, 1840~1908)를 만나 전도 사역에 동역하게 되었다.


▶1871년, 34세,  -성령세례 체험-

무디는 성령체험을 하였는데, 그 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거듭나게 하신 후, 16년(34세)만의 일인데,

곧 성령께서 나에게 충만하게 되신 일이다.

그 후로는 성령께서는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1871. 10.08.에는 그 유명한 '시카고 대화재'가 있었다.

이 사흘 간에 화재로, 무디는 가족은 안전하게 건졌지만

그동안 자기가 건축했던 건물 등을 대부분 소실했다.

아래 글은, 이 화재를 계기로, 무디가 자기 소명을 재평가하고, 

보다 넓은 해외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무디의 성령체험이 화재 이전인지, 이후인지 아직은 파악 못 했음)

 

This was a poignant time in Moody’s life and the fire forced him to reevaluate his ministry.

It was during this time of evaluation he realized he needed to heed the Lord’s call on his life.

For years, he had been moving forward and then asking God to support his plans.

He knew from this point on, his call was to preach the Word of God to the world.

 

▶1872년, 35세,  -2차 영국 방문, 본격적인 순회전도집회 시작-

이 여행은 무디의 전도 여행에 긍정적인 큰 영향을 미쳤다.

무디의 두 번째 영국 방문은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 성서학자들 밑에서 성서를 더 배우기를 바래서 1872년 6월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런던 북부 한 교회의 초청으로 주일 설교를 하였다. 

설교 후 무디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일어설 것을 부탁했을 때,

청중 2백 명 중 1백 명이 일어섰다. 


무디는 그들이 잘못  알아들은 줄 알고 반복하여 말하고 상담실로 갔는데,

1백 명이 상담실을 메웠다.  

무디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각자 죄를 회개하는 통성 기도가 있었다. 

초대 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화요일에 다시 초청을 받고 10일 동안 집회를 열었는데

결과로 4백 명이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다.


(1년 전 그가 뉴욕에서 <성령세례의 체험>을 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였다.)


▶1873~75년, 36~38세,    -3차 영국방문-

무디가 지난 번 영국방문 기간동안 사귄 목사 세 사람으로부터

부흥회를 위한 초청이 있었다.  

그리하여 무디와 생키의 두 가족이 준비를 갖추었으나

초청한 사람과는 연락이 되지 않아,

그들은 막연히 1873년 6월 17일 영국 리버풀에 건너와 기회를 기다리다가

무어하우스의 도움으로 요크 市에서 집회를 열었다. 


처음에는 푸대접을  받았으나,

성공적인 집회로 요크 지방① 목사들의 결의로 5주간을 연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영국의 요한 웨슬리 이후 가장 큰 부흥운동의 불길이

이곳 요크에서 무디에 의하여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 후 무디는 썬더랜드 지방②에 초청받아 갔는데, 

그 마을의 거리에는 "무디는 복음을 설교할 것이다. 생키는 복음을 노래할 것이다"

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6주간의 집회를 마쳤다.  

무디와 생키는 교파를 초월하여 전도 운동에 나섰기 때문에

각 교파의 지도자들도 격의 없이 서로 협동하여 지원을 했다.


이어서 있었던 뉴캐슬 집회③도 성공적이었고,  

뉴캐슬  크로니클 (Nwecastle Chronicle)의 편집자인 코완(Cowan)은 그의 기사에 

"놀라운 종교적(신앙적) 현상"으로써 논평하였다. 

코완의 글은 심오한 감명을 영국에  주었다.


뉴캐슬의 부흥의 불길은 에딘버러④에도 미쳤다. 

에딘버러에서 3개월 동안 집회 후 글라스고우⑤에서 집회를 가졌다. 


무디를 초청한 글라스고우 지방 교회들은

한 달 전부터 준비 기도회를 연일 계속하고 있었다. 

맨 처음 주일학교 교사를 위한 집회를 가졌다. 

제한된 3,500명을 위한 집회가 한 주간동안 있었다.  


다음 주간은 킵블 수정궁(Kibble Crystal Palace)에서

군중을 위한 집회를 가졌는데, 마지막 주일 저녁에 어림잡아 5만을 헤아렸다.

수정궁의 화원과 뜰의 수레 위에서 무디는 설교 했고,

생키는 7천명의 즉석성가대를 조직하여 총 지휘를 하였다. 

스코틀랜드 북쪽 끝에 있는  마을에서까지 이 집회에 참석 하였다.


1874년 9월, 무디와 생키는 아일랜드 벨파스트⑥에서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스코틀랜드처럼 깊은 감명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1875년 3월 9일, 런던 집회⑦에 돌입하였고, 7월 12일까지 계속 되었다. 


무디의 세 번째 영국 방문(순회 전도로는 두 번째 방문)의 절정을 이루는 이 런던 집회는

치밀한 준비와 대규모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런던 집회는 오전에 기도회로 모이고

오후에는 성경강의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모였다.


어린이들을 위한 집회도 가졌다. 

당시 런던 47개 초등학교로부터 모인 5-7천명의 어린이들에게

쉬운 성경 말씀을 들려주며 생키는 찬송가로 즐겁게 만들었다. 

 

런던 집회 수는 285차에 달했으며,

동원된 연인원은 259만 명이었고 운용된 재정도 거액이었다.  

매일의 신문들은 확장된 기사를 실었다. 

부흥은 런던 자체만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놀라움이 되었다.


무디의 방문을 통하여 영국에서 복음주의의 부흥이 일어나

수 천 명의 불신자와 타락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도시 선교 단체와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단체들이 설립되었으며,

교파간의 불일치 현상이 현저하게 없어져 버렸고

모든 교파 성직자들은 '영혼구원'이라는 공통적인 명제 하에 서로 협력했다. 


회심자들은 주님의 훈계로 양육받기 위하여 지역교회에 출석했으며

찬송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 순회 설교를 통해 영국 교회에 커다란 부흥을 일으켰다.  

그 후 무디는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톤 등지에서

계속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1875년, 38세      -미국 부흥운동, 3차 영적 대각성운동의 시작-

영국에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돌아온 무디는, 미국의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제1차로 열린 전도집회는 1875년 11월에 브룩클린에서 모였다.

여기서부터 필라델피아, 뉴욕, 시카고, 보스턴, 그 밖에 각 도시에서 집회가 열려

수많은 잃었던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브룩클린 교회 목사들은 준비 기도회를 갖는 한편 큰 건물을 세내고 

5천 개의 의자를 마련하여 놓았다. 집회는 오후에 성경공부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가졌는데,

건물 밖 뜰까지 청중들이 꽉 들어찬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필라델피아 교회의 초청을 받고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는,

철도 정류장이 집회 장소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무디는 7천~1만 3천에 이르는 많은 군중에게 설교했고,

집회 기간 중에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청으로 캠퍼스에 들어가 강의를 함으로써

학원 전도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1876년, 39세

2월 7일에 개회하여 4월 19일에 마친 뉴욕 집회는 별칭 ‘경마장’에서 열렸는데,

이 집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7-8천의 군중들이 의자를 가득 채웠다. 

이 집회의 효과는 그 후 25년 동안 계속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뉴욕 신자들에게 당신은 언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1875~6년경이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무디의 부흥운동의 광범위함을 입증하여 준다.


1876년 10월 시카고 집회에도 1만 여명의 회중이 회집하였다.  

이곳은 무디가 전도 사업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에

집회를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보스톤 집회는 각 교회와 교사들이 적극성을  보였다.  

무디가 여기서 전도집회를 계속한지가 2개월인데,

참석하는 군중이 많아 밖에 서 있는 자들이 많았다. 


보스톤은 1740년의 화이트릴드의 집회가 역사상 가장 큰 집회였었는데,

이번 무디의 집회는 이에 비교할 바가 아닐 만큼 대규모의 맘모스 집회였다.


무디는 집회 설교 뿐 아니라 거리와 가정을 방문하며,

또한 사업가들과의 상담으로 많은 복음전도의 효과를 거두었으며,

많은 매스컴들도 처음에는 회의적이다가, 좋은 평판으로 돌아섰다.


▶1879년, 42세

여자 전도자를 양육하기 위한 여자신학교를 세웠으며(당시 매우 선구자적인 결단)

그 후 수양관 건립해서 산상부흥회를 열었으며,

마운트 헐먼 학교를 건립하였다.

 

▶1882년, 45세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집회

4차 영국 방문 중, 무디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1882년 11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무디의 부흥집회는 학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수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세계 선교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7명의 케임브리지 명문대학 졸업생(케임브리지 세븐)이 자신들의 화려한 장래를

버리고 중국 선교를 자원한 것도 무디가 불을 질렀다.


▶1886년, 49세   -영적 각성을 통한 미국의 해외선교운동 촉발-

무디는 헐먼산 집회를 열었다.

오늘 우리로 치면 ‘여름산상수련회’였다.

거기엔 젊은 대학생, 청년들이 주로 참석했고,

이 헐먼산 집회에서 ‘학생자발운동’이 태동되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미국의 무디의 대각성운동의 결과였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당시 미국의 10만 명의 청년들을 ‘학생자발운동’으로 일으켰다.

거기서 자원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왔고,

그들에 의해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연대를 보시라.


▶1889년, 52세

무디성서학교를 세워 많은 전도자를 배출하였다. 

R. A. 토레이 박사가 조인하여, 본격적으로 무디를 돕다.


이렇게 그는 미국의 3차 부흥운동(1857-1915)의 주역이 되었고,

그는 기독서적 출판에도 힘써 신앙잡지를 발간하였으며,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등 경건서적을 출판, 널리 배포하였다. 


이렇게 볼 때, 무디는 활발히 다니는 활동가요,

경영적 수완을 지닌 지도자였다.

그런 그의 자질은, 사역의 (내면적과 아울러) 외적 부흥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1893년, 56세

무디의 전도운동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중에 가졌던 집회를 통하여서였다. 

무디는 이 집회를 위하여 영국을 비롯하여 각국으로부터

100명 이상의 목사를 대회 강사로 초청하였고,

다른 100명 이상의 시카고 강사들이 도왔으며,

300명의 성서학교 학생들이 개인 전도운동을 전개 하였다.  

집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무디와 각국의 신문, 방송, 잡지, 특파원들이 인터뷰한 기사가

신문에 나감으로써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후부터 무디는 매스컴의 위력을 느껴 문서선교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1895년에는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게 되었다.


▶1899년, 62세

1899년 11월 8일 무디는 미주리 주 캔자스 시에서 일주일간의 집회를 이끌었다.  

집회 도중 그는 건강의 악화로 남은 시간을 토레이(R. A. Torrey)에게 맡기고

캔자스를 떠나 노스필드로 돌아갔고,

그해 12월 22일 무디는 자신이 사랑하고 섬겼던 주님의 면전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마치는 말

무디의 특색에 대해서, 그의 설교와 저서를 아직 연구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다만 위에서 정리한 바를 토대로, 그의 특징을 찾아본다면, 다음 3가지다.


1. 열심, 열정

무디는 무엇보다 열심히 특심한 사람이었다.

삶에 에너지가 넘치고, 활동적으로 뛰어다녔다.

주일학교를 부흥시킨 것이라든지,

3차에 걸친 영국순회집회,

뒤이은 미국순회집회는]

무디의 정열에서 나온 결과였다. 註4)


2. 성령체험

무디는 18세에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나

그로부터 16년이 지나서 34세에 성령을 체험했다.


사실 무디 선생이(그는 끝까지 평신도로 남았다

이 점은 초교파적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교단벽이 두터웠을 때임)

부흥사 무디가 된 것은, 성령을 체험한 다음부터였다.

 

성령세례를 받은 무디는, 해외선교(영국순회집회)를 시작해서,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다.

영국에서 거둔 열매를 바탕으로, 미국 순회집회도.. 뒤이어졌다. 


그 전에 무디는 '자기 열심'으로 주일학교의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나서는,

영국의 1차, 2차, 3차 순회전도,

뒤이은 미국의 순회전도를 통해

무디는 에드워즈(1차)-피니(2차)에 이은 3차 영적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3. 경영자적 마인드

무디는 복음전도만 한 것이 아니었다.

여자 신학교 설립, 무디 신학교 설립, 헐먼산 집회 개최, 찬송가 보급,

문서 선교를 위한 기독교서회 설립 등 여러 방면에 투신했다.

시야가 넓었으며, 활동이 광범위했다. 이것은 그의 은사였다.

 

4. 선명한 복음적 설교

무디의 집회는 먼저 생키의 찬양을 통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했다.

무디가 잘한 설교는 3R인데,

-죄로 인한 타락(Ruin by Sin),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 by Christ),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 by the Holy Spirit)이라고 한다.

 

..........................  

 

註1) 무디의 그리스도 영접 체험

무디의 처음 영적 회심은 보스톤에 머물러 있었던 동안에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었지만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였다. 

 

그의 주일학교 선생이었던 에드워드 킴볼은

그가 일하고 있는 홀톤 제화점에  찾아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보혈에 관하여 말해줄 때,

무디의 마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준비가 된 상태였고,

그때 하늘의 빛이 그에게 비추었다.  

이때 무디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에 뿌듯한 느낌을 가졌다.  

온 세상이 합창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무디는 노스필드에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어머니, 1837년 2월 5일은 제가 어머니로 부터 처음 태어난 생일이지요?

18년이 지난 오늘 4월 21일은 제가 성령으로 거듭난 생일 입니다"라고 편지하였다.

  

언젠가 무디는 그 날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회심을 했던 그날 아침 나는 밖으로 나가서

만물을 사랑스런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이전에 결코 지상을 비추는 밝은 태양을 그토록 사랑해 본적이 없습니다.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을 때에도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註2) 무디가 부흥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자신이 세운 주일학교의 어떤 여학생반 교사가 병에 걸려

의사에게 사망 선고와 같은 절망적인 진단을  받고,

마지막 주일학교를 떠나기 전에,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무디와 함께 자기 반 학생들의 집을 일일이 심방하여 전도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무디가 이전까지 많은 어린이들을 모으는데 전력했던 일에서,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였다.  


헨리 바레이가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당신께 완전히 몸을 바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그를 통하여, 그 안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감동되어 

무디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케 되었다.

이로부터 무디는 부흥운동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되었다. 


註3) 무디의 남북전쟁 중 전도 캠페인 

Moody’s connection with the YMCA proved a useful tool in his ministry.

As the Civil War approached, the Union Army mobilized volunteer soldiers across the north.

Camp Douglas was established outside of Chicago, which Moody saw as a great evangelistic opportunity.

Along with a few others, Moody created the Committee on Devotional Meetings to minister

to the troops stationed at Camp Douglas, the 72nd Illinois Volunteer Regiment.

This was just the beginning of Moody’s Civil War outreach.

From 1861 to 1865, he ministered on battlefields and throughout the city, state,

and country to thousands of soldiers, both Union and Confederate.

All the while, he maintained the Mission Sunday school.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미국 기독교가 미국 국가 운명이 위태할 때마다 항상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註4) 무디의 열정

일생에 백만 명을 전도했다는 무디는, 어디에 가든지 전도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도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뛰어다녔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미친 무디’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그의 숙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조카 무디는 봄날의 토끼처럼 미쳤다.”

아마 이 말에서 유래가 생긴 듯 합니다.


한번은 무디를 찬양으로 동역했던 가수 생키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무디 목사님을 (제발 좀) 지치게 해 주세요.

아니면 우리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