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를 위한 비밀 - 사귐! 요일1:3, 7 21.10.01.출처
승리를 위한 비결은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합니다.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 안에 누가 계신다는 겁니까?
우리 안에 계신이가 어떤 분이시라는 거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속해 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을 요한일서 안에서의 맥락에서 찾아보면
'속해 있다'는 말은 그냥 소속돼 있다는 말로만 끝나지 않고
그 분과 교제 속에 사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일서에는 '사귐'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소속해 있는 것만 말하지 않아요.
함께하는 삶이죠.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죠.
그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강조하는데
그분은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일대일로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뭔지 아세요?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가
인격적인 하나님과 일대일로 지금 대화 하는 거예요.
다른 모든 종교의 신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신과 대화, 교제.. 이런 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어떤 사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이셔서 지정의를 가지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 관계 안에서 이제 우리는 교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릴레이션십 으로만 회복된 게 아니라 *relationship, 관계
휄로우십이 회복됩니다. *fellowship, 교제
이게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성도가 인격적인 하나님과 계속 사귀어 갈 때
점점 더 친밀해져 가는 교제 fellowship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삶입니다.
'속해 있다'는 말은 그분에게 '머물러 있다'는 뜻인데,
다른 말로, '(그 분과) 사귐과 교제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 교제 가운데서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가게 될 때
그 관계 안에서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유혹을 이기게 만드는 에너지가
그분과의 사귐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에서는 '사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귐이 바로 승리를 가져다주는 핵심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그분으로부터 태어난 백성이고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그 분께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분과 함께 사귀면서
우리의 모든 승리의 에너지가 거기서 다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귐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3절과 요일1:7절은 '성도간의 사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중요해요. *요일1:6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사귐)하게 되죠.
'사귄다'는 표현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제자들 중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고,
사도요한이 '사랑'에 대해 쓴 요한복음 21장도 표현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온 제자들을 주님이 찾아가셔서
바닷가에서 정말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어라'
이러면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대화를 나누신 이런 장면들은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사귐'을 잘 그려주고 있어요.
밧모 섬에서도 마지막까지
그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던 사도 요한,
그 사랑의 관계 안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죠.
▲이것(사귐)은 어떤 타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예요.
기독교에만 있는 독특한 것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사귐!'
그런데 요한일서 에서 말씀하는 것은
그 사귐이, 하나님과의 사귐으로만 끝나지 않고
성도들끼리의 사귐까지 말씀하고 있다는 거죠.
요일1:3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요일1:7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결국 어디로 연결되는 건가요?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 간에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오늘 김집사님이 그리스도와 깊은 사귐을 갖고 있어요.
박집사님도 그리스도와 깊은 사귐을 갖고 있어요.
최집사님도 깊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갖고 있어요.
그 세 분이 만나면, 그 세 분(의 모임)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김집사님, 박집사님, 최집사님.. 그들이 함께 교제하고 있는데
그 교제 안에는 뭐가 있어요?
주님의 사랑이.. 주님이 같이 그 교재 안에 임재해 계신 것이죠.
왜냐면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서로 함께 만났으니까요.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요일1:3
여기서 사도요한은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하는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 홀로만 존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이기고, 세속을 이기게 하는 힘이 어디서 오느냐?
성도간의 사귐을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홀로 있으면 안 돼요.
나 혼자만의 신앙으로 는 안 됩니다.
이기는 신앙은 함께 하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들과의 사귐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들과의 사귐은,
그 사귐에 그리스도가 함께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고 하셨죠.
이기는 신앙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요즘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자칫하면 영적 교제권까지 흔들어 놓을 수가 있어요.
이 전염병이 우리를 성도끼리 못 모이게 하잖아요.
그리스도와 사귐은 반드시 성도들과의 사귐으로 연결되게 돼요.
신기한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가 임재 하세요.
여러분도 경험하실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있는데, 그리스도가 임재하심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사귐을 통하여
즉 그리스도인들과의 사귐 안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 깊이 결속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먼저 만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더 깊이 견고하게 묶여집니다.
여러분, 신자의 삶은 고립되기 쉽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면 금방 그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세상으로 나가면 금방 고립감을 없고요. 주변에 친구가 없어요.
우리 학생들에 학교에 가면, 예수 믿는 친구가 별로 없어요.
성경책을 꺼내면, 발로 확 버리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왕따 당하는 거죠.
그러면 세상에 나가면 힘이 쫙 빠지는 거예요.
동지들 없어요.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리스도인들 끼리의 참된 교제가 세상에는 없어요.
다 계모임, 무슨 모임, 무슨 모임..
거기에는 복잡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세속적이고, 욕망이 들끓고..
자기 자랑이나 하고..
그리고 예수 말만 나오면 막 디스 disrespect 를 하고
그런데 갔다 오면은 성도들은 힘이 쫙 빠지지요.
매일 가는 직장도 마찬가지고요.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임에 참석하고 났는데.. 힘이 난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성도는 믿음의 공동체안에 연결되어 있을 때 힘을 얻어요.
우리는 함께 할 때 믿음이 강화됩니다.
함께 믿음의 감정들을 나눌 때, 영적인 활력을 얻습니다.
신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래서 교제를 코이노니아 라고 하는데요,
우리는 교회라고 할때, 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자를 쓰는데
중국에서 기독교가 넘어올 초기에는 사귈 교交에, 모일 회會자를 썼어요.
그래서 交會라는 말은 '코이노니아'를 굉장히 강조하는 말입니다.
敎會는 설교를 강조하는 말이죠.
교회가 가르침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교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가 빠지면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존재론적으로 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교제)가 빠지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행2장에 보면, 서로 떡을 떼고..
집에서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쓰고..
코이노니아의 중요한 것은
그 교제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 그 모임은 강력해지는 겁니다.
우리는 서로 만날 때 그 안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역동성이 일어납니다.
만날수록 에너지가 생겨요.
만날수록 생명이 넘쳐나는 겁니다.
거의 죽어가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사귐 안으로 들어오면
막 살아나는 겁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여기서 나옵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초대교회 안에 핍박이 일어나니까 모이는 것이 위험해졌습니다.
모이다가 막 체포당하고 감옥에 가고..
모이면 모일수록 위험해지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반대와 어려움이 오니까 더 모이자' 이런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맞죠.
그럼 모여서 뭘 하느냐?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주님은 직접 격려하고 위로하실 수 있지만
성도들을 통해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여러분, 서로 격려해 보세요.
작은 일에도 격려해 보세요.
격려가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우리 모든 사람은, 겉은 화려하게 꾸미고 다녀도.. 다 격려가 필요해요.
그러므로 서로 격려해 주세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입니다.
공동체 안에 붙어있는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붙어 있으면 이겨요.
여러분, 기도를 해도 홀로도 하지만 공동체와 함께 기도해 보세요.
공동체의 기도에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기도문을 보세요.
주어가 단수가 아닌 복수로 된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말은 뭐냐면, 주기도문은 홀로 하는 기도가 아니에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공동체가 함께하여 드리는 기도예요.
그러니까 기독교 역사 속에 보면
기도는 개인 기도가 먼저가 아니고, 공동체 기도가 먼저예요.
함께 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배도 홀로 드릴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공동체적인 예배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구체적으로 경험합니다.
그 안에서 생명력을 경험해요.
공동체 관계 안에서.. 그 안에서 영적교제를 깊이 나눠 보세요.
그 안에서 우리는 승리하게 하는 힘이 나온다는 것을 느껴요.
지금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관계에 거리를 두게하고
공동체의 모임이 훼손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마귀가 관계를 흐트러버리고, 공동체를 분산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시고
공동체 안에 깊이 들어오시고, 공동체 붙어 있어서..
그러면 그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히 모든 유혹을 이기게 하시고, 모든 시련도 이기게 하시는
능력과 생명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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