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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1182 감동을 주는 지도자

LNCK 2008. 3. 22. 22:14
 

◈감동을 주는 지도자                            편집 글

 

앞서 [1148 감명을 주는 지도자 ]에 이어

계속적으로 [감동을 주는 지도자]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날 시대의 모델이 되는 참된 지도자는

감동을 주는 지도자’입니다. 큰 '업적' 이전에 '감동'입니다.


 

◑1. 성 프랜시스.. 고르바초프를 감동시키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통해

소련 공산당을 무너뜨린 공로로 길이 역사에 기억될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성 프랜시스의 영향과 감동을 받았다고 하니,

결국 소련의 개혁과 개방은, 성 프랜시스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정치가, 장군이 아니라,

성자聖者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래는 연합뉴스 기사에서 발췌)

미하일 고르바초프(77) 전 소련 대통령이 기독교 신도임을 처음으로 시인했다.

08.03.19.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무덤을 깜짝 방문한 자리에서다.

소련의 마지막 공산주의자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는, 딸 이리나와 함께

프란체스코의 무덤 앞에서 30분간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는 "내게 성 프란체스코는 또 다른 그리스도"라며

"그는 나를 매료시켰고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이번 방문으로 고르바초프가 겉으로는 무신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은 기독교도일 것이라는 수 십 년간의 소문이 사실로 확인됐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부모도 기독교도였다.

특히 그의 장인, 장모는 신앙심이 아주 깊었으며,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집에 성상을 모셔두고 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냉전시절 측근들에게

아무래도 고르바초프가 ‘남들 모르게 기독교를 믿는 사람(closet believer)’

인 것 같다고 수도 없이 말했었다.


고르바초프는 "나를 교회로 인도한 분이 성 프란체스코였기 때문에

그의 무덤에 온 것은 아주 중요하다"며

"가톨릭 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이토록 중요한 장소에 있다는 게 너무 감동적"

이라고 말했다.

 

 

◑2. 루비 켄드릭..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지금으로부터 꼭 백 년 전(1908)에 한국에서 죽은

한 미국 선교사의 묘비문이

백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성도들의 마음에 여전히 살아 있어

잔잔하면서도 끈끈한 감동을 주고 있는데...

 

 

마포구 합정동 선교사 묘지에 가면,

루비 켄드릭 선교사(Ruby Kendrick, 1883~1908) 비문에

이런 감동적인 글귀가 적혀 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만일 내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한국을 위해 다 바치겠다는 고백이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는,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왔다.

황해도 개성에 있는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한국에 온지 1년도 못 되어, 1908년 6월에,

급성 맹장염으로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07년 9월, 미국에서 파송을 받았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후에,

자기를 파송한 미국 텍사스 주 남감리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기록되어 있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그래서 그의 비문은, 그가 보낸 편지에서 채택한 것이었다.

외람된 말이겠지만, 사람은 자기 말에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다.)


편지가 배를 타고, 미국 서부 연안에 도착하고,

다시 기차를 타고 텍사스까지 배달이 되었다.


마침 그 때는, 그 텍사스 모교회에서 여름 청년수련회를 열고 있었다.

청년들이 모여서 신앙수련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이 편지가 읽혀져서,

거기 참석한 많은 청년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

‘정말 저렇게 한국을 사랑하는구나!’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한국에서 전보가 왔다.

몇 달 전에 그 편지를 보낸 루비 켄드릭 선교사가

1908년 6월 9일에 맹장염 수술을 받았는데,

10일 후인 6월 19일, 갑자기 소천했(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수련회에 참석 중이던 청년들은 마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24살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가서, 1년도 못 되어서 세상을 떠난,

루비 선교사의 순교자적인 삶, 사랑, 헌신에 그들은 크게 감동 받았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들에게 가서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조선으로 오라고 일러 주십시오!”


그녀의 말은 텍사스 청년 수련회에 전달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에 선교의 불씨를 지폈다.

그들 중 20명이 조선으로 선교사로 달려왔고,

나머지 청년들은 해마다 헌금을 모아

조선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의 선교비를 지원했다.


그녀가 끼친 감동은 텍사스 청년들뿐만 아니었다.

그녀가 소천한지 1백년이 되는 지금,

많은 한국의 청년,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많은 웹사이트와 언론을 통해 그녀의 사적이 알려지고 있다.)


그녀는 짧은 삶을 살다가 갔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큰 감동을 미치며,

영원토록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3. 손양원 목사님.. 인요한 소장을 감동시키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분을 미쳤다고 했지만 그 분은 원칙과 사랑을 지켜냈다.

그런데 그의 정신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꼭 손 목사의 묘지를 찾는다.

그곳에 가면, 내가 힘들어했던 문제들이 너무 창피해진다.”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인요한(47, John Linton) 소장이

사도 바울 이후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며 소개한 사람은

바로 손양원 목사다.


1895년 초대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유진 벨 목사를 시작으로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인 소장은

CBS TV <정범구의 시사토크 누군가?!>에 출연,

교회 본연의 모습과 정신을 그대로 실천한 한 사람을 소개했다.

바로 그의 정신적 토양인 손양원 목사다.


방송에서 인요한 소장은

“손양원 목사는 일제 땐 신사참배 문제로 옥살이를 했고

해방 후엔 여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을 죽였던 사람을 총살 직전 구해내

집으로 데려왔다"며 "또 6.25 땐 피난가려고 배에 올랐다가

남아있는 한센병 환자들이 불쌍해 죽을 줄 알면서 배에서 뛰어내려

결국 총살(순교)당했다”고 설명했다.


인요한 소장은 전라도 사투리가 너무 자연스러운 토종 한국인이지만

국적은 미국인. 미국에서 4년간의 수련의 기간을 마치고

미국에 눌러앉을 수도 있었지만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인 소장의 형 스티븐 린튼은 1995년 <유진 벨 재단>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북한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인요한 씨를 한국인 보다 더 한국인답게 자라게 한 인물은 바로

아버지 휴 린튼이다. 아버지의 한국 사랑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전해졌단다.


그는 “아버지는 600여 교회를 ‘세웠다’고 하지 않고 ‘관여’했다고만 말했다.

그의 꿈은 전국의 농어촌에서 교회를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큰 지도를 펴고 교회가 없는 곳마다 교회를 지으려고 애를 썼다”고

방송을 통해 밝혔다.


이날 방송에서 그는 “아버지는 항상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한 때는 그 모습이 너무 창피했다.

그는 자신의 옷을 팔아서라도 남을 도울 사람이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한 게 후회된다.

아버지에게 호강을 시켜드리지 못해 너무 안타깝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4. 찾아가지 못한 가방이 주는 ‘감동’

 

(영국 런던 교외에 WEC International, 즉 국제복음선교회가 있습니다.

몇 해 전 그곳을 다녀온 강윤식 집사님의 글입니다.)

 

WEC International은 20년간의 선교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C.T. Studd가

1913년, 다시 20년간의 아프리카 선교를 새로 떠나기에 앞서 설립한 단체입니다.

 

그 분은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는,

명문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인기 절정의 크리켓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그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중국으로 떠납니다.

 

우리로 치면 마치 박지성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캄보디아 선교를 간다며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출국해 버리는 것과 같은 신선한 충격을,

그 분은 당시 영국민들에게 주었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와서)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던 그 분은

끝내 아프리카에서 뼈를 묻습니다.

아프리카에 머물던 20년 동안 그 분은

영국에 남겨 둔 가족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는 그만큼 먼 나라였습니다.

 

그 분이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뒤,

그 분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받들어

WEC(웩)을 오늘의 모습으로 일구어 놓았습니다.

 

그 WEC 본부의 지하실에 내려가면 수 십 개가 넘는 가방들이

바닥과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심이 사실이라면,

그분을 위해 내가 그 어떤 희생을 한다 해도 그것은 결코 크다 할 수 없다.”

"If Jesus Christ be God and died for me,

then no sacrifice can be too great for me to make for Him." -C.T. 스터드, WEC 인터내셔널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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