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8

1191 유다가 장자적 축복을 받은 이유

LNCK 2008. 3. 28. 13:23
 

◈유다가 장자적 축복을 받은 이유         창49:1~12




◑유다가 (정신적) 장자가 된 이유


야곱의 12아들 중 넷째인 유다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정신적, 실질적 장자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공동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 몸을 던져 그것을 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참된 지도자, 역사에 남는 지도자는,

공동체가 위험에 처할 때, 자기 몸을 아낌없이 던지는 사람입니다.

자기 온 몸으로 위험을 막아내는 사람입니다.  요10:15참조



▲르우벤의 탈락

혈통적으로 말하면 장남 르우벤이 장자적인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품위도 있고 능력도 탁월하지만  창49:3

장자다운 행동을 하지 못하고, 아비의 첩 빌하를 범하게 되므로

장자의 위치에서 탈락되었습니다. 대상5:1


이것은 근친상간의 음행 말고도,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성을 정복하면, 정복의 표시로 그 왕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도 다윗의 후궁을 취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지도자에게 도전해서는 안 됩니다. 탈락합니다.



▲시므온, 레위의 탈락

그러면 자연적으로 장자권이 둘째 시므온, 셋째 레위에게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므온과 레위 역시 장자의 위치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잔해 하는 기계’였기 때문입니다. 창49:5


창34장에 누이동생 디나가 세겜 땅에서 겁탈 당하자

세겜 땅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을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할례를 행하고 3일째 되는 날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에 들어가

거기 있는 남자들을 칼로 다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자,

베드로는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예수님은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혈기를 부리는 자는, 혈기로 망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므온과 레위가 장자권에서 탈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장자권이 5째, 6째 등 동생들에게 넘어가지 않고

넷째 아들 유다에게 머무르게 된 이유는,

그가 <책임지고 희생할 줄 아는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몸을 던진 유다①

창43장에 보면, 야곱이 살던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동생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들을 정탐군으로 몰아 형제 중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두고

고향 땅에 있는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정탐꾼의 협의도 벗어지고 시므온도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형제들이 사실대로 아비 야곱에게 이야기했지만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것만 해도 가슴에 한이 맺히는데

어찌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고자 하느냐면서 거절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기근이 심하니 야곱이 허락을 하는데

그때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나아와 하는 말이


43:9절, 내가 그의 몸을 담보 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베냐민) 책임을 물으소서.

즉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장자적 반열에 서서 장자적인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책임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책임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는 장자적인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장자적인 사명을 맡기시고

장자적인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



▲몸을 던진 유다②

요셉은 무슨 이유인지, 트릭을 써서 베냐민을 붙잡습니다.

형들은, 과거에 요셉을 팔아버렸듯이, 이제 베냐민을 버리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원하던 양식도 얻었고, 자기 목숨 위태할 것 생각하면, 베냐민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이제 달라졌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 때도 유다가 선봉에 섰습니다.

자기를 대신 붙잡고, 베냐민은 놓아 달라고 탄원합니다. 창44:33  


사람의 본능은, 위험에 처하면, 제 살 것부터 궁리합니다. 제 목숨부터 찾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위험 상황에 자기 몸을 던졌습니다.

언제나 지도자는, 위험 상황에 자기 몸을 먼저 던집니다.

자기 몸부터 피하는 사람은... 절대 지도자로 쓰임 받지 못합니다.

 

지도자가 되려고 소원하십니까?

위험한 때에, 먼저 자원하시기 바랍니다.

꽁무니부터 빼는 사람은, 지도자 위치에 서 있어도, 진정한 지도자는 아닙니다.



◑12지파의 선봉이 된 유다 지파


▲12지파의 캠프(진)에서 선봉은 유다지파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민1장에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장자 르우벤 지파부터 실시합니다만

민2장에 진배치를 할 때는 유다 지파부터 먼저 합니다. 


민2:3절 이하에 보면 진배치가 시작되는데

항상 성막을 중심해서 사방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는데

유다지파는 동쪽 해 돋는 편에 진을 치게 합니다.


이 ‘동쪽’은 해 돋는 쪽으로 12지파 중 가장 중요한 자리를 의미합니다. 민2:3


진이 행진을 할 때도, 동쪽 유다 진영이 가장 선봉에 서서 행진합니다. 민2:9

그 다음에 남쪽 르우벤 진영이 두 번째로 따라 움직입니다. 민2:16

           

그들은 제 일대로 진행할찌니라  민2:9

제일 앞장 서 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신앙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십자가 신앙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주님 따라가더라도 멀찍이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

앞장 서는 자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장자적인 복을 누리는 자의 특징은

항상 주의 일에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들이 머뭇머뭇 거릴 때,

두 번 모두(↑) 유다가 앞장서서 몸을 던진 이후,

그의 자손들인 유다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앞장서서 가는 선봉부대가 된 것입니다.


그럴 때 계7장 천상에 가보니

유다 지파가 장자의 반열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7:5



▲단 지파가 탈락한 이유

그리고 계7장에 천상에 가보니 단 지파는 빠져 있습니다.

단 지파가 왜 천상교회에는 빠져버렸습니까?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창49:17


단 진영(단, 납달리, 아셀)은 출발하면 제일 뒤에 가서 붙습니다. 민2:31             

뒤에 따라오는 사람 특징이 무엇인지 압니까?

항상 부정적이 되어 앞서 가는 사람 뒤통수를 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교회에서 떠나고 없어요. (계7장에 누락)


여러분, 항상 주의 일 할 때는 앞장서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유다같이 장자적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유다가 누린 장자적인 복이 어떤 복입니까?



▲1. 찬송이 되는 복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창49:8

 

유다는 이름 자체도 ‘찬송’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물이란 뜻이지만

이 말은 다른 형제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칭송을 받는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누군가 장자처럼 책임과 희생을 다한다면

그는 그 가문의 영예요, 형제들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렇게 자기 가문을 일으켰습니다.


예수 믿고 장자적인 신앙에 눈이 뜨여져

가문을 일으키고, 교회를 일으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창49:9


사자는 권세를 말합니다. 능력을 말합니다.

계5:5절에 예수님을 가리켜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라고 했는데

유다 지파 사자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은

죄와 마귀의 권세를 깨드리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자는 권세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형제들에게 본이 되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쌀가마니 질수록 더 잘 진다.

우리가 무거운 것 짐이라고 들지 아니하면

힘이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점점 힘이 없어집니다.

반대로 무거운 것 지다 보면 힘이 더 생기고

더 무거운 것도 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쌀가마니를 저 본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쌀가마니 80Kg을 등에 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등에 지다보니, 나중에는 쌀가마니 등에 지고 뛰어갈 수도 있더라고요.


누가 하나님 앞에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큰 책임을 지는 직분자일수록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다스리는 권세를 받음


규(왕의 지휘봉)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49:10


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유다 지파에서 왕이 이어지겠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유다 지파에서 다윗과 그 자손들이 왕통을 잇게 됩니다.


그러나 풀핏 주석에 이 규(홀)는                                     

이 땅의 왕권 이상, 하나님의 성역에 참여할 수 있는 권세를 말한다고 합니다.

눅19:11절 이하에 므나의 비유가 나오는데,

한 므나 받아서 열 므나 남긴 종은, 열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합니다.


므나의 비유는 오늘날 ‘직분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직분 - 바로 '성역 참여권'입니다.

우리가 어떤 책임을 지느냐에 따라                               

거기에는 그 만한 특권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10고을, 5고을 다스리는 왕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들려주신 홀, 그 권세를 잘 사용하여

하늘나라에서 5고을, 10고을 차지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4. 유다가 받은 축복 중 가장 큰 복은?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49:10

 

실로가 무엇일까요?

 

①‘실로’는 평화와 안식을 의미합니다.

실로는 살렘(salem)이란 말과 같은 어근으로서 평화를 의미합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말은

달리 말하면 ‘평화롭게 하시는 자가 오실 때까지’ 란 말입니다.

‘안식을 주시는 자가 오실 때까지’ 란 말입니다.


②‘실로’의 또 다른 의미는 <보냄을 받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아들>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란 달리 말하면, <아들이 오시기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다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요

인자 곧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실로’란 애칭으로 사용했습니다.


▲만약에 이 대목이 없다면 야곱의 생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렇게 고생해서 고작 기근을 피해 고향산천을 떠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과 연단의 세월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자기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아니했다면

“야곱의 생애는 일생 고생만 하고, 불행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순간 그리스도 예언을 위해, 그의 평생에 연단하신지도 모릅니다.


예수가 없는 인생,

예수가 드러나지 않는 생애는... 절대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깨어지고 부서졌더라도

예수를 말하고 증거하는 생애라야 성공한 생애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생애가 되었습니다. ★



▲예수를 증거하는 가정이... 가장 명문 가정

야곱은, 바로 ‘예수 비전’을

가문의 장자적 사명을 이어갈 유다에게서 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의 꿈과 야망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라면

자기의 그 꿈과 야망이 이뤄질 수록 삶은 더 허무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자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비전이 있다면

그 비전은 바로 축복 중에 축복이요.

내 생애에 가장 큰 비전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12지파는 그들의 민족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실로를 기다림’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의 시작이었으며 전부였습니다.



▲5. 유다가 받은 세상적인 복

유다는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가장 좋은 가지에 맬 것이다.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보다도 희리로다 창49:11~12


과수원 주인이 소를 사과나무에 매지 않습니다.

그것도 ‘가장 좋은 가지’에 더더욱 매지 않습니다.

농부는 자식만큼이나 나무를 아끼는데, 어떻게 맬 수 있습니까?

이 말은 그만큼 물질적인 복이, 아끼지 않을 정도로 풍족하겠다는 뜻입니다.

      

포도 농사 얼마나 잘 되었으면 옷을 포도주에 빨겠습니까?

우유를 얼마나 마셨으면 이빨이 희겠습니까?

그만큼 풍족한 물질적인 복을 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 될 줄 믿습니다. <08.01.13. 인터넷 설교 정리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 http://blog.daum.net/bible3/14371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