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의 “죄 죽이기” 에서 발췌 갈5:17 출처
존 오웬은 1616년 영국 옥스포드에서 출생하셨다.
15세에 옥스포드 퀸스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았고,
옥스포드 대학의 교회 감독과 부총장을 역임하였고, 올리버 크롬웰의 군목을 하였다.
오웬은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 혹은
"청교도 황태자"라는 수식이 붙는 최고의 학자이다.
[죄 죽이기.....]
종교 개혁 이후에 가장 문제가 되는 신앙의 모습은
아마도 "오직 은혜"만을 강조함으로 오는 신앙의 방종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과 성화가 이루어지기에
사람의 역할과 책임이 필요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는 사람의 반응이 필요하다.
오웬은 그것을 "죄 죽이기"라는 주제로 잘 풀어내고 있다. (이 단락 펀 글)
◑죄가 우리를 이기거나, 우리가 죄를 이기거나
▲저항 안 하면 정복당하고, 싸우면 이깁니다.
자기는 항상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과 주님을 위한 일만을 해왔으니
내주하는 죄가, 자기가 한 것을 부패하게 한 적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어쨌든 내주하는 죄가 그러한 수작을 우리가 사는 날 동안 내내 벌일 것입니다.
만일 죄가 항상 활동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그 죄를 항상 죽이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갈피를 잃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두 배로 세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정복을 당하는 결과를 맞게 될 것이 뻔합니다.
▲싸움은 하루도 쉴 날이 없습니다.
죄가 교활하여 언제나 틈을 엿보고 있으며,
강하여 항상 우리 영혼을 죽이는 작업을 줄기차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미련하여
죄가 가져올 파멸에 자신을 방임하고 있다면,
어디서 위로 받을 것을 고대할 수 있겠습니까?
죄가 우리를 뒤엎거나, 우리가 죄를 뒤엎거나,
죄가 우리를 이기거나, 우리가 죄를 이기거나
하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는 항상 그러합니다.
죄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타협을 이루어내고
이 싸움의 전투를 중지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단한 전투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어떤 날 단 하루만이라도 그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면
(그가 순종의 영성과 죄의 교활성에 대해서 잘 아는 성숙한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그 사람은 ‘내주하는 죄 죽이기의 의무’에 관하여
자기 영혼에게 “내 영혼아, 편히 쉬거라”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내주하는 죄의 어지럽게 하는 반역적 활동에서 건짐 받기를
간절하게 열망하는 성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단한 전투 외에는 그 죄를 이기고 안전하게 설 방도가 전혀 없음을!>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죄는 ‘조용하게’ 활동합니다. 쉴 때가 없습니다.
죄는 우리 안에 거하고 있을 분 아니라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육신의 행실을 넘어뜨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만약 죄가 우리를 내버려둔다면, 우리도 죄를 내버려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아주 가만히 있어 보이는 때에도, 사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물이 조용하게 흐르고 있을 때에는, 가장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모든 상황, 심지어 죄가 작용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때조차
죄를 대항하여 이길 방도를 항상 강구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도 죄의 소욕이 있으며, 그것이 죄의 행동을 유발합니다.
죄가 우리 안에 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항상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습니다(롬7:23).
한편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은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십니다”
(약4:5). 그러한 싸움은 그치지 않고 계속 되는 일입니다.
▲죄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내 안에서 서로 싸웁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갈5:17),
정욕은 여전히 유혹하며 죄를 잉태합니다(약1:14).
정욕은 모든 도덕적 행위 안에서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거나,
선한 것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게 심령을 분산시킵니다.
정욕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같은 원인으로 인해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않는 것이거나,
아니면 내가 마땅한 바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모든 거룩한 일들이 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5:17).
그것이 우리 심령의 안정된 틀을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 “얽매이기 쉬운 죄”(히12:1)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서 사도는 심각한 고민을 토로합니다(롬7장).
그러니 그 죄는 항상 활동하고 있고, 항상 악을 잉태하고 있으며,
항상 죄악을 행하게 꼬드기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완벽’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짓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성숙, 장성할 수는 있으며, 그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마5:48)
▲날마다 새로워지려고 애써야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주하는 죄가 어느 정도,
어떤 분량으로 우리 속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내가 이미 얻었다. 온전히 이루었다” 말하지 않습니다(빌3:12).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고후4:16).
그리고 새 사람이 새로워짐에 따라 옛 사람이 무너지고 썩어 문드러집니다.
우리는 지상에 있는 동안에 “부분적으로만” 압니다(고전13:12).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가라감에 따라”
남아 있는 어두움이 점차 제거 됩니다(벧후3:18).
▲죄의 소욕을 죽여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와 더불어 의지적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육체가 성령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총명에 있어서 뿐 아니라
실천적인 순종에 있어서도 결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갈5:17, 요일1:8).
우리는 ‘사망의 몸’(로마서 7:24)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몸의 죽음”을 통해서뿐입니다.
지금은 <죄를 죽이고 못살게 구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으니 죄를 죽이는 일을 항상 하고 있어야 합니다.
원수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자가 그 원수가 살아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원수를 강하게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갈6:9, 히12:1, 고후7:1)
<존 오웬- "죄 죽이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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