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인가, 은사인가? 행19:11~20
바울의 전도 여행 중에, 가장 큰 능력과 기적을 베푼 도시가 ‘에베소’ 이다.
사람들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갖다 덮어도, 환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런 에베소에서, 바울은 <은사 집회>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말씀 사역>을 고집하는데...
◑신자는 기적과 신유를 반드시 믿어야 한다.
오늘날 혹자는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유의 역사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바울을 통한 기적의 역사
바울을 통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났다.
바울이 지니고 있었던 손수건(텐트 만들 때 머리에 썼을 것으로 추정)이나,
앞치마(작업용 앞치마)를 사람들이 가져다가 병든 자 위에 얹었더니, 행19:12
그 자리에서 병이 떠나가고 병자가 일어났다.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사람들은, 바울의 소지품을 마치 부적처럼 사용했지만, 그래도 능력이 나타났다.
▲베드로를 통한 기적의 역사
이것은 비단 바울에게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
베드로가 지나가는 길목에, 사람들은 환자를 침상 채로 가져와 뉘었다.
‘혹시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쏘일까’ 해서 였다. 행5:15
어떻게 보면 미신적인 행위 같아 보이지만,
어쨌거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도 역사하셨다.
▲사도뿐만 아니라, 집사와 신자도
이런 것은 12‘사도’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집사’ 스데반도 은혜와 능력이 가득해서 민간에 각종 기사와 이적을 행했다. 행6:8
‘집사’ 빌립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안수 기도한 것도 아니다.)
많은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그리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행8:6~7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면,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약5:16
여기서 ‘서로’라는 말은, 문맥을 보면 ‘사도’가 아닌,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도 동일하신 하나님
당시에 바울, 베드로, 스데반, 빌립, 일반 신자들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13:8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이 거의 소멸되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들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잘못된 태도다.
당시 바울을 통해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셨던, 바울의 하나님은 오늘날 어디계신가?
베드로와 빌립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내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기적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행하시는 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기적을 행하게 하시니... 행19:11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인데, 바울의 몸을 빌리신 것이었다.
사람이 행한 기적, 신유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기적을 믿어야 한다.
가끔 저(설교자)도 성도님의 부탁을 받고 안수 기도를 해 드릴 때가 있는데,
며칠 후에 그가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제 병이 나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제가 놀라서 다시 되물어본다. “집사님, 정말 나았어요?” (일동 웃음)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울이 ‘은사집회’를 열지 않은 이유
만약 이런 기적적인 능력이 우리 안에 항상 상주하고 있으면,
기독교를 의심,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보란 듯이 증거가 될까?
얼마나 교회가 살아날까?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더 깊이 살펴 보아야 한다.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없기 때문
바울은, 이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처럼, 자기 호주머니에 담고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나누어 주고 싶을 때, 또한 자기가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얼마든지 마음대로 꺼내어 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역사하실지... 바울은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모월 모시 모처에서 능력집회를 엽니다!”하고 미리 알릴 수 없었다.
바울은 성령에게 쓰임을 받기는 했으나, 성령을 부리지 않았다.
성령에게 명령, 강요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성령에 철저히 의존적이었다.
바울이 하고 싶을 때 하고, 말고 싶을 때 말고 하는...
성령님이 자기 소유가 아니지 않는가!
어느 날 보니, 기대도 안 했는데도...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어느 날 보니, 기대를 많이 했는데도... 아무런 표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때 그 때 다르다.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
물론 인간 측 파트너의 변수도 조금 있겠지만, 주도권은 당연히 하나님께 있다.
성령의 나타남의 역사는 우리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성령은 자유롭게 임의대로 역사하신다.
바울은 그저 성령님의 즉각적인 인도하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은사집회 - 조심해야!
그러므로 사설 기도원에서 벌어지는 은사 집회가
성령을 부리고, 명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조작’으로 나가게 된다.
인간적인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은 줄로 믿으라!)
또한 그런 ‘종’을 신격화하는 일이 일어날까봐 조심해야 된다.
그러므로 이런 은사집회를 미리 선전하고, 광고하는 일도 바람직하지 못할 수 있다.
▲은사를 사모해야 하지만,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
제가 지금 여러분께
‘은사가 필요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관심 갖지 맙시다!’ -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은사, 능력, 표적’에
오늘날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면에 여러 모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좀 더 많은 능력을 사모하며, 더 다양한 은사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만, 성령의 능력을 자기 임의대로 부리려 하는 일에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바울은 말씀 사역에 주력했다.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결론
바울은 지금 2차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의 앞치마와 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자에게 얹으면 낫는 희한한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의 중심은 <말씀 전파>에 있었다.
바울은 처음에 3달 동안,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다. 행18:8
그러자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이 생겼고, 바울은 그들을 떠나,
말씀을 믿는 신자들만 따로 데리고 나와 두란노 서원에 가서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다. :9
그 일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자 아시아에 있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계시록의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바울이 2년 동안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강론하는 기간 동안에
각처로부터 거기에 와서 말씀을 배운 신자들이,
또는 거기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배운 자들이
주변 각 도시로 흩어져 나가 세운 교회들이라고 신학자들은 믿고 있다.)
성경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다음과 같이 결론 짓고 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19:20
바울은 에베소에서 앞치마, 수건만 가져다 덮어도 병자가 낫는
희한한 기적과 은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도구삼아, 은사집회 열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지 않았다.
그런 방식을 복음전파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다.
다만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파한 것이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바울이 행하는 <기적을 보고> 몰려들었다’고 결론짓지 않는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점점 더 퍼져 나갔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날마다 강론했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날마다 가르쳤다.
1주일에 1번이 아니었다. 주일과 수요일에 2번이 아니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하자, ‘말씀으로 인한 핍박’도 일어났다. 막4:17
유대인들이 그 말씀에 대적하고 일어난 것이다. 행18:8
여러분, 말씀 사역에 치중하시면, 부딪히게 된다.
비난이 자기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
그 때 ‘청중들의 반응, 효과’를 생각했더라면, 바울은 방향을 바꾸어
말씀을 포기하고, 사람들이 호응하는 은사집회로 방향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싶었을 런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10번 중에 9번 실패하고 1번만 기적이 일어나도,
우루루 그 능력의 종을 따르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성령을 자기가 임의대로 부릴 수 없으니까)
바울은, 말씀 증거로 인해 핍박이 일어나자,
이제 말씀을 잘 듣는 무리만 따로 떼서 그들을 두란노 서원에 데리고 가서
<계속적으로> 말씀사역에 치중했다. ‘말씀 중심’의 자기 원칙을 타협하지 않았다.
▲마치는 말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지나온 역사를 볼 때, 교회가 쇠퇴하는 시기는
항상 말씀 강론이 쇠퇴하고, 설교가 쇠퇴하는 시기였다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와 설교자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사실은
‘설교가 쇠퇴할 때 교회가 쇠퇴하더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지난 교회 역사를 통해 보면, 사실fact로 드러나 있다.
말씀과 은사 - 이 둘 중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하자는 뜻이 아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가야 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전혀 없는 것도... 올바른, 권장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등한시 하고, 은사 위주로 신앙생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말씀을 열심히 전하다 보면... (나중) 성령의 은사와 능력도 반드시 뒤따른다.
그 우선순위를 잘 가려서 섬겨야 할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신기한 기적이 많이 나타난 것은
그만큼 말씀을 열심히 전했다는 증거가 되겠다.
말씀이 내 신앙 중심에 바로 자리 잡고 있으면,
어떤 은사가 들어와도, 말씀이 그 은사들을 모두 다 컨트롤 한다.
한 쪽으로 치우쳐 극단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은, 여러 다른 은사를 앞에서 끌고 가는 기차의 ‘기관차’와 같다.
그렇지만 은사가 기관차가 되어, 내 신앙을 끌고 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지난 교회 역사의 교훈이다! <08.03.02.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주제별 분류] 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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