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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관념적 믿음, 실제적 믿음

LNCK 2008. 4. 21. 16:34
 

◈관념적 믿음, 실제적 믿음                         요1:45-51


*출처 : 성경과의 만남 신학과의 만남, 정리

 


아브라함의 관념적 믿음 과 실제적 믿음


▲약속을 믿고 출발은 좋았는데...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그의 일생이 전개됩니다.

네 부모와 친척, 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떠나라고 합니다! 


이 명령을 받고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떠나는 아브라함에게 2가지 약속을 해주십니다. 


하나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이고, - 시간적인 축복이요,

또 하나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 공간적인 축복입니다. 


그래 아주 상징적인 중요한 의미를 가진 2가지 복을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십니다. 이건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당장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땅의 약속’ - 시원찮게 보일 수도 있었다.

이 약속을 믿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납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와서 정착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마" 약속하시지만,

그러나 무슨 지정표도 없고, 땅문서도 없습니다. 


어쨌든 네가 지금 보는 이 땅, 네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일단 거기에 (믿음으로) 거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땅에  거하면, 평안하고 풍년이 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땅을 끝까지 지키지를 못하고, 애굽으로 피난을 갑니다. 

식량을 구하러 가게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선택이 일단 실수하게 됩니다. 

 

▲‘아들 준다는 약속’ - 더디다.

또 한 가지는 자식을 주신다고 했는데 10년을 기다려도,

십년이라니... 참 긴 시간입니다, 자식이 태어나질 않습니다. 

점점  나이는 먹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법을 써서, 서자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자 이렇게 세월이 흐릅니다. 

약속한 지 25년 지나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년 이 때에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급기야 때가 되자... 막상 못 믿었다.

자기 나이 벌써 100세가 가까웠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말씀할 때

"오 하나님, 할렐루야 아멘" 뭐 이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럴 수 없었어요. 나이가 많았거든요. 

자기 아내가 단산한 것도 알아요. 

그러기 때문에 창세기 17장 17절에 보면 엎드려 웃었다고 그랬어요.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어요. 

‘이거 참 하나님 웃기시누만’ 뭐 그런 거예요. 좋아서 웃은 게 아니에요.  

믿을 수가 없어서, 기가  차서 웃은 거예요.  그리고 중얼거렸어요.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니 어찌 생산할 수 있으리요!"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으며 살아왔고, 이제 기다리면서도

막상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에

더구나 이는 시한부예요, "내년에"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아멘!"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렇게 기가 차서 웃고 있는 아브라함, 좀 미안하지만 만약 제가 하나님 입장이라면

"너 왜 믿음이 없냐? 약속 취소다!" 그럴 거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어요.  

나약함을 알고 아브라함의 그 부족함을 다 이해하시고

"네가  웃었느니라. 그러나 아들은  낳을 것이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참 고마우신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그 약속의 성취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허물을

하나님이 다 덮어주셨어요. 


▲이 설교의 주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원도 항상 있고, 기대도 항상 있어요. 

엑스펙테이션(Expectation), 대망이 있어요. 


그러나 이 약속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데 대해서... 믿음이 없어요. 

구체화되고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함이 있어요.

(믿음이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적이지 못하고, 관념적 믿음이었다는 뜻이죠)


더구나 나를 통해서 역사한다고 할 때,

허물 많고 부족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

그것을 내가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관념적으로 믿지, 실제로는 안 믿는다.


▲나에겐 무슨 문제가 있다.

데이빗 J. 리버만Lieberman이 Instant Analysis 라는 책을 써서

온 세계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책이에요.

<나에겐 분명 무슨 문제가 있다> 라는 내용의 책입니다. 


이 책에 내 문제 77가지를  지적해 놓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일리가 있어요. 

다 나와 관련이 있는 얘기입니다. 나를 향한 얘기입니다. 


첫 번째가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실패할 때 은근히 나는 즐거워한다.>  

여러분, 그래요 안 그래요? 이건 문제가 있는 거예요. 


또 마지막 77번째는 뭐냐 하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장을 바꾸지 않는다> 입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생각을 고치려고 하질 않아요. 

익숙한 것에 매여서 생각을 돌이키질 않아요. 그게 망조죠. 


▲관념적으로만 믿었지, 실제로는 믿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메시야 대망사상Messianic Expectation은 있었습니다.

그건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 장소와 시간을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장소, 즉 베들레헴에 나실 거라고.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다가도, 진작 메시아가 왔다 하니까... 안 믿어요. 

이게 인간의 결정적인 허물입니다. 


멀리서 동방박사가 찾아와서 '여기에 메시아가 났을 텐데, 어디에 났을까요?'

그 때 저들은 성경을 연구했던 대로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요.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해 주고,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으로 가게하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은 소동했다’ 그랬어요.  

메시아가 태어났다는데, 소동을 하기만 하고... 그 뒤에 한 절이 빠졌어요. 


내가 답답한 건 그거예요. 

‘소동하고 수만 명이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렇게 기록되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동하기만 하고... 베들레헴으로 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관념적으로만 믿었지, 실제로는 안 믿은 것입니다.

 

더구나 엉뚱하게 헤롯왕은, 메시아가 났다는 말을 듣자, 당장 죽일 생각만 해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예수가 와서 역사 할 때, 모두가 예수를  메시아로 보고 있는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이런 사람들은

결국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요. 


왜요?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고치고 싶질 않아요. 

메시아는 기다리면서도, 직접 오신 메시아는 영접하고 싶지 않아요. 

이것은 모순이요, 아이러니입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약속과 성취’(Promise and fulfillment)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약속은 소망하지만, 성취를 믿지 않아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약속은 ‘약속’대로 믿는다고 자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의 현장에서 고난이나 위기가 부딪히면,

‘하나님의 보호’(성취)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몹시 불안해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황해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해결하는 방법을... 인간적으로 모색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하면서도... 관념적이지, 실제로는 인간적 수단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을 그저 어렴풋한 희망 정도로만 믿는 사람은

마치 멀리 바라보는 무지개처럼 믿고 싶어 하는 

감상적이고 관념적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믿음의 교감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관념적으로만 믿었다.)

그런 점에서 나다나엘은 훌륭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은 구약성경을 알고, 모세의 율법을 알고,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전이해가 있고, 상당한 지식이 있어요. 


그러나 오늘 성경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자기 친구 빌립이 찾아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어디서?",

"나사렛." 


"그래, 그렇구먼. 참 감사하다. 우리 마을에 메시아가 났다며?"

이렇게  받아들여야겠는데, 이 사람 한다는 소리가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설사 선지자가 와도 우리 동네는 아니다, 이거예요. 

절대로 우리 이웃은 될  수가 없다. 이렇게 일축해 버립니다. 

(이렇게 그는 처음에는 '관념적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나야 <실제적으로> 믿게 된다.

그런데도 친구 빌립이 말하기를 "내가 진짜 메시아를 만났다" 그럽니다. 

그 때에 나다나엘은 지금까지 생각했던 성경적 지식, 자기가 생각하는 편견, 

자기의 전이해, 이런 자기 생각을 다 버리고

논리적인 생각과, 지식적 방법을 버리고,

그는 이 시간에 ‘만남’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진리추구 방법을 바꿉니다. 


만나지 않으니까 문제가 많아요.  

예수를 일대일로 인격과 인격이 만날 때...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이론을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그가 예수님께로 옵니다. 

의심도 많아요, 생각도 많아요,

일단 믿음이 가지 않아요. 하지만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예수님도 나다나엘을 믿어 주시다.  

이렇게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나다나엘이 묻기를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보았다. 

네가 내게 오기 전에 내가 너를  먼저 보았다" 고 말씀합니다. 


이 한 마디에 나다나엘은 그만 굴복하고  맙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럼 이 한 마디가 왜 이렇게 중요했냐 이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경건한 이스라엘인은 당시에 하루에 3번씩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바쁜 일을 하다가도, 시간으로 말하면  9시, 12시, 3시,

세 번만은 딱 멈추고 조용히 기도합니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묵상하며 성경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멀리서 벌써 보셨습니다. 저기에  경건한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에게도 여러 가지 생활이 있습니다. 

잠 잘 때도 있고, 밥 먹을 때도 있고

죄 지을 때도 있고, 예배드릴 때도 있고

기도할 때도 있고, 잘못된 길로 갈  때도 있어요. 


그러나 그 생애 전부 묻지 아니하시고

나다나엘로 말하면 경건의 절정이요, 경건의 피크요,

가장 경건하고 가장 거룩한 그 시간에, 예수님이 보셨다는 겁니다. 


나다나엘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진실을  알아주시고, 나의 경건을 알아주시고,

나의 이 부족한 믿음을 알아주시는 그 분을,

그 분에게 그만 감격하고 맙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믿어 주셨다는 것이죠. 

나를 찾아주시고, 나를 이미 알고 계신다는 거죠. 


나를 벌써 아시는 분에게 내가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그를 “참 이스라엘”이라고 추켜 세워주십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당신은 왕이십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이제 그는 만족합니다. 

이 한 마디로 그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주님을 <실제로> 믿어야 한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 황제가 부관과 같이 두 사람이

어느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나폴레옹 황제는 평민처럼 옷차림을 하고,

부관은 친구처럼 둘이서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식사를 잘 시켜서 좋은 식사를 하고

식사 끝에 웨이터가 14프랑이라고 하는 많은 돈 계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이 돈은 내가 내지" 그러면서 계산서를 받아들고

손을 주머니에 넣어 봤는데, 마침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황하니까 옆에 있는 부관이 "제가 내지요 뭐." 

그런데 그 사람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 두 사람 다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부관이 정중하게 말하기를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지금 두 사람 다 지갑을 가져오지 못했는데

정확하게 한 시간 후에 돈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좀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까 웨이터는 그런 대로 이해하는 거 같은데

그 호텔 주인이 나와 가지고 야단야단 하는 겁니다. 

돈도 없는 사람들이 비싼 음식을 먹고 돌아다닌다고. 

정신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해 댑니다. 지금 당장 돈을 내라고! 


그 부관이 하도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한 시간 후에 꼭 갖다 주겠습니다." 

그 웨이터가 가만히 보니까 믿음이 가요. 

"보자 하니 이렇게 거짓말할 분들은 아닌 거 같은데 이해 하십시오"

하다가 정 주인이  말을 안 들으니까, 이 웨이터가 자기 돈을 대신 냈어요. 


14프랑을 내고 "먼저 가십시오." 그래서 손님들을 보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부관이 다시 왔습니다. 

돈을 돌려주고, 주인보고 하는 말이 "이 여관 얼마면 살 수 있겠소?",

"이거 제가 얼마 전에 3만 프랑을 주고 샀는데요",

"좋아요, 여기 3만 프랑 있소. 이 집문서를 내 놓으시오"


그래서 그 호텔을 사 가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웨이터에게 주었어요.  

"이제부터 이 집은 네 거다. 너는 나를  믿어주었다.  

그것으로 나는 이만큼 기뻤다."

 

▲관념적 말고, 실제적으로 믿어야!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내게 믿어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을 믿어달라고.  


그런데 아무도 믿지를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세주를 관념(생각)적으로는 믿어도,

실제 삶에서는 믿지 못하고... 대신에 염려, 불안, 의심, 불신합니다.

(프랑스의 여관 주인처럼 말입니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실제 삶에서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실제로 믿는 자에게만,

(여관집 웨이터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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