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서 배우는 경배 / 유진 피터슨 계22:9 -출처보기-
유진 피터슨 박사님의 글을 스크랩해서 이해하기 쉽게 축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축약, 정리 과정에서 원 저자의 내용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필요한 시대
시대마다 성경의 특정한 책이 다른 책들보다 선두에 나설 때가 있다.
무너지고 퇴락한 로마 제국의 잔해 위에
‘하나님의 도성’이 형태를 갖추며 등장할 것을 바라본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그의 본문으로 삼았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종교개혁 사상의 본문으로 삼았다.
나는 이제 20세기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에서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우리 시대에 더욱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요한계시록>이
교회의 생명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고 있다.
▲20세기의 대표 언어 “잔인함”
폴란드의 시인 체슬로우 밀로즈(Czeslaw Milosz)는 최근 연설에서
우리 시대를 묘사하는 대표적 단어로 "잔인한"(cruel)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 시대는 실로 잔인하다.
우리는 세계 구도를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켜버린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현재도 만약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모든 것을 끝장내버릴 수도 있는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 하에 살고 있다.
우리가 미처 보고서를 작성하지 못할 정도로
재앙들(정치적. 도덕적. 환경적)이 신속히 증가하고 있다.
공의롭고, 평화를 가져오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위험에 처해 있다.
(정치적, 도덕적, 환경적 재앙의) 뉴스 보도가 전해질 때마다
또 다른 한두 명의 교인들이 그들의 발걸음을 돌려서 교회를 떠난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는 선포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장을 던지는 세상적인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전달하는 정보의 함성에 묻혀버리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범죄 행위가 아니지만, 그 댓가로 치러야 하는 환난의 정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대안 “경배”
(계시록을 통해 볼 때 그렇다. 유진 피터슨은 ‘요한계시록’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배와 경배의 관점>에서 일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 복음이 고상하다는 사실에 신경이라도 쓰고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슴을 치며 애통해할 것인가?
가슴을 치는 것이 전략이 될 수 없다.
요한은 애통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경배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촉구했다.
단지 경배했을 따름이다.
그는 교회 갱신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
일곱 교회의 연합 집회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했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촉구했다.
왜 경배인가?
기독교가 경멸당하고 성도들이 핍박 받는다는데 있어서
요한의 시대와 우리 시대의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환란을 당하던 성도들에게,
계시록을 통해, 사도 요한은, <경배>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본질적으로 계시록은 바로 그런 책이다.
첫 번째 장에서 우리는 경배하는 요한을 본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1:10).
마지막 장에서 그는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말을 듣는다(22:9).
1장과 마지막 22장 사이에는, 경배의 장면이 잇달아 등장한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 7나팔의 재앙이 울려 퍼지면서, 세상의 회개를 촉구했고,
성도들이 경배할 때, 7대접의 재앙이 부어지면서, 세상에 심판이 임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엄청난 세상의 파도로 인해 산만해지기 쉽다.
기독교가 무시를 당함뿐만 아니라, 개인적 환난에 의해서도 쉽게 산만해진다.
이때 우리가 이 시대를 초대교회와 비슷하게 잔인하게 공격당하는 시대로 보고,
사도 요한의 메시지처럼
산만해진 우리 마음을 "하나님 중심"으로 다시 돌려놓아야 한다.
참된 예배와 경배를 통해서 말이다.
▲‘교육 치중’보다 ‘경배’를 택하시라
나는 발견했다. 내가 그들에게 그처럼 간절히 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듣는 교인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대부분 지적이었고 확실히 예의바른 사람들이었지만,
문제는, 가슴으로 말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내가 하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 즉 새로운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논평하였으며, 그 모두를 다과회의 잡담 정도로 치부해버렸다.
또 일부 사람들은, 초대교회 당시의 니골라 당이나 영지주의자들처럼
기독교를 한낱 ‘논쟁거리’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직접 <예배의 능력>을 보여 주시라!
이런 상황에서, 교육을 잘 해서, 기독교 쇠퇴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그것이 바로 우리 미국의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해온 방법이다.
더 많고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며,
또한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통해, 선한 목표에 많은 이들을 동참시키려 했었다.
(이런 이성적인 방법이 크게 효과 없었다. 이성은 있었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는가? 왜 진리는 널리 알려지지 않는가?
왜 공의가 흘러넘치지 않는가? 왜 미국 교회가 그처럼 당황하고 있는가?
왜 윤리적으로 더 타락하고 있는가?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인간의 몫도 반드시 있다.
우리는 열심히 나가서 발로 뛰어야 한다.
그러나 먼저 경배를 통해, 거기에 몰입해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자리와 시간을 내어드려야 했었는데,
실제 현실은, 우리가 다스리고, 우리 힘으로 가르쳐서 세상을 구원하기로
너무 열심 내다가, 상황을 온통 망쳐버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다가,
그 주제가 <예배, 기도, 찬양, 임재>임을 발견하고,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이제 우리는 우리 힘과 지식으로 설득하고 뛰는 것을 내려놓고
경배와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임하셔서 일하시도록 맡겨드리자.
그렇게 영감 넘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내 지식과 열심으로 세상을 설득하려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들이 많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감정, 사고, 꿈, 사랑, 소망, 성격, 목표, 믿음 등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의 오감이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이 다스려 주셔야 한다.)
분자와 원자, 중성자와 양자,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들 등 그 외에도
사실 우리 인간이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좁다.
우리는 이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실체들에 둘러싸인 채로 살고 있다.
우리는 경배를 통해,
하나님이 그 모든 영역을 다스려 주시도록, 맡겨드려야 한다.
▲내가 해석하는바 계시록의 주제는 “경배”
요한의 광대하고도 신학적인 시poem에는 다른 많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예언과 위로, 아름다움과 확신, 경고와 축복, 수수께끼와 신비가 있다.
그러나 나는 계시록의 모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경배와 관련된 것이며,
이 모두가 우리를 경배 행위로 이끌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오늘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개발, 선한 동기 부여 등이 부각되면서,
교회를 다니지만, 참된 하나님과 만남을 체험하지 못하는 위기에 처해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너무나 많은 예배 의식이
회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있다.
요한이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았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요한은, 그들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장엄하게
경배의 장, 하나님의 존전으로 이끌어 들이려 했다.
요한의 묵시록은 이 점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우리가 참된 경배의 자리에 나아가게 된다면
더 이상 “정사와 권세"의 위협에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 [주제별 분류] 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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