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관한 최후의 말씀 계21~22장
유진 피터슨「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Reversed Thunder pp.241~261. 요약
◑새하늘과 새땅 - 하늘과 땅의 통합
성경의 시작인 창1:1은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로 시작한다.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 21:1에는 새하늘과 새땅의 선포로 마친다.
‘하늘’은 - 초월적/영적/신비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땅’은 - 반대로 실제적/물질적/현실적 요소를 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 요한이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고
‘새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이미지를 구사하는 목적은
- 기독교 신앙이 ‘하늘’과 ‘땅’의 두 요소가 함께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 극단에 빠지지 말고, ‘하늘’과 ‘땅’이 둘 다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하늘’(내세주의, 탈세속주의)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신앙이 ‘땅’(현실주의, 실재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두 요소가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하나님’이란 존재도, 하늘과 땅의 두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먼 곳 하늘에 계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땅에도 계신다.
신앙은 초월적/신비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실재적이 되어야 한다는 뜻.
사도 요한이 ‘새하늘과 새땅’이란 묵시적 표현을 도입한 이유가
그런 신앙의 양면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편집자의 이해에 따르면)
일례로, 우리의 부활도 ‘영적 부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육의 부활’도 함께 일어난다.
올바른 신앙은 영적/물질적 두 영역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주기도문도 이 두 요소를 동시에 포함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늘과 땅’ 다 포함
일용할 양식, 이웃의 죄를 용서,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하늘과 땅’ 둘 다 포함
참된 신앙은, 장차 우리가 죽어서 가는 <미래천국>적인 요소도 있지만,
이 땅에서, 우리 삶의 현실에서 이루어질 <현재천국>적 요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육’을 버리고 ‘영’만 쫓는 기독교 신앙도 잘못이며,
‘영적’인 것을 도외시한 채 ‘현실적/물질적’인 것만 몰두하는 신앙도 잘못이다.
(혹자는 둘 다 균형 있게 추구하되, 그 우선순위는 엄연히 ‘영적’인 것에 둔다.)
참된 신앙은, 현실도피도 아니다... ‘현실의 완성’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몽상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예루살렘 - 천국은 ‘전원’이 아니라 ‘도시’다.
여러분, 보통 종교나 소설에 그려지는 천국의 이미지는... 전원생활의 낙원 풍이다.
조용하고, 푸른 풀밭에 잔잔한 시내가 흐르고... 사람들은 그런 천국을 바란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천국의 중심인 ‘새예루살렘’을 ‘도시city’로 그리고 있다.
그것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예루살렘 도시’말이다.
도시의 이미지가 무엇인가?
복잡한 시장, 사람들이 웅성거림, 온갖 계층이 활발하게 왕래하는 거리 등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 요한이 은유적(묵시문학적)으로 설명하는 천국의 이미지는
<미래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라는 뜻이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도시 생활에 맥이 빠지고 진절머리 낸다.
그런데 천국이 ‘도시’라니? 실망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새예루살렘 도시’이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겠다. 새new것이란 뜻이다.
<과거주의>적 관점의 해석에 의하면,
미래의 천국에 가기 전에,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들고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이 땅위에 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온전히 이 땅에 이뤄지게 한다는 뜻과 같다고 본다.
▲바벨론과 새예루살렘의 비교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졌다. 계18:2
사도요한은, 계시록의 후반부에서 ‘두 도시’를 설명하고 있는데,
도시 바벨론은 마땅히 무너져야 할 세속적 도시이며
도시 예루살렘은 새롭게 세워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파괴하고 새로 세워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성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도시 ‘예루살렘’의 이미지
혹자는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이미지이다.
유다왕국 말기에 온갖 우상숭배, 배신, 음행, 이방의 침공으로 망한 도시이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역사를 보더라도 ‘도시’의 이미지는 ‘죄악의 온상’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으며,
니느웨, 두로, 사마리아, 타락한 예루살렘 등
언제나 사람이 모여드는 곳은... 죄악의 냄새가 강하게 진동하게 되어있다.
사도요한은 그런 ‘부정적 이미지의 도시’를 들고 나온다.
그것을 ‘새 도시, 새예루살렘’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탕자를 내버리고 새 아들 낳아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탕자 같은 사람을 고쳐서 새 아들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런 뉘앙스는 ‘12문과 12기초석’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데...
◑새예루살렘의 12기초석과 12문
12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각기 새겨져 있고,
12기초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씌여져 있다.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12지파의 이름들이라 21:12
여러분, 12지파인 야곱의 12아들들은 얼마나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었는가?
특별히 그런 사람들을 이름을 <천국에 들어가는 입구>에 기록한 것은
회개한 자들은 새예루살렘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 성에 성곽은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12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21:14
12사도를 생각해 볼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제외하고는...
거의 성경에 별로 기록이 안 나온다. 별로 많은 활약이 없었던 것을 보인다.
(나중에 다들 순교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 엄청난 성도들이 순교했다.)
그들이 새예루살렘에 중요한 기초석(주춧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현실이 아니고, 묵시적/은유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좀 지나치거나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나 사도요한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별 볼 일 없었던 9명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그것도 중요한 기초석(주춧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큰 희망을 준다.
죄악으로 점철된 예루살렘 도시도 새롭게 고쳐서 쓰시고,
허물투성이 야곱이 12아들들도 고쳐서 새롭게 만들어 쓰시고,
별 볼일 없는 12제자들도 고쳐서 새롭게 고쳐서 쓰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역사상 모든 것이 복구 가능>한 곳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 유진 피터슨 박사는 이렇게 요한의 묵시적 은유를 풀어내고 있다.
*새예루살렘의 헬라어 '새new'가 옛 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새예루살렘의 크기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1만2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144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21:16~17
해석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매우 크다>는 뜻에는 동일하다.
새예루살렘의 거룩성, 영광은,
그 주변의 신성모독적, 세속적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영화롭다는 뜻이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 고후5:17
성도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고 있는 중이다. 고후3:18
사도 요한은, 서두에 계2~3장에서 ‘땅’의 일곱 도시(교회)들에 관해 설명했다.
이제 마지막에 계21~22장에서 ‘하늘’의 도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 ‘땅’에서는 말할 수 없이 곤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하늘’에서는 말할 수 없이 크고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유진 피터슨 박사는 철저히 과거주의/묵시문학적(상징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오던
‘미래 천국과 새하늘과 새땅’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해석상 논란이 예상된다.
물론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해서, 미래 천국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편집자는 개인적으로 과거주의+미래주의, 상징적+문자적 해석을
둘 다 함께 수용한다.)
*위 요약문은, 원래 책과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요약되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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