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세례’ 와 ‘성령의 충만’ 행1:8, 엡5:18 이기남 목사 스크랩
◑1. 성령님의 세례와 성령님의 충만..
신약 성경에는 「성령님의 세례」라는 명사는 나오지 않고,
「성령님으로」와 동사 「세례 주다」가 결합된 형태의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님의 세례는 곧「동사적 표현」인 것입니다.
이 용어는 신약에 7번 나옵니다.
마3:11, 막1:8, 눅3:16, 요1:33, 행1:5, 11:16, 고전12:13
예수님은 제자들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고 약속하셨습니다. 행1:5
그런데 이 약속이 성취된 귀절인 행2:4절에서는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두 귀절은 성령님의 세례와 성령님의 충만의 개념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함께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속된 성령님의 세례의 성취가 성령님의 충만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론을 다루는 학자들 중에도
성령님의 세례와 성령님의 충만을 구분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론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기초로하여 생각해 볼 때,
성령님의 세례와 성령님의 충만은 구별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1. 성령의 세례
“세례를 받는다”는 헬라어 “밥티조”는 “담근다” “잠긴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헬라어 시제는 「부정과거형」으로서
이 시제는 「단회성의 동작」을 나타낼 때 쓰는 시제입니다.
「역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 한번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시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구원 받은 증거로 받는 물세례도 한 번 받습니다. 반복해서 받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세례의 목적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고전12:12, 27).
성령님의 세례를 받음으로서 사람이 몸이신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종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세례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세례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룰 수 없으며,
지체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것은 성령님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행사임을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이시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이며,
예수님을 주님이시요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성령님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까지는 첫 번째 일이며,
동시에 가장 처음 되는 성령님의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2. 성령의 충만
그런데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성령님을 따라 살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따라, 곧 사람을 따라 살면」
성경은 그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하십니다(고전3:3절).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람에게 「성령님의 계속적인 간섭」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에 의한 새로운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성령님으로 충만하라”고 명령합니다(엡 5:8절).
「성령님의 세례」는 사람이 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명령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세례와 성령님의 충만을 구분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충만의 의미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님의 충만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4)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행 4:8),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행 4:31),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 6: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행 7:55),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와 같은 구절들입니다.
이는 모두가 성령님의 충만을 묘사하는 말씀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충만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1. 성령님의 충만은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서 더 나아가는 역사」입니다
①성령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계기로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었던지, 이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과 함께 성령님은 그 사람 속에 내주하십니다.
임하셔서 내주하십니다.
②그런데 이것이 성령님의 '충만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에서, 성령님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이미 (성령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18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성령님의 역사로 네가 그 고백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4에서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③예수님은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
성령님의 충만은 거듭나는 것보다 더 나아가는 역사입니다.
물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성령님의 충만을 받을 수는 없지만,
성령님의 충만은 더 나가는 역사입니다.
요15:3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로 깨끗하였으니” 라는 말씀의 뜻은 벧전1:23을 통해 보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④사도행전 8:12-16에는 빌립의 사마리아 복음 역사가 나옵니다.
빌립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성령님의 충만을 받지는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그들을 돕고 기도함으로
그들은 성령님의 충만을 받게 되었습니다.
⑤누가복음 24:49절을 보십시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것입니까? 11사도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3년 이상 영생의 진리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온 세상에 나아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한 가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는 것,
곧 위(에피)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 것, 곧 「성령님의 충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받을 때까지 복음 사업에 착수하지 말고
그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⑥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심으로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으신 후에 비로소 메시아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권능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도 메시아의 공생애는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시고 능력을 입히우신
다음에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와 같이 평범한 인간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⑦사도행전 19장 1-6절에는 에베소 교회의 초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러 구약 선생인 아볼로의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얼굴이 시커멓고 찌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은 성령님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까지만 듣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성령님의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⑧이상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어떠한 봉사를 하려면
먼저 중생을 체험하고 우리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받을 뿐 아니라,
능력의 입히움, 곧 「성령님의 충만」을 받지 않으면 안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 것은 거듭난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며,
한층 더 향상된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은 구원받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아직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부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령님을 모시고 있으며,
성령님께서 그 심령에 내주하여 계십니다. 로마서 8:9절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나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충만은 다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성령님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령님을 모셨으나 성령님이 실제 삶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⑨주인을 문간방에 방치하는 것과
그 주인으로 하여금 자기 집을 온전히 소유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주인을 문간방에 방치하는 것은 성령님의 내주 하심에 비유된다면,
그 주인으로 하여금 자기 집을 온전히 소유하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충만에 비유됩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내재하신 것을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그저 우리 심령에 계신 것과, 성령님으로 충만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성령님의 충만한 상태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⑩물론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의 식구들과 같이 거듭날 당시에
바로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는
예수님 승천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구세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신자들이 이 성령님의 충만을 구하지 않음으로서
이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의 충만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과 주님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에
깊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①“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성령님의 충만을 주고자 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성령님을 받았다고 자랑하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맨 처음으로 성령님의 충만에 관하여 약속하신 말씀,
곧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②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성령님의 충만을 주고자 하셨고,
이를 받으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이 성령님의 충만을 받음으로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성령님의 은사장」을 읽어보아도 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령님의 충만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주님을 증거하는 일과, 주의 사업에 봉사하는 일에 관련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와 관련되지 않고 성령님의 충만을 말씀한 귀절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을 간구하는 사람은 그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목적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주님의 사업에 봉사하는데 쓰임 받고자 하는
것, 곧 목적이 순수해야 합니다.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동기,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사업을 섬기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③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충만의 주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역사를 섬길 준비를
하게 하고, 또한 그 일에 적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성령님의 충만의 근본 목적,
첫째 목적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 도취에 빠져
혼자 기뻐하라고 성령님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충만을 주고자 하십니다.」
④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들을 보실 때 우리를 보실 때처럼,
안타까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도 알지 못하고,
성령님도 알지 못하여, 어두움과 죄 가운데서 무거운 짐을 지고 비참하게 살 때,
주님이 우리를 보시고 얼마나 마음 아프시고 안타까워 하셨습니까?
눈물을 흘리시며, 주의 종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주시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고 모든 죄 짐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오늘날 세상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들이고, 그들의 영혼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영원한 지옥 불못으로 떨어져 가는 영혼들을 보시고
얼마나 마음을 아파 하시고, 탄식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지 모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 해답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자녀들에게,
성령님의 충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⑤우리 교회가 왜 열방을 바라봅니까?
하나님의 그 마음, 하나님의 그 안타까우심, 하나님의 그 심장,
그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여, 나에게 주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의 고통을 주시옵소서..
주의 심장을 주시옵소서.. 주의 그 아픔을 주시옵소서..
주의 그 안타까움과 상한 심정을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영접하고,
주님의 마음에 자신도 동참하고자 하는 그 사람에게 성령님의 충만을 주십니다..
⑥「어떤 사람들은 부흥회니 영성 훈련이니 하는 곳에서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정작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영혼들, 지옥 불로 떨어지고 있는 영혼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기는 신령한 사람이라는 의식 속에 살아갑니다.
은근히 다른 성도들을 무시합니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님의 충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기를, “성령님의 충만”을 언제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하는데 필요한 자격과 관련되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충만은 물론 우리를 기쁘게 만듭니다. 그래서 흥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에게 유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⑦우리가 성령님의 충만을 받을 만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성령님의 충만을
받게 된다면...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서 성령님의 충만을 받지 못한다면
죽어 가는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서
성령님의 충만을 받지 못하고,
따라서 마땅히 주님께로 인도할 영혼들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주님 앞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성령님의 충만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⑧동시에 우리가 주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그리고 거룩하고, 즐겁고,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충만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님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중략)
우리가 이런 갈망과 투쟁이 없이 얼마나 쉽게 성령님을 문간방으로 몰아냅니까?
내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님을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살다보면
성령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성령님과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령님에게 인사도 안합니다.
성령님은 문간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소멸」입니다.
성령님은 모셔들이면 오시고, 냉대하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강압적이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너무나 인자하시고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겸손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어리석은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오늘 내가 뭘 해야 하지?”
“어떻게 할까?” 머리 짜고, 궁리하고 그리고 뛴단 말입니다.
성령님은 무시하고 쫓아내고.. 그러니 얼마나 인생살이가 피곤한지 모릅니다.
하루를 살고 나면 녹초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울고 계시는데
자기가 얼마나 잘났다고 혼자서 뛰어 다니다가 녹초가 되어 우는 것입니다.
서로 우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우시고 나도 울고..
성령님을 준다고 어떤 부흥사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 손을 휘저으며
“휙”하고 바람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성령 받아라” 외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처럼 합니다.
이는 참으로 무지의 소치입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사람이 조종하거나,
이런 식으로 왔다가 휙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인격이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내 속에 혈과 육이 살아 있는 한 성령님은 늘 쫓겨납니다.
어떤 점에서는 우리의 혈과 육보다도 약하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를 깨뜨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혈과 육보다도 약하시고,
우리의 감정보다도 약하시고, 그래서 소멸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같이 살고 계시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자 하시는데,
늘 냉대하고 쫓아내니 성령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고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우리가 성령님을 소멸시키면 내 속에 혈과 육이 왕 노릇하게 됩니다.
교회 내에 속된 마음과 인간적인 것들이 머리를 들게 됩니다.
섬김과 순종과 사랑보다 인간적인 생각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은 반복해서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충만은 「반복해서 받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①그것은 어떤 사람이 분명히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또한 성령님으로 거듭 충만함을 받지 못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
그때 그때 당하는 비상한 사태를 극복해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8절을 보면, 베드로가 또 다시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②「충만함」이란 헬라어는 현재형입니다. 「현재 충만함」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4:31절은 말합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여기의 “충만하여”도 바로 즉석에서 생긴 사실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이때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 중에는 물론 베드로도 끼어 있었습니다.
③사도행전 2-4장 사이에 베드로가 세 번이나
별개의 경우에 성령님의 충만함을 (반복해서)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물론입니다.
베드로는 이후로도 로마에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무수히 반복해서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넘어지면 또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새롭게 죄 사함을
받듯이 「성령님의 충만도 반복해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④그러므로 과거에 아무리 분명하고 놀라운 성령님의 충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업에 봉사하려면 그때 그때 일어나는 사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몇 번이고 새롭게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순절 성령님의 충만의 역사는 적어도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⑤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만나를 「일용할 양식」으로 매일 먹는 훈련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꺼번에 열흘 치 아니 10년 치 40년 치도 주실 수 있으시지만
일용할 양식으로 매일 매일 일정한 양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믿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 것도 만나를 먹듯이 매일 새롭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⑥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에 먼저 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성령님께 인사하고, 성령님의 세례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을 받고, 오늘 하루의 삶을 성령님께서 주관하시도록 온전히 맡기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것을 결단하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⑦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은 성령님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이는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과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린양 보좌 옆 생명수 강물의 줄기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듯이, 성령님의 충만의 복을 마셔야 합니다.
매일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 첫 시간을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순절과 같은 축복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누구나」 성령님의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무 길어서 중략)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하신 말씀 만큼이나 강하고 중요한 명령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성령님의 충만」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충만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유업입니다.」
「성령님의 충만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08.05.18.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원제목 : -성령님의 세례를 받으라 4-
◑성령의 단계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목사이고
목사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은 성령의 체험입니다.
성령의 체험이 강력할수록 목회자가 바뀌는 정도가 심하고
목회자가 바뀌는 정도에 따라서 교회가 바뀝니다.
미국에서 지도자론을 가르치는 엔스툼 교수는, 많은 교회를 연구한 후에
목회자의 영적상태와 교회의 영적상태가 똑같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습니다.
목회자가 뜨거우면 교회가 뜨겁고,
목회자가 성질이 급하면 교인들이 급하고,
목회자가 느리면 교인들도 느리고,
목회자가 나태하면 교인들이 나태하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단계에 대하여 살펴보면
▶첫 단계는 '예수 믿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령의 도움>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절대로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류 신학은 이 단계를 성령세례, 성령충만과 동일시합니다.
만약 '믿음'을 에드워즈 목사님이 강조한 '완전한 회심' 단계 만큼 끌어올릴 경우
예수 믿는 것=성령세례가 성립될 수도 있겠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령세례>를 받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본격적인 성령을 받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을 구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11번 나타나셨는데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나타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반드시 예수 믿는 여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받으라는 말을 예수 믿지 않는 자에게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를 믿으라고 하셨지,
성령을 받으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꼭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성령을 받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단계’와 ‘성령을 받는 단계’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믿음의 단계 위에 성령의 세례를 받는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령충만>의 단계입니다.
성령이 넘치는 단계입니다.
내게 구원의 확신이 없이 누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며,
내가 뜨겁지 않고 누구를 뜨겁게 하며, 내가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고
누구에게 성령의 충만을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무디의 저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디가 1855년 4월 25일에 킴볼스 선생과 요1:12절을 붙잡고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때에 그는 “내가 죽을 때까지 영혼을 구원하겠습니다.”
라고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그후 그의 생의 목표는 선교로 바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을 받으면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영혼구원하는 일에 투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성령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귀의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면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고생문이 훤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무디 선생이 6천 명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데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시카고에 왔다가, 시청에 들르지 않고
무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겠다고 결정하고는 예배당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무디는 설교하다가 예배당 뒤에 링컨 대통령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러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니 국민학교 4학년을 중퇴한 털보 영감이
대통령이 됐군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무디가 말하기를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구두 가게에서 일하던 내가 6천 명이나 되는 여러분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우리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도록 하나님께매달려 기도합시다.” 라고 하고는
통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무디가 가만히 보니 성령이 너무 충만하게 임하여 사람들이
모두 정신이 빠져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디가 “주여, 성령 그만 주옵소서,
더 주었다가는 미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단계에 속해 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저(강문호 목사님)는 성령의 체험을 강력하게 한 경험이 있습니다.
김활란 박사님이 살아계실 때에 이대 의대, 연대 의대, 서울대 의대, 가톨릭 의대의
4개 대학 80명을 모아놓고 저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성경공부를 가르치러 갔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가르칠 때는 좋은데
그들을 보면서 자꾸만 열등감이 밀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1년만 더 해달라고 부탁해서 1년을 더 하는 도중에
강원도 정선으로 16명을 데리고 수련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나를 향한 예정과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열등감은 씻은 듯이 없어졌고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체험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성령 받는 것과 다릅니다.
저는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모태신앙으로 오랫동안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다가
33세에 성령을 체험하고서 제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체험을 아직 받지 못했다면 성령체험을 할 때까지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목회자의 설교는
듣기가 너무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영적 지도력은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체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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