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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고통’의 원인에 대한 이해

LNCK 2008. 8. 27. 15:00
 

◈‘고통’의 원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    눅12:6~7      인터넷설교 녹취


약간 길지만, 소책자 읽으시는 마음으로 읽어보세요!


▲도입 : 자연 재해(天災)로 고통 받는 사람들

작년에 태풍이 미얀마를 강타해서 약 13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이재민 250만 명이 발생했다.


금년 5월에는, 중국 쓰촨성 지역에 강진이 일어나서

약 8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이재민은 무려 1천3백만 명이 발생했다.

1천 명씩 횡대로 세우면, 1만3천 줄이다. 그만큼 많은 숫자이다.


이렇게 고통당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고,

자기 나름대로의 꿈과 이상이 있었고, 우리처럼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렸을 때,

그들의 절망, 좌절,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人災)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

자연 재해도 인간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보다 사람이 더 큰 고통을 준다.

2차대전 때는 도합 2천7백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도 약 1백3십만 명이 희생되었다.

‘자연’이 주는 어떤 재앙보다 큰 해악을, 다름 아닌 ‘사람’이 인류에 끼치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북한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고,

1990년도에는, 북한주민 중에 약 3백만 명이나, 굶어 죽었다고 한다.


▲왜 이런 일(고통)이 일어나야 하는가?

왜 사람은 꼭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죽은 사람은 물론이고,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

장애인이 된 사람들... 이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더욱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 잘못도 저지를만한 시간이나 의지가 없는

순진무구한 영, 유아, 어린이들이

어머니를 잃거나, 장애인이 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


이런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신앙적 질문 제기

지진을 당한 그들과 우리의 (도덕적) 차이는 거의 없다.

단순히 그들이 재난이 일어난 지역에 살고 있었다는 잘못 밖에 없다.

혹은 폭군이 다스리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죄밖에 없다.

그러기에 ‘고통의 원인은 죄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비논리적이다.


①모든 고통의 원인이 정말 ‘죄’인가?

②또한 자비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이런 대 재앙/큰 고통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가?


이런 질문은 사실상 새로운 것도 아니다.

1755년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6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이 때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위의 질문(①, ②)을 제기했다.

사실 볼테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해답을 찾아보는 것이 이 설교문의 주제이다.



◑1.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 때문이다> 라는 주장에 대하여


▲너무 단순한 대답

지진, 전쟁, 질병, 상실 등 모든 고통은,

당사자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가장 손쉬운 대답이다.


모든 종교는 ‘인과보응’을 믿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읽었던 [명심보감]의 제일 첫 번째 문장도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갚고,

선을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늘이 재앙으로 갚는다’로 나온다.


아들 일곱, 딸 셋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리고,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자기 몸에 몹쓸 병까지 걸려 고통당하던 욥에게

그의 친구 세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소리가

‘네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고 했다.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2005년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도

일부 사람들은 ‘거야 그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인과보응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탄절에 교회 가서 예배 드려야지, 바닷가에서 놀다가 벌 받았다’

라고 쉽게 말하기에는, 이 문제는 그렇게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단순한 대답’을 지지 하지 않는다.

욥이 그렇게 엄청난 큰 고통을 당한 데 대해

하나님은 인과보응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셨다.

‘욥이 특별히 악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도, 눅13장에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깔려죽은 18명에 대해,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같은 눅13장에,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어 드린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피해당한 그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았기 때문은 아니다’고

분명히 하셨다. 인과보응론을 반박하신 것이다.


▲인과보응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

물론 <인간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만약 인간에게 아무 죄도 없었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성경 여러 곳에도, 죄지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기근, 지진,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 당하는 모든 재난과 고통이

그 재난 당한 사람의 죄와 잘못으로 당한 것이라고 쉽게 판단하는 것은,

사실도 아니고, 성경적인 지지도 받지 못한다.

(일반적 원리로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무리다.

너무나 많은 고려 사항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미얀마 쓰나미와 쓰촨성 지진을 당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못되게 살면서도,

이 세상에서 버젓이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은 멀쩡한 데, 순박한 미얀마, 중국 내지 사람들은

부모를 잃고, 아이를 잃고, 장애우가 되는 고통을 받았다.


그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네 죄 때문에 그렇다!’

그런 식으로 말해야 되겠는가! 더욱이 사실도 아닌데 말이다.


다만 우리는, 인류가 범죄 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이 있을 수 있다.

-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고통 불변의 법칙’이란 가설

저(손봉호 박사님)는 몇 해 전에「고통 받는 인간」이란 책을 저술했다.

그 책에서 <고통 불변의 법칙>이란 가설을 만들어서 제시한 바 있다.


내용인즉, ‘전 인류가 당하는 고통의 총량은 같다’고 본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고통을 특별히 많이 당하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고통을 적게 당한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무슨 과학적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쉐일러는 ‘고통의 문제’에 관해 책을 썼는데,

그 가운에 <모든 고통에는 희생의 요소가 있다>는 통찰력을 제시했다.

예를 들면, 미얀마에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태풍의 강도가 평소보다 강했기 때문이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왜 태풍의 강도가 평소보다 그렇게 강해졌는가?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는데 동의한다.


지구가 온난화된 것은, 우리 모두가 저지른 잘못이다.

우리가 여름에 너무 시원하게, 겨울에 너무 따뜻하게 살기 위해서

또한 큰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이산화탄소를 너무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며,

우리가 갖기 원하는 엄청난 물품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수많은 공장들이 수없이 많은 원자재를 가공하며, 자연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미얀마에서 죽은 사람은 <우리 때문에 죽었다>는 말도 된다.


중국 쓰촨성 지진에 관한 원인도, 어떤 사람의 분석에 의하면,

계곡에 건설한 댐 때문이라고 한다.

엄청나게 큰 댐에, 엄청난 량의 물이 고여 있기 때문에

그 무게가 지반에 압력을 가해서,

지진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위 주장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 지진으로 죽은 사람들은,

전기를 필요로 하는 중국 사람들과,

양자강 하류에 사는 사람들의 홍수 걱정을 덜기 위해서 댐을 막았으므로,

결국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이 지진 피해를 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고통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 관계가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북한 동포들이 저렇게 굶는 것은, 그 주민들 자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잘못,

우리나라를 분단시킨 일본의 잘못,

공산주의 이론을 만들어 낸 칼 막스의 잘못 들이 복합된 것이다.

(인과보응을 적용해서 무분별한 비난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



◑2.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운명 때문이다> 라는 주장


▲모든 민족에 나타나는 운명론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이라’(운명)를 믿었다.

그리스 신들 중에 가장 힘쎈 신이 제우스인데,

제우스마저도 꼼짝 못하는 것이 바로 ‘모이라’(운명)이었다.

‘모이라’는 나중에 로마 시대에 ‘운명의 여신’으로 바뀐다.

그래서 글이나 책에 가끔 ‘운명의 여신’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하게 ‘팔자소관’이란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의 팔자소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에도 카스트 제도가 있는데,

마지막 카스트 중에도 가장 낮은 계급인 달리트(언터처블, 불가촉천민)들은

엄청난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전혀 불평이 없다.

‘팔자소관’이란 운명을 믿기 때문이다.

미리 다 결정되어있으므로, 자신이 어쩔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운명론을, 오늘날 신봉하는 사람도 많이 없고,

성경도 그런 것을 지지 하지 않는다.

 

▲운명과 비슷하게 사람들이 믿는 ‘우연’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추측컨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 것 같다.


사고가 난 것이, 재난을 당한 것이

어떤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게지!’


‘운이 나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운이 나빠서 음주운전 차량에 받혀서 장애가 되었다... 는 식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번에 지진으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

모두 ‘운이 나빠서’ 어떻게 하다가, 그 지역에 살게 된 것인가?

미얀마에서 태풍으로 숨진 사람들은, ‘운이 나빠서’ 거기 태어난 것인가?


반대로 잘 되면 ‘요행’이라 그러고

잘 못 되면 ‘불운’이라고 말하는데,

인간이 당하는 그 엄청난 고통, 좌절을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불운, 우연이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운명론, 우연론>이 그럴듯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경적이지 못한 이유는

그런 설명들이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가르친다.

비록 우리 인간이 그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당신은 참새보다 귀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새(가장 가치 없는 새) 5마리가 작은 돈 2앗사리온에 팔리는데,

그 중에 한 마리도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우리 머리에 셀 수 없이 많은 머리카락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하나 하나까지 다 세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반문하신다.

사람은 참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다.

참새를 돌보시는 주님이, 사람을 돌보시지 않으시랴는 것이다.


옆에 분과 (우스개로) 인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참새보다 귀합니다!”


참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쓰촨성 사람들, 미얀마 사람들, 북한 사람들,

그 외 우리 주변에 장애우들, 환우들,

(그들이 자기 죄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다는 생각 보다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이 다 돌보고 계신다!

-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3.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문


▲사랑의 하나님이 왜 고통을 주시나?

이런 결론을 내릴 때,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데,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라는데,

어떻게 인간에게 이런 모진 고통을 주실 수 있는가?>


또한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은 펄펄 잘 뛰어다니고,

착하고 순한 사람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다 당하기도 하는데,

‘공의의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시냐는 것이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6개국 대표가 참가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는데,

그 때 고종황제가 밀사 세 사람을 보냈다.

일본의 방해로, 이 분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 했다.


회의장에 못 들어가니까, 밖에서

이 세 분이 모여든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그 중에 이위종(당시23세, 주러 조선공사관서기관)은, 유창한 불어로,

‘정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정의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못된 일본은 회의장에 들어가서 온갖 권한을 다 행사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조선은, 그 회의장에 들어 갈 수도 없단 말인가!  

그 때 우리는 초청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때, 소위 기독교를 믿는 서구사람들이 주도하는 그 회의장에서

조선 대표는 들어갈 수 없었고,

그래서 이위종은 ‘정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울부짖었던 것이다.


▲이 문제로 시험 든 사람들

이런 주장은, 오늘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억울한 어려움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도 똑같이 제기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볼테르는 반기독교적인 인물이 되었고

버틀란트 럿셀 같은 이도 ‘자기는 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가?’

라는 책을 썼다.


▲값싼 대답은 금물!

이런 질문들에 대해,

역사상 기독교의 많은 신학자, 사상가들이 대답을 해 보려고 노력해 왔다.

그 중에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는「변신론」(하나님을 변호함)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내용이나 논지가 알찬 책은 아니어서, 이 시간 소개하지는 않겠다.)


제 개인적 주장은, 인간이 당하는 고통, 재난에 대해서

<너무 쉬운 대답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고통, 재난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거야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은 다 옳다! 죗값이다!’

이렇게 쉽게 말한다면,

그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맞는 말도 아니다.

다만 그런 값싼, 가치 없는 대답은

오히려 많은 듣는 사람들의 불필요한 반감만 자극할 뿐이다.


차라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며

항의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같이 서서 항의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직하지 않겠는가?

 

▲루이스 : 잔인한 하나님

20C 기독교 지성인들 중에, C. S, 루이스처럼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없다.

지난 세대에 가장 탁월한 기독교 옹호론자(변증가)였다.

그는 아주 늦게 회심해서, 많은 책을 썼고,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가 독신으로 살다가 중년이 되어서야 연애를 시작했다.

자기가 깊이 사랑했던 그 여인이 모진 암에 걸렸는데,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그가 곁에서 지켜봐야 했었다.


루이스는 아내를 간호하면서,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그 부인은 마침내 암으로 죽었고, 루이스는 그 고통을 바탕으로 책을 한 권 썼다.

「관찰된 슬픔」grief observed 이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기독교를 옹호했던 루이스가

하나님을 ‘잔인한 해부자’란 표현하고 있다. ‘잔인한 난도자’란 뜻이다.

외과의사들이 시체를 칼로 갈라서 보듯이, 

하나님이 잔인하게 어떤 사람들을 그렇게 다루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가?’ 라고 우리가 의아해 할 수 있지만,

저는 그 책을 읽고서

‘루이스는 참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느꼈던 그 고통, 그가 느꼈던 그 고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오히려 더 정직하게 표현한 책이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크신 면이 있다.)


우리는 이런 고통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연히 일어난 일은 -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 가치도 없는 무가치한 일을 위해서 - 인간은 그렇게 고통 받아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다. 비록 우리가 명확히 발견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4. 고통에 대한 (설교자의) 대답


▲니체의 허무주의적 해석 : 고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 틀린 답

독일의 무신론자, 허무주의 철학자 니체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통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그 고통을 당하는가?’ 라는 절실한 질문에 대해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아픔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고통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는 주장이다.


과연 허무주의자다운 해석이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의미가 없다면,

우리 삶 전체가 의미가 없게 된다.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


▲1. 고통은... 하나님이 반드시 간섭하신다.

만약에 재난이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그저 운이 나빠서, 우연히, 즉 아무 의미 없이 고통을 당한 다면,

속된 표현으로 하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그래서는 안 되고, 그렇지도 않다.

(인간은 참새보다 어마어마하게 귀하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거기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 의미를 오늘 본문 눅12:6~7절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간섭,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왜 간섭하시는지.. 그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하나님은 간섭하신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른이 하는 일을, 어린 아이가 다 알 수 없고,

전문가가 하는 일을, 초보자가 잘 알 수 없듯이,

어마어마하게 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작고 유한한 인간들은.. 다 알 수는 없다.


루이스처럼 항의하고 불평하는 것은, 그 섭리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본다. 고통이 너무 큰 좌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참새 한 마리 팔리는 것도 간섭하시는 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시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되고, 또한 사실이 그렇다.


‘너희는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주님이 우리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였다.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자존심을 좀 가져야 한다.

우리는 아무도 자기를 무시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주 중요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unique, 하나뿐이고 특별하다는 뜻) 중요한 존재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독특하다.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자식 하나 하나가 독특하기 때문에,

아무도 선뜻 자기 자식을 남의 아이와 바꿀 수 없다.


어떤 딸 부잣집에, 아들 부잣집이 어른이

자기는 아들만 많고, 자네는 딸만 많으니.. 서로 한 명씩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딸 부잣집 부부는 밤새 궁리를 하고, 고민을 했다. ‘어느 자식을 보내야 하나?’ 

밤잠 자지 못하고 내린 결론이 ‘아무도 보낼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집안에 딸이 수두룩해도, 한 명 한 명이 독특하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독특하게 소중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독특하게 보신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고난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신다. 하실 수 없다.


▲2. 간섭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이 아파하신다.

우리 자녀가 아플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떠한가?

그냥 팔짱 끼고 구경하는 정도가 아니다.

‘쟤 대신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공통적인 마음이다.


우리 중에 혹자는 장애우가 될 수도 있고, 모질게 병들 수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수도 있고, 재산을 다 잃는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구나, 나 혼자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아무도 내 고통을 같이 아파해 주는 사람이 없구나!’ 이런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주님이 나와 같이 아파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3. 고통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

‘기독교 역사학회’로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이 있다.

그 때 마침 중국에 쓰촨성 지진 사건이 일어나서

제가 대선배이신 한철하 박사께

“한 박사님,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질문을 드렸다.


그랬더니 한 박사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뭐 중국까지 거론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미얀마까지 언급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내가 당하지 않았습니까!”


오래전 일이지만, 한 박사님은 아주 아끼던 외아들 독자가 있었다.

이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잘 생기고,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이었다.

그래서 한 박사님은, 이 아들을 앞으로 훌륭한 신학자로 키워서

자신의 대를 잇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하루는 제주도 한라산에 등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그대로 바닷물에 헤엄친다고 뛰어들었는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그것은 한 박사님께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직도 ‘내가 당한 것 아니냐!’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그러면서 그 분이 입버릇처럼 말하신다.

“나는 하늘나라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가 필요한 사람이야!”

“나에게 천국이 없으면, 내 삶은 무의미해!”


C. S. 루이스가 하나님을 '잔인한 해부자'로 묘사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듯이

성도는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절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다.

 

(고통 당하는 당사자가 하나님의 자녀, 즉 성도인 경우는)

위에서 하나님이 간섭하신다, 같이 아파하신다고 했는데

거기엔 엄청난 위로가 뒤따른다. 애통하는 자가 받는 천국의 위로이다.

하나님의 임재, 현존의 행복이 그에게 주어진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만 더욱 사랑하는,

풀무불에 들어갔던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된다.

비록 세상 영광은 못 누려도, 하늘의 영광, 그 신비를 이 세상에서 누린다.

그래서 그 고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믿는다.

 

▲4. 고통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그런데 문제는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의미는 각 사람마다 각자 다르며,

궁극적으로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더구나 없다. 어렴풋하게는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알 수 없다’는 표현을 쓰도록 하자.


알 수 없는 이유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크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유한하고, 무능한 인간이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욥의 항의성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도 “네가 어찌 다 알 수 있느냐?”였다.

(이것이 욥기의 주제다. '너는 알지 못한다'이다. 욥39:19, 38:18, 22, 31, 34, 40:9등)


알 수 없으므로, 루이스처럼, 하나님께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루이스처럼, ‘잔인한 해부자’라고 항의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 의미를 우리가 지금은 다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고통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략)

<08.07.27. 인터넷설교 녹취, 정리. 손봉호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