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대한 성경적 분석 마22:37~38 인터넷설교 녹취
*여기서 ‘욕망’은 물질욕, 명예욕, 권세욕, 정욕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
▲욕망... 도저히 뗄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
우리의 일생은 마치 ‘욕망과의 전쟁’과 같다.
더욱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은, 곳곳에 우리를 욕망으로 자극하고 있다.
한 순간 은혜를 받고, 욕망을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보니, 욕망은 바로 내 곁에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다 해보셨을 것이다.
그래서「내려놓음」이란 책이 그렇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나 보다.
성도는 누구나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싶어 하고, 또 내려놓으려고 몸부림치는데,
그러나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 한 가지 욕망을 다 내려놓았다 싶었는데,
어느새 색다른 욕망이 대치해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음도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욕망을 내려놓는 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가?
어떻게 하면 성도는,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오늘 한 번 성경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1. 욕망은 하나님의 선물.. 삶의 활력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들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탐스러운’이란 단어는, 제10계명의 ‘탐내지 말라’와 동일한 단어이다.
요지는, 하나님은 탐스러운 과일을 많이 만드시고,
인간이 그 욕망대로 따 먹게 하셨다. 즉, ‘식욕, 건전한 욕망’은 주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정상적인 관계’를 금기시 하지 않는다.
아담을 위해 만드신 하와는, 그저 아담을 돕는 조력자 정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와를 볼 때 ‘결합의 욕망’을 주셨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는 고백은, 욕망의 탄성으로 들린다.
이런 욕정은 여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셨다.
아가서에 술람미 여인은, 남자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고 표출한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아2:3
여기서 ‘기뻐하다’는 말은, 원어로 ‘탐내다’는 말이다. 제10계명과 같은 말이다.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를 수풀 가운데 사과 열매처럼 ‘탐내고’ 있다.
올바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남녀간의 사랑의 탐욕을 오히려 격려하신다.
▲금욕주의는 참된 기독교 아님
기독교는 그 동안 욕망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만 주로 강조해 왔기 때문에,
마치 불교처럼, 욕망을 제거하는 금욕주의가
기독교 신앙의 목표인 것처럼 오해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욕망하는 존재’로 창조 받았기 때문에,
모든 욕망을 만약 제거해 버리면, ‘이상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런 병적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요즘
일부 50대 주부들이 앓고 있다는 <빈 둥지 증후군>이다.
▲50대 한국 여성의 <빈 둥지 증후군>
보통 주부들은, 자신의 욕망을.. 자식들의 욕망으로 대체해서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부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챙기기 보다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먼저 챙겨준다.
자기의 모든 욕망을, 자녀들이 얻는 것으로... 바라보며 만족하며 살아간다.
이런 식으로 2~30년을 살다 보면, ‘욕망의 능력’마저 퇴화되어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
그 후에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 가서 둥지를 떠나버리면,
욕망의 외적인 원천이 말라버려.. 삶의 의욕을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주부들은, 50대가 되어서,
빈 둥지인 집을 떠나, 원룸을 얻어서 혼자 밖으로 나가고 있다.
연속극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욕망을 건강하게 처리하지 않을 때..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현상이다.
그러나 건전한 욕망은 죄가 아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욕망으로, 삶을 즐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늘 찌푸리고 인상 쓰고 사는 것을...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는가!
◑2. 잘못된 욕망의 사용은... 고통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욕망은, 우리에게 활력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한계를 벗어나면.. 죄가 되고.. 결국 고통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욕망 때문에, 그것을 잘 못 사용해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욕망에 걸린 하와... 헤어 나오지 못하다.
하와가 뱀의 미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기에 좋고, 눈에 욕심 낼만 하며(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 창3:6고 했다.
여기서 ‘욕심내다’는 ‘탐내다’의 명사형이다. 같은 말이다.
즉 ‘탐내다’는 단어가 두 번 반복해서 쓰인 것은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는 순간, 탐욕이 발동되었음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와 같이 탐스러운 다른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들을 나게 하셨다. 창2:9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나무열매들이 즐비한데,
왜 하와는 굳이 선악과를 따 먹었을까?
하와는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알고 있었다.
뱀의 유혹에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고
뱀에게 말한 것을 보면,
‘먹으면 죽게 된다’는 경고를.. 자기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다.
즉, 하와가 그 실과를 보면서,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섬짓한 공포를 느낀 것 같다.
그래도 하와가 욕망에 굴복한 것을 보면,
<욕망이 그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잘 보여준다.
▲욕망은 브레이크가 안 걸린다.
‘욕망’을 연구하는 일반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도 이와 같다.
욕망을 아예 안 품어야지,
한 번 품으면... 통제stop가 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먹기도 좋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보고
하와에게 욕망이 일단 한 번 발동하자,
그것이 죽음으로 자기를 내 몰 수 있음을... 하와는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베어 먹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욕망에 한 번 사로잡히면,
누가 강제로 떼어놓지 않는 이상
절대로 거기서 스스로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욕심을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아예 잉태를 안 해야지, 욕망을 한 번 마음 속에 잉태하기만 하면,
욕심→죄→장성한 죄→죽음까지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시간의 문제다.
이것은 <욕망은, 인간의 힘으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는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로 점점 바뀌고 있다.
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일은, 매우 수치스런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욕망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금기로 삼지 않는다.
‘자신의 도가 넘는 욕망을 다 드러내는 것을’ 오히려 솔직하다는 미덕으로 여긴다.
그래서 소설가 이외수 씨는 대한민국을 ‘욕망공화국’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욕망에 있고, 모든 권력은 욕망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한국인은, 자기의 과거 정치신념이 좌나 우를 가리지 않고,
아파트 32평을 사는 순간, 가장 보수적인 정당에 표를 주고 있다고 한다.
이유인즉, 자기 아파트 값을 유지하거나 올려주는데,
보수정당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당을 폄하하는 뜻은 아님)
그래서 정당들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고서,
모든 정당들이 공통적으로 ‘뉴타운 개발공약’을 내세워서
강북지역 국민들의 욕망에 호소하며, 지지를 부탁했다.
그 결과, 사회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실제로 강북지역은 민주당이 강했는데,
‘뉴타운 개발공약’ 이후, 그 지역에서 민주당이 약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예외인가?
겉으로는 현실적인 욕망을 정죄하면서도,
속으로는 현실적인 욕망들을 추구해 오지 않았는가?
▲아파트 광고 카피의 예
욕심낸 그곳에 꿈의 그린이 온다. - 한화건설
욕심내세요, 어울림이니까! - 금호건설
사람이 욕심내는 곳 - 대림산업
욕심낼만한 이유 - 현대 리모델링
아름다운 삶의 욕심 - 고려 개발
이런 광고는, 욕망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잘 파악한 것이다.
◑3. 잘못된 욕망 제거, 어떻게 하나?
세상적 욕망은, 절제하고 참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으로... 해결된다.
이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사탄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보여주고, 즉 엄청난 욕망을 자극한 후에
자기에게 절할 것을 유혹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을 보시라!
즉, 우리가 주 하나님만 온전히 철저히 경배하고 그 분을 섬기는 길이
욕망으로 유혹하는 사탄을 이기는 길이 된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 존재의 빈 공간 =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갈망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욕망과 갈망이 모든 사람 속에 있다.
즉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주고받아야’ 비로소 만족되는 어떤 내면의 욕망이 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깊은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채워지는 어떤 욕망의 항아리에
자꾸 모조품인 세상적, 육신적 욕망과 사랑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려 한다.
그런데 몇 번 채워보지만, 밑 빠진 독처럼, 마치 갈증에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그런 세상적 것들로, 그 허무한 빈 공간을 채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세상적인 것들(명예, 권세, 물질, 정욕)로.. 채우고자 시도한다.
▲삭게오 -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다
돈밖에 모르던 세리장 삭게오가 자기 욕망을 극복하고,
자기 재산 절반을 나누어주며,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 영혼의 허전한 빈 공간이, 물질로 도저히 채워지지 않던 그 빈 항아리가,
예수님으로 채워지자...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다.
‘삭게오야 뽕나무에서 내려와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리라’고 하신 음성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한 삭게오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하루아침에 변화되었다.
자기 내면의 깊은 욕망의 심연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졌기 때문이었다.
돈이 채울 수 없었던 자기 욕망의 만족을... 비로소 맛보았던 것이다.
◑4. 기독교 역사의 교훈
▲요한 웨슬리의 통찰력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면,
죄를 지을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이 가능하다.
<전적인 성화와 완전한 사랑>이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통 불타오르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계속해서 모든 생각과 언행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영적 제사로 드리는 것이며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 우리 혀의 모든 말, 우리 손의 모든 행위에서
우리를 어둠에서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그 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저는 장로교 목사로서, 오랫동안 웨슬리의
<전적인 성화와 완전한 사랑↑>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적 타락’을 신봉하는 장로교에서는
<전적인 성화와 완전한 사랑>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도, 잘못 사용하면,
성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저지르는 모든 욕망의 범죄를
‘타락한 인간은 어쩔 수 없어!’ 라는 합리화와 변명거리로 남용될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집시다!
잘못된 욕망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영혼을 가득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 말씀 등 신앙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
- 이런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은 전적 타락한 존재라서 어쩔 수 없어!’ 하면... 교리를 오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용하는 교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례적, 형식적>이면서도
자신이 형식적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면서 신앙생활 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욕망을 제어하지 않고, 바리새인처럼 감추며 살아왔다.
욕망은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맞불로 제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거야!’ 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살았다.
▲주님께 대한 지독한 사랑이 필요하다 radical love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성품을 다해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지독한 사랑’이다.
주님이 바로 그런 사랑을 요구하신다.
‘지독한 사랑’으로, 즉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면,
거기서 어떻게 ‘악한 욕망’이 생기겠는가?
오늘 내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는 것은,
저런 ‘지독한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을 때,
자꾸 자기 속마음에서 용솟음치는 현상(욕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때, ‘내가 건강한 남자이다’라며 쉽게 생각한다.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면, 결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데... 말이다.
실상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그런 것인데... 말이다.
▲마치는 말
우리는 하나님을 ‘지독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각자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 보자.
많은 욕망을 품고 싶은 대로 다 품으면서도
자기가 버젓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귀가 주는 크나큰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마귀는 미혹의 영이다.)
목사인 저부터,
세련된 언어와 제스처로 겉모습은 그럴 듯하게 하나님을 섬길 뿐
마음 내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그런 뜨거운 사랑이.. 사실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것에 몸부림치지도 않는다.
‘지독한 사랑’이란 대중가요 가사를 보면,
젊은 청춘들이 사랑할 때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
그런 가사를 비교해서 볼 때,
‘내가 언제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드렸던가? (연인들은 다 주기로 약속한다.)
주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가?
주님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죽을 것 같은가?’
그만큼 내 신앙이 형식적, 피상적, 바리새적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온갖 욕망을 방임하는 위선자가 아닌가!
▲주님께 목숨을 다 바치는 사랑 - 가능하다. ★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아니다. 가능하다.
여러분, 연애해 보셨으니까 잘 아실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하는 연인이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할 때,
내가 그를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은.. 별로 어려움이 없다.
내가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힘들지 않는 것도
사랑과 사랑이 서로 교감되고, 응답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으로 응답하고, 그래서 더 사랑하고, 더 사랑 받는다.
이렇게 사랑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하나님이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내가 깊이 깨닫고, 깊이 느낄 때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나도 하나님을 죽기까지 사랑하게 되어 있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아니, 불가능한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 이 계명은 명령이 아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신 그 사랑에 대한 ... 반응이요, 응답이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악한 마음의 본성에서 나오는 그릇된 욕망들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수련이 필요하다.
위 사실을 알고 깨달았다고, 그냥 하루아침에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몸에 체득되기 까지는... 오랜 세월의 성숙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헨리 나우웬이 마더 테레사에게 영성에 대한 자문을 구하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하루에 한 시간씩 주님을 찬양하고,
나쁜 짓이라 생각되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마십시오!"
'헉, 하루에 한 시간씩이나 찬양하라고..?'
그만큼 주님을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이것은, 세속적 욕망과 차단된 마더 테레사 같은 수도자들에게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 '신앙의 성숙'을 요구한다.
<08.07.20. 인터넷설교에서 발췌, 축약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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