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을 먹이기 시작해서 5천명을 먹이다 눅7:28 설교녹취
◑함경도 할아버지 한 분을 섬기다.
원래 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 독일로 신학 유학을 갈 소원이 있었다.
그래서 졸업반 시절에 열심히 헬라어 단어도 외면서, 한 때 유학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제 아내는, 불어를 조금 하는 관계로, 프랑스로 유학가자고 주장했다.
그 때 한창 그런 즐거운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제가 청량리에서 지금까지 약 20년간이나 오래 사역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밥상 공동체’(무료급식)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함경도에서 피난오신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래 일화는 1988년 초겨울 스토리)
▲춘천 가는 길에 청량리역 광장에서
제가 장로회(광나루)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별명이 ‘광나루 시인’이었다.
가끔 시상이 떠오르면 시를 적곤 했던... 문학청년으로 살았다.
하루는 등교를 해 보니 ‘휴강공고’가 붙어 있었다. 속으로 얼마나 기뻤든지!
‘오늘 같은 날, 경춘선을 타고 춘천에 가서
사색을 하고, 명상에 잠기다가 돌아와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곧바로 청량리에 경춘선 기차 타러 갔다.
바로 그날, ‘함경도에서 피난 내려오신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청량리역 광장에서, 저보다 약 5미터 앞에 걸어가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갑자기 길바닥에 쓰러지셨고,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어억~’ 나는 너무 놀랐다.
그런데 많은 행인들은, 갈 길이 바쁜 모양인지, 모두 못 본 척 지나쳤다.
아무도 할아버지에게 선뜻 다가서서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춘천에 갈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었으므로...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그런 노숙자를 돕기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그의 몸과 옷에서 너무 심한 악취가 나서,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선뜻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어휴, 거지 할아버지가 간질까지 하네, 너무 안 됐네!”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서 혀를 찰 뿐, 아무도 그를 돌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그런 군중들처럼, 그 할아버지를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그 날 이전에, 제가 한 번도
청량리에서 노숙자, 무의탁노인을 돌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 유학 갈 생각 하고 있었다.
▲춘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청량리역 광장에서
그래서 저는, 기차를 타고, 춘천에 잘 갔다 왔다.
저녁에 어두컴컴할 때, 청량리 역에 내렸다.
제가 집에 가려면(당시 암사동 거주), 찻길을 건너서 버스 두 번 갈아타야 했었다.
그래서 역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너무 놀라고 말았다.
제가 아침에 춘천 갈 때, 그 자리에 쓰러졌던 그 할아버지가
밤에 춘천에서 돌아온 그 시각까지,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하루 온 종일, 역 광장에 그렇게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두 번째 그분을 보고서도, 저는 선뜻 그분께 다가가지 못 했다.
'제가 할 일'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놀라기도 했고, 속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만 했지,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주님이 내게 시키신 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 거 공무원, 경찰관들은 다 어디 가서 뭐하나?
사회복지과 사람들은 다 어디 가서 뭐하나?
어떻게 노인 한 사람이 역 광장에 이렇게 쓰러져 있는데,
하루 종일 지나가는 인파들 중에, 이렇게 수만 명의 인파들 중에
어떻게 이 노인을 돌아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나?, 정말 각박한 세상이네!’
그렇게 세상 탓, 남들 탓만 하면서
그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가,
그래도 제 마음 속에 일말의 신앙 양심이 남아있었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신비한 음성을 듣다.
그래서 제가 노인께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할아버지, 진지 드셨어요?”
노인은 먼데만 바라볼 뿐,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잠시 거기서 머뭇거리다가
노인이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해서,
일어나 제 갈 길을 가려고, 몇 발자국을 떼었다.
그 때 제 뒤통수 쪽에서 분명히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아니!” (나는 먹지 못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놀라서 뒤돌아보았는데,
여전히 할아버지는 입을 굳게 다무시고, 먼데만 계속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다.
“아니!”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제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 묻고 싶다. 그때 누가 ‘아니’라고 말했는지..
어쨌든 그 신비한 음성 한 마디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전환점)가 된 것이다.
그 때 마침 역 광장을 지나치던 사람이 우연히 말한 것을, 제가 잘못 들은 것인지...
분명한 것은, 제가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는 것이다.
▲‘함경도 할아버지’ 한 분으로 시작하다.
이어서 내 마음에 이런 내적음성이 들려왔다.
‘일도야, 너는 어느 때까지 나를, 이 차가운 길바닥에 눕혀놓을 셈이냐?’
그래서 그 분을 바라보는데,
그때부터 얼마나 제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지...
제가 바로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지나쳤던 제사장, 레위인’이었다.
저는 ‘주여, 주여’(약간 당황) 하며 그 노인께로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매주일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사랑을 외치면서도
이렇게 실천하지는 못하는구나...’ 어떻게나 제 모습이 부끄러웠던지...
저는 대책 없이 일단 할아버지를 번쩍 안아서 들어올렸다.
그분 몸에서 나는 ‘향기’가 얼마나 강력해서.. 머리가 아팠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설렁탕] 간판이 보였다.
노인을 모시고 가서, 설렁탕을 떠 먹여 드렸다.
설렁탕을 드시고 나서, 노인은 힘이 나셨는지, 저를 똑바로 쳐다보셨다.
그 때 노인과 나눈 대화, 제가 잊을 수 없는 대화였다.
“할아버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 드셔서 어떻게 해요?”
“나, 나흘을 굶었어!”
처음에 저는, 네 끼를 굶었다는 것을, 노인이 잘못 얘기한 줄로 알았다.
“네 끼를 굶으셨다고요?”
“나흘을 내리 굶었다니까!”
‘헉, 나흘씩이나?’
“아니,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가, 할아버지를 나흘씩이나 굶겼어요?
아니 할아버지, 어디 가서 배고프다고 말하면, 먹을 것 주는 사람 없나요?
어떻게 나흘씩이나 굶으셔요?” 그 때가 1988년도 초겨울이었다.
‘노인이 굶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하루 종일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 냉정한 사회!’
나는 젊은 혈기에,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저, 할아버지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잠은 도대체 어디서 주무세요?”
“길에서, 처마 밑에서, 지하도에서 자디!”
때로는 열차 속에 기어들어가서 자기도 한다고 했다.
“할아버지, 그러다가 죽으면 개죽음이에요.
왜 여기서 이렇게 사세요? 고향에 가세요, 고향에!”
(저는 그 분 고향이 함경도라는 사실을 몰랐다.)
만약 노인의 고향이 남한이었으면,
제가 어떻게 고향가실 차비라도 마련해 드릴 수 있었겠지만,
고향이 함경도(북한)이니, 어떻게 더 이상 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주섬주섬 제 갈 길을 가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 노인의 눈빛을 보니까, 도저히 그냥 놔두고 갈 수 없었다.
“저, 할아버지, 그럼 내일 다시 만나죠! 역광장 시계탑 앞에서 내일 다시 만나죠!”
그리곤 헤어져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노인이 여섯 분으로 늘어나다.
그 다음날 저는, 장로회 신학교에 등교한 후에, 계속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노인을 돌봐줄 만한 시설이 있는지, 여러 사회복지시설에 전화를 돌렸다.
오래 동안 시도한 결과, 그 노인을 받아주겠다는 곳을, 딱 한 곳 섭외했다.
경기도 양평 지나 용문에 있는 ‘희망의 집’에서, 노인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저는 모처럼 좋은 일 한다는 생각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들떠서
청량리 역광장 시계탑으로 갔다.
거기 가 보니, 대책 없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 한 분만 계실 줄 알았는데, 6명의 노인이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분들이 누굽니까?”
“내 친구디!”
그분들은 매일 밤 함께 노숙하는 그룹이었다.
나는 역광장에서 다시 공중전화를 돌렸다.
그런데 6명 모실 공간은 없단다.
“어떻하죠? 안 된다는데요...”
“누가 (시설에) 간다고 했나?”
나는 할 수 없이, 그 여섯 분께, 어제처럼 설렁탕 사 드리고 그렇게 헤어졌다.
제 용돈 1주일 치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그 날부터, 노숙자 노인들을 매일 만나서,
그들에게 설렁탕이나 식사를 하루에 한 끼씩 대접하게 되었다.
◑‘라면’이 ‘밥’으로 바뀌면서 다일 공동체가 탄생되다
▲버너로 라면 끓여드리는 일을 시작하다.
당시 저는 신학생이었고, 아내는 광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아내는 월급타면, 경대 서랍에 넣어두었고,
내가 하루에 만원씩만 꺼내서 용돈으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같이 노인들 식사대접을 하다보니,
경대 서랍에서 돈을 많이 꺼내가게 되었다.
그러자 어느 날, 아내는 돈을 다른 곳에 숨겨버렸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노인들께 식사대접을 해야 하는데,
경대에 돈은 없고...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집에 있는 등산용 버너를 갖고 나가서, 라면을 끓여드리는 일이었다.
1988년도 그때만 해도, 어느 상점에 가더라도, 수돗물은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물을 얻어서, 역광장 임시매표소 앞에서, 버너를 가열해서,
물이 끓으면, 컵라면에 부었다.
그러다가 컵라면이 모자라면, 근처 매점에 가서 외상으로 라면을 사왔다.
고마운 것은, 매점주인들이, 멀리 있는 노인들을 보면서, 흔쾌히 외상을 주었다.
이렇게 하다가 ‘다일 공동체’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라면만 계속 먹다가 길에서 토하다.
저는 이 일이 20년 이상 반복되리라곤, 저 자신도 상상하지도 못했다.
노인들이 라면을 드시니까, 친교를 위해서, 저도 그 곁에서 라면을 계속 먹었다.
(어느 때는 1주일 내내 오직 라면만 먹어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내 얼굴색이 정말 라면 색깔처럼 노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은 하루에 라면을 9봉지나 먹기도 했다.
그랬더니 지하철 계단을 올라오는데, 속에서 울렁거리면서 라면 가락이 올라왔다.
계단에 흩어진 라면 구토물을 얼른 치우고는, 공중전화로 집에다 전화를 했다.
“여보, 라면 먹다가 나 몸살 났어, 밥이 그리워.
집에 가면 즉시 밥 먹을 수 있도록, 밥 좀 차려 놔요”
“잘~ 한다. 라면 먹다가 밥만 그립냐?
마누라하고, 애들은 안 그립냐?”
▲“너도 밥이 되어라!”
그 때 저는, 다일공동체에서 매일 잠을 잤다.
집에는 1주일에 하루 들어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왔다.
제가 거기서 안 자면, 다일공동체가 엉망이 되고, 질서가 안 잡혔다.
그래도 제가 거기서 노숙자들과 함께 자야, 그런대로 질서가 유지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선량한 아내라도 뿔이 날만 하다.
그래서 집엘 들어갔더니, 아내가 1인용 밥상을 아파트 현관에다 차려 놓았다.
친절하게? 현관 바닥에 신문지까지 깔아놓았다.
늘 길바닥에서 식사를 하니, 집에서도 그렇게 먹으라는 것인가?
어쨌든 얼마나 밥이 그리웠던지,
마치 밥이 나를 보고 방긋 웃으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주인님, 어서 드셔요!’
수저에 쌓인 밥알 하나하나가, 나를 보고 환희의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한 톨의 쌀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음이... 가슴에 저며 왔다.
그래서 엉엉 울며 밥술을 뜨는데, 집사람이 보니 영락없이 돌은 사람처럼 보였다.
밥공기 옆에는 국이 있었고, 멸치 반찬이 있었는데,
국물은 ‘나는 산속에서 왔어요!’ 라고 노래했고,
멸치는 ‘나는 먼 바다에서 왔어요!’ 말하는데
저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자기 갈 길(사명)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밥을 먹다가 은혜를 받고서
워낙 눈물, 콧물을 많이 흘려서,
뭐가 들어가는지, 뭐가 나오는지... 서로 얽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 때 예수님이 주시는 내적음성이 들렸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만나와 나는 다르다. 나를 먹어야만 살리라
이 밥 먹고,
(내가 생명의 밥이 된 것처럼) 너도 밥이 되어서,
저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라!’고 속삭이시는 것 같았다.
▲말기 환자들도 있았다.
청량리에 라면 드시러 오시는 분들 중에는
결핵 말기 환자들도 있었다.
어떤 분은 라면을 드시다가도 옆으로 퍽 고꾸라졌다.
그래서 제가 달려가서 제 품에 안으면,
그분은 피를 퍽 토하면서, 그렇게 제 품에서 죽었다.
순간 제 얼굴에는 그 토한 피가 다 튀었다.
또 어떤 때는, 30대 젊은이가 라면 먹으러 왔다가 쓰러지길래
근처 병원에서 안 받아주고, 미아리 성가복지 병원에 가라고 소개해 주었다.
택시도 안 태워주고 (용달차에 싣고 가라며, 기사가 내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었다.)
그래서 아예 제가 그를 업고, 청량리에서 미아리까지 걸어갔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하면서... 몇 시간을 그렇게 업고 갔다.
미아리 병원에 도착해서, 그를 병상에 눕히고, 나도 지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잤다.
얼마 시간이 지나서 깨보니, 등허리가 이상해서 거울을 봤는데,
그 젊은이가 토한 검붉은 피가, 제 목덜미에서부터 온 등짝과 다리까지
벌겋게 말라붙어 있었다.
▲깊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
이런 일이 있다가,
현관에서 신문지 깔고 밥상 받은 그 다음날 아침에,
우리 집 화장실에서, 속이 아래서부터 뒤집히는 엄청난 구토 같은 것이 일어났다.
‘드디어 나도 그들이 묻힌 피에 감염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속에서 올라온 것은 피가 아니었다.
내 깊은 속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울음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자세히 모르고,
그냥 화장실에서, 내 깊은 곳에서부터 구토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을...
목을 놓고 계속 울었다.
한 30분 울었을까?
속이 후련해졌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아내가 어디 갔나 찾아보니,
저 구석 연탄보일러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동안 입을 틀어막고 흐느끼던 아내가
제가 통곡을 그치니
그 때부터 자기가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흘린 눈물, 콧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제가 말했다.
“여보, 당신이 왜 우는지 짐작이 가 (남편이 너무 보기에 안 되서 울지?)
그런데 나는 내가 왜 울었는지 짐작이 안 가,
내가 왜 울었는지 모르겠어. 깊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속울음을 울었어.”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저는 당신이 왜 우는지 나는 알아요.
그분들 라면 끓여주고, 당신은 집에 와서 밥 먹으니
미안해서 우는 거야.
그러니 이제 그만 해!
마누라가 해 주는 밥 한 끼 못 먹고, 그걸 다 토해 내?
나랏님도 못한다는 빈민구제를, 왜 당신이 한다고 나서서 그래?”
그러면서 아내는 통장을 제게 건넸다.
“여보, 이거 우리 집 전 재산이니
이 돈으로 그분들 밥 한 끼 제대로 대접해 드리고, 이제 그만 하자”
통장에는 78만원이 들어있었다.
▲최초의 밥상공동체
그래서 그 돈을 찾아서
1990년 4월 부활절 날 아침,
청량리 야채시장 뜰에서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40명의 할아버지가 '라면에서 밥으로' 식사를 시작하신 것이... 최초의 밥상공동체였다.
우리는 40명분 식사를 준비했는데, 소문 듣고 정작 80분이나 찾아오셨다.
그 야채 시장의 최초 식사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기도드렸다.
‘하나님, 이 밥 먹고, 제가 또한 밥이 되어,
이 땅에 소외된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밥이 되기 원합니다.’
그 때 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밥상공동체는 필리핀, 네팔 등 해외로 까지 진출했고,
이제는 하루에 매일 5천명이 식사하는 공동체로 성장했다.
모두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돕는 분들이 줄을 잇다.
하루는 제가 청량리 시장에서 리어카를 끌고 가는데,
갑자기 리어카가 무겁게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야채 좌판 아주머니가 무, 배추를 리어카에다 막 실었다.
“이거 내일 아침 노인들에게 국거리 해 드리세요!”
자기도 궁색한 좌판 아주머니가, 그런 기부를 아낌없이 해 주셨다.
좀 더 지나가니까 생선 파는 아저씨가
“이거 상한 것 아닙니다. 오늘 밤 졸이면, 내일 반찬 됩니다.”면서
리어카에 생선을 얹어주셨다.
그 선물을 받고 기뻐서 공동체 건물에 도착해보니,
누군가가 내일 밥을 해 드리라고, 쌀을 갖다놓고 가셨다.
그런 놀라운 기적, 끊임없이 채워지는 기적, 5병2어의 기적이
두 달 동안이나 연속되었다.
그러면서 차차 외부로 알려지면서, 영락교회, 소망교회, 주님의교회 등
후원교회들이 나타났다. 자원봉사자들도 속속 찾아오셨다.
▲섬기는 자가 큰 자
우리는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철저히 서로 경쟁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서로 경쟁하는 것이 몸에 배여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더 잘 섬기는가?’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누가 누가 잘하나?’ 그런 유치한 경쟁은 할 필요 없다.
우리들은 (유치한) 유치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이 ‘누가 더 잘했습니까? 누가 더 큰 자입니까?’를 따진다면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까?
섬김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서’이다.
말없이, 묵묵히, 자기 받은 사명만 계속 감당하면 된다.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대로 “아닙니다. 당연하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부 한국교회가 방향을 잘 못 잡은 듯
너무 많은 신학생들이, 또한 일부 목회자들 가운데
대형교회가 선망의 대상이 되어서
자나 깨나 대형교회 담임목사 되는 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진정한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서로 경쟁하고, 서로 더 커지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그래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사람을 더 많이 동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라고 믿는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손양원 목사님이시다.
그 분은 대형 사역, 큰 교회를 추구하지 않으셨다.
그저 묵묵히 섬김의 본을, 값진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눅7:28
(현재적+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즉, 자기를 작은 자로 낮추어 남을 섬기는 자가
그(세례요한) 보다 더 큰 자라고 주님이 인정하셨다.
사람들은.. 많이 동원하는 목회자가 ‘큰 자’라고 하겠지만 (비난 아님)
주님은.. 자기를 낮추어 남을 섬기는 자를 ‘큰 자’로 인정해 주신다.
우리는 과연 누구에게 ‘큰 자’로 인정받기 원하는가?
여러분, 묵묵히 음지에서 섬김에 있어서.. ‘큰 자’가 되기를 우리가 소망하자. (계속)
◑김연수 사모님 일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25세까지 방황하던 나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김연수(아내)를 만나게 해 주셨다.
당시 저는 전국의 수도원을 순례하던 차에, 어느 수도원에서 그녀를 만났다.
제가 그 수녀(후에 제 아내)에게 ‘저는 수도사가 되고 싶습니다’ 했더니,
그가 제게 ‘아닙니다. 전도사님은 목사님이 되셔야 합니다!’고 말했다.
제가 천주교로 개종한다고 말하면 환영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충남 논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동네에 감리교회가 있어서, 어릴 적에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제가 지금은 수녀로 있는 것도 마찬가지요,
당신도 가톨릭 신부가 된들, 수사가 된들, 신학자가 된들,
뭐가 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뭐가 되려고 하기보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당신 자신이 ‘교회’로서,
어떤 인격의 사람이 되는지가 본질적으로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굳이 지금 당신이 몸담은 교단을 떠나서 여기로 오려고 하지 말고,
지금 있는데서 바른 믿음, 바른 신앙으로 열심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서로 대화하며 교제하다가, 지금은 제 아내가 되었다.
더 궁금한 점은「밥 짓는 시인, 퍼 주는 사랑」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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